소설리스트

787화 (783/930)

일용할 양식

산속을 헤맬 때 냇물을 따라 이동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라이는 서쪽으로 진로를 잡았다. 메르헨 영지가 있는 곳은 남쪽이었고, 도렌 영지는 북쪽에 있다. 동쪽으로 가면 산맥에 막혀 더 이상 갈 수가 없다. 그렇다면 그가 가야 할 방향은 서쪽밖에는 없었다.

계속 걸어가다 보면 새로운 영지가 나타날 것이고, 운이 좋다면 살길을 찾을 수 있으리라.

냇가를 벗어난 후, 굶기 시작한 지가 며칠이나 흘렀는지 라이도 잊어버렸다. 도중에 토끼와 같은 작은 짐승들을 몇 번 보기는 했지만, 그에게는 그걸 잡을 방법이 전혀 없었다.

“배고파…….”

이젠 더 이상 걸을 힘도 없다. 라이는 이대로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고만 싶었다.

‘조금만 앉아 있어도 너무너무 편할 거야…….’

유혹이 심하게 느껴졌지만 이를 악물고 참았다. 한 번 주저앉으면 도저히 다시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던 것이다.

라이는 지팡이 삼아 들고 있던 나뭇가지에 힘을 줘 조금씩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무기로 쓴답시고 나뭇가지를 주워 끝을 뾰족하게 갈아 놨지만, 지금은 지팡이로 요긴하게 써먹고 있는 중이다.

“정신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걸어야 해. 그나저나 이 근처에 냇물이 없나?”

물이라도 잔뜩 들이키면 잠시나마 배고픔이 사라질 텐데……. 그리고 돌 틈을 뒤지다가 운이 좋다면 가재나 다슬기 따위를 잡아먹을 수도 있다.

이때, 갑자기 그의 코에 희미한 악취가 감지되었다. 그리고 그 악취는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떠올리기도 싫은 악몽과도 같은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젠장. 배가 고프다 보니 이제는 별 거지 같은 냄새까지 다 느껴지네.”

하지만 그의 뇌리에 떠오른 것은 개고생을 했던 끔찍했던 기억이 아니라, 특유의 노린내만 참을 수 있다면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했던 오크 고기의 맛이었다. 그러자 군침이 저절로 입에 고였다. 그리고 배가 요동을 쳤다. 배가 고프다 못해 이젠 쥐어짜듯 아프기까지 했다. 극한 상황에 처하면 헛것이 보이거나 들리는 것처럼, 너무 배가 고프다 보니 있지도 않은 냄새까지 느껴지는 거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오크가 이런 곳에 있을 리가 없잖아. 저 위쪽에 얼마나 굳건한 방어선이 쳐져 있는데…….’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오크 냄새가 더욱 짙게 풍겨 왔다. 그리고 뒷골이 섬뜩해지는 이상한 기분. 바람이 아주 약하게 뒤쪽에서 앞을 향해 불고 있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자마자, 라이는 급하게 앞으로 몸을 날리며 땅바닥을 굴렀다.

그와 동시에 ‘부웅!’ 하는 등골이 오싹한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라이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며 뒤로 돌아섰다. 오랜 세월 훈련으로 다져진 그의 몸은 자신도 모르게 나무창으로 방어 태세를 취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 있다는 게 자신이 생각해도 신기할 정도다.

놀랍게도 그의 눈앞에는 오크 한 마리가 몽둥이를 들고 황당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휘청거리며 다 죽어 가던 먹잇감을 향해 휘두른 몽둥이가 빗나간 게 너무나도 어이가 없었던 모양이다. 곧바로 2차, 3차 공격을 해야 했음에도, 멍청하게 그냥 서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오크를 보자 라이는 마치 불알친구라도 만난 듯 반갑게 외쳤다.

“고기닷!”

자신이 오크의 뱃속에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그저 저 불룩 튀어나온 뱃살만 봐도, 입가로 군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 토실토실한 뱃살 좀 봐! 이건 분명 대지의 여신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하사하신 양식임에 틀림없어. 감사히 먹겠습니다, 여신이시여. 흐흐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어차피 굶어 죽으나 오크에게 맞아 죽으나 매한가지였으니까. 하지만 저놈을 잡을 수만 있다면……. 꿀꺼덕! 생각만으로도 입 안 가득 솟구쳐 오르는 군침을 억제할 수가 없었다.

그런 라이를 바라보던 오크 녀석이 한 방에 끝내지 못한 게 무척 짜증 난다는 듯 거칠게 콧소리를 내며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왔다. 그리고 라이를 향해 커다란 몽둥이를 힘껏 휘둘렀다. 상대는 며칠 굶은 듯한 행색을 하고 있는 비쩍 마른 호비트, 조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상대를 깔보고 무식하게 공격을 크게 하면 반드시 빈틈이 생기게 마련이다. 라이는 살짝 몸을 틀어 몽둥이를 피하며 오크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취익?”

순간 오크의 눈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라이의 나무창이 오크의 몸 속 깊이 파고든 것은 거의 동시였다.

“크아악!!”

사람이라면 치명상을 입을 정도의 강력한 일격이었지만, 오크는 쓰러지지 않았다. 오크는 고통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몽둥이를 들어 올려 수평으로 강하게 휘둘러 왔다. 이번에도 부웅 하는 파공성이 울려 퍼질 정도의 큰 공격이었다.

라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치명상을 입혔다고 생각했는데 설마 곧바로 반격을 할 거라고는 예상조차 못한 것이다. 피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퍼억!

몽둥이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라이의 몸은 충격을 못 이기고 붕 떠올랐다가 땅바닥을 몇 바퀴 구른 뒤 나무에 부딪치며 그 움직임을 멈췄다.

“취익……!”

오크는 거칠게 콧소리를 내며 몸에 박힌 나무창을 뽑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나무창이 뽑혀 나오며 피가 흘러나오긴 했지만, 그리 깊은 상처는 아니다. 오크는 쓰러트린 호비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모처럼 사냥한 호비트인 만큼 들고 가서 동료들과 나눠 먹으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샌가 호비트가 일어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취익?”

오크는 인상을 찡그렸다. 한 방이면 골로 보낼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좀 약했던 모양이다. 뭐, 고기야 패면 팰수록 부드러워지니 몽둥이를 한 번 더 휘두르는 수고 정도야 언제든 환영이다. 마지막 일격을 가하기 위해 라이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선 오크.

부웅!

이번에는 확실히 마무리하기 위해 호비트의 머리통을 향해 몽둥이를 내리쳤다. 아예 골통을 으깨 놓을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 순간 오크의 두 눈이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접시처럼 휘둥그레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비실거리던 놈이 자신이 있는 힘껏 휘두른 몽둥이 공격을 맨손으로 막아낸 것이다.

“취익?”

오크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오른 순간, 라이가 주먹을 휘둘렀다.

퍼억!

오크에 비한다면 가냘퍼 보이기까지 한 인간의 주먹. 그런데 놀랍게도 그 주먹에 가슴이 움푹 함몰된 오크가 주저앉듯 쓰러졌다. 검으로 찔러도 치명상을 입히기 힘들다는 강인한 오크가 인간의 주먹 한 방에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한 방에 자신의 모든 힘을 다 소모했다는 듯 라이 역시 그 옆에 픽 쓰러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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