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응…….”
오크의 몽둥이에 가격당할 때는 정말 죽는 줄만 알았다. 아니, 정말 죽어 버린 줄 알았다.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정신줄까지 놔 버렸을 정도였으니까.
‘내가…, 지금 살아 있는 건가?’
눈을 감은 채 손가락 끝을 살그머니 움직여 봤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 같긴 했지만 눈을 떠 확인할 엄두는 도저히 나지 않았다.
‘살아 있으면 뭐 해. 또다시 잡혀 왔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악몽과도 같았던 오크의 노예생활을 또다시 해야 하다니. 어쩌면 이번에는 살아남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 기왕에 죽을 거 빨리 죽자. 그때 그 개고생을 하면서 확실히 배웠잖아. 밖에서 도와주지 않는다면, 결코 살아서 나갈 수가 없다는 것을.’
라이는 눈을 번쩍 뜨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외쳤다. 오크를 도발해서 빨리 잡아먹힐 요량으로.
“야, 이 돼지 새끼들…, 어?! 오크 굴이 아니잖아.”
라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작금의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때 자신의 옆에 쓰러져 있는 오크가 눈에 들어왔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불가사의한 일이라도 보는 듯 이 상황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의구심은 극심한 배고픔에 밀려 연기처럼 사라졌고, 라이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드디어 먹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고기를! 라이는 정신없이 오크에게로 달려들었다.
불을 피울 도구도 없고, 오크의 사체에서 고깃덩이를 잘라 낼 만한 칼조차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크 고기를 먹을 수 없느냐 하면 그건 아니다. 라이는 오크의 팔을 덥석 붙잡은 뒤 주저하지 않고 이빨로 물어뜯었다.
오크의 피부는 강한 햇빛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여렸기에 이빨로 물어뜯자마자 비릿한 피가 왈칵 뿜어져 나왔다. 라이는 뿜어져 나오는 피를 고개를 돌려 피하기는커녕 반갑다는 듯 쪽쪽 빨아 마셨다. 피 냄새가 너무나도 향기롭게 느껴졌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피는 아직 따뜻했다. 따뜻한 피가 뱃속에 들어오니 정말 살 것만 같았다.
부스럭.
그런데 이때 수풀 속에서 웬 사내 하나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사내의 갑작스런 출현에 라이는 기절초풍할 듯 놀랐다. 용병단에서 탈영한 자신을 잡으러 온 추격자인 줄 착각했던 것이다.
“허억!”
깜짝 놀란 건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서, 오크 팔을 붙잡고 뜯어먹고 있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상대의 얼굴은 물론이고, 몸 여기저기가 온통 붉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도저히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저게 사람이야, 몬스터야?’
사내가 자신을 당혹스런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라이는 상대의 약점을 파악하기 위해 열심히 눈알을 굴렸다. 튼튼해 보이는 투구, 사슬갑옷으로 몸 전체를 두른 것만으로도 모자라 조끼처럼 생긴 철판갑옷으로 몸통을 보호하고 있다. 엄청나게 무거울 것 같다는 생각에 앞서, 라이에게 떠오른 것은 절망감이었다. 도저히 몽둥이 따위로는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라이가 깊은 절망감에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사내가 칼을 앞으로 쭉 내밀며 소리쳤다.
“대체 몬스터냐? 아니면 사람이냐?”
몬스터냐고 묻는 것을 보면 자신을 붙잡으러 온 추적자는 아닌 것 같았다. 하기야 사내의 모습은 지금까지 흔히 보아 왔던 용병의 그것이 아니었다. 용병들은 화려함보다는 실리를 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무장이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최대한 꺼렸다. 미세한 차이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이유 때문에 용병들은 갑옷을 입고 그 위에 원피스 형태인 헐렁한 로브로 몸을 감싼다. 자신이 어떤 갑옷을 입고 있는지, 또 그 갑옷의 틈새는 어딘지를 철저히 숨기기 위해서다. 하지만 눈앞의 사내는 로브로 갑옷을 숨기기는커녕 망토만을 어깨에 두르고 있을 뿐이다. 그 때문에 사내가 지금 입고 있는 갑옷이 어떤 건지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이때, 사내의 갑옷은 물론이고 칼에까지 아직 말라붙지도 않은 피가 흠뻑 묻어 있는 게 라이의 눈에 띄었다. 어쩌면 이 사내는 자신을 잡으러 온 게 아니라, 오크와 싸우다가 우연히 이쪽으로 온 것인지도 모른다.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느껴지자 라이는 급히 대답했다.
“저, 저는 사람입니다. 몬스터 따위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라구요.”
“정말이냐?”
순간 사내의 칼이 조금 아래로 내려가긴 했지만, 그의 눈빛에서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저놈이 왜 나를 저런 눈빛으로 보는 거지?’ 의아해 하던 라이의 눈에 띈 것은 오크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어 있는 자신의 손이었다.
라이는 급히 소매로 입부터 닦았다. 사내가 왜 자신을 보고 몬스터 운운했는지 그 이유를 깨달은 것이다.
라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변명했다.
“지금 제 꼴이 어떤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도 산속을 헤매면서 4일씩이나 굶어 보십쇼. 이런 거라도 안 뜯어먹고 배길 수 있는지.”
그 말에 사내의 칼이 조금 더 밑으로 내려갔다.
“길을 잃었나? 하지만 여기는…….”
“저는…, 상인입니다. 이 지역 마을들을 돌며 물건을 팔면 꽤 짭짤하게 수익을 남길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들어왔다가 산적을 만나 깨끗하게 털렸죠. 기회를 봐서 탈출하긴 했습니다만, 산속에서 길을 잃어서…….”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변방을 돌며 보따리 장사를 하는 게 이익이 큰 것은 사실이었다. 위험도가 큰 만큼 경쟁자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변명이 먹혀 들어간 모양이다. 하기야 지금 라이가 하고 있는 꼴을 본다면 누군들 그 얘기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내는 칼을 거두더니, 품속을 뒤져 육포 몇 조각을 꺼내 던져 줬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해해서 미안하네. 아무리 배가 고프다고 해도 그렇지, 오크를 뜯어먹고 있다니. 지금 가진 게 이것밖에 없는데……. 대충 이걸로 허기라도 때우도록 하게.”
“가, 감사합니다.”
허겁지겁 육포를 씹고 있는 라이를 보며 사내는 그제서야 라이를 완전히 믿은 모양이다.
“나는 젠슨이라고 하네. 젠슨 미티어.”
“저, 저는 라이라고 합니다.”
대답을 하다가 목이 메었는지 가슴을 퉁퉁 치고 있는 라이를 보자 젠슨은 급히 물통을 꺼내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물통을 건네주며 걱정스럽다는 듯 말했다.
“천천히 먹게. 그러다 체하겠네.”
젠슨이 옆으로 다가오자 갑자기 지독한 악취가 느껴졌다.
‘흐윽!! 이, 이게 무슨…….’
젠슨이 가까워 옴과 동시에 냄새가 느껴진 것을 보면, 젠슨의 몸에서 나는 악취인 모양이다. 하지만 라이는 인상을 찡그리지 못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구세주와도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라이는 몰랐다. 자신의 몸에서도 그와 유사한 악취가 진동하고 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