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이 건네준 육포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운 후에도 양이 차지 않았던 라이는 물통 속의 물까지 탈탈 털어 마신 후에야 만족스런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휴우~, 이제야 좀 살 거 같네요.”
이때, 젠슨이 나왔던 수풀 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젠슨의 동료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이리라. 오크가 말 타고 다닌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도 없으니까.
잠시 후, 수풀을 헤치며 세 사람이 말을 타고 나타났다.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는 사내는 젠슨보다 기골이 더욱 장대했다. 그 역시도 로브가 아닌 망토를 걸쳐 화려한 갑주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뒤를 따르는 두 사람은 덩치가 왜소했을 뿐만 아니라, 망토가 아닌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로브로 몸을 가리고 있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왜소한 체구로 보아 소년들인 것 같았다. 그것을 보고 라이는 젠슨과 저 사내가 기사(Knight)일 거라고 추측했다.
기사들의 경우 시중을 들어줄 종자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필수였다. 용병들과 달리 기사들은 젠슨처럼 엄청난 중장갑을 몸에 두른다. 때문에 개개인의 전투력이야 막강할지 몰라도, 종자의 도움 없이는 말에 오르기도 힘들었다. 몸에 걸친 갑주의 무게가 40Kg을 상회하기 때문이다.
기사들의 뒤를 따라다니며 시중을 들어 준다고 해서 종자들의 신분이 노예나 하인은 아니다. 그들은 엄연히 미래의 기사를 꿈꾸는 꿈나무들이다. 종자를 노예처럼 부려 먹다가 헌신짝처럼 소모해 버리는 쓰레기들도 간혹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기사들은 종자의 교육에 힘썼다. 싸울 때는 자신의 뒤를 지켜 주는 든든한 동반자가 되기 때문이다.
사내의 바로 뒤를 쫓고 있는 종자는 꽤나 수련을 많이 한 모양인지, 고삐를 쥐지도 않고 말을 몰고 있었다. 그는 두 손으로 활시위에 화살을 건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언제든지 화살을 날릴 수 있도록…….
가장 뒤에서 말을 몰고 따라오는 왜소한 덩치의 종자의 손에는 주인 없는 말의 고삐가 쥐어져 있었다. 아마도 젠슨의 말인 듯싶었다.
사내가 타고 있는 말은 물론이고, 그의 갑옷 여기저기에까지 붉은 피가 묻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근처에 살고 있던 오크의 숫자가 한둘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만약 저들이 없었다면 자신이 어떻게 되었을지 그제서야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 오크 소굴 근처에서 오크를 때려잡아 뜯어먹고 있었다니. 죽으려고 환장을 한 게 아니고서야 할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라이의 근처까지 다가온 사내는 말을 세우며 젠슨에게 질문을 던졌다. 투구 사이로 흘러나온 그의 목소리는 아주 굵으면서도 부드러운 저음이었다.
“젠슨, 그 사람은 누군가?”
젠슨은 사내에게 라이에게 들은 그대로를 전했다. 장사를 하러 이곳으로 왔다가 산적을 만나 몽땅 다 털리고, 4일씩이나 굶은 사람이라고 말이다.
라이를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는지, 사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서 내린 뒤 투구를 벗어 말안장에 걸었다. 그러자 라이의 시야에 들어오는 사내의 얼굴. 처음에 예상했던 대로 강인하면서도 노련해 보이는 인상의 사내였다. 나이는 40대 후반쯤 되었으리라. 길게 기른 머리카락과 덥수룩하게 자라 있는 수염까지도 은색이다.
“아주 운이 좋은 친구로군. 저런 조잡한 창으로 오크를 죽인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얼핏 보면 오크의 복부에 나 있는 상처가 꽤 깊은 것처럼 보였다. 라이가 오크의 팔을 뜯어먹을 때 흘러나온 피가 그 주위를 온통 피범벅으로 만들어 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내가 상처를 제대로 살펴봤다면 자신의 판단이 틀렸음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상처가 그다지 깊지 않았으니까. 그 정도의 어설픈 상처로는 오크를 절대로 죽일 수가 없었다.
사내는 라이를 향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딘지 모르게 아랫사람을 많이 부려 본 듯한 관록이 배어 있는 말투였다.
“나는 노아 리치몬드라고 한다네. 어디 다친 데는 없는가?”
라이는 오크에게 몽둥이찜질을 당한 곳을 얼른 손바닥으로 누르며 대답했다.
“여기가 좀…….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지만, 아주 아픕니다.”
“흠, 조잡한 창만으로 오크를 잡았는데, 그 정도 상처밖에 입지 않았다면 자비의 여신께서 특별히 은총을 베풀어 주셨다고 봐야겠지.”
리치몬드는 곧이어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소피아 수녀님, 이 사람의 상처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가장 뒤에서 젠슨의 것으로 보이는 말을 끌고 따라왔던 왜소한 덩치의 사내. 라이는 그가 이 파티에서 가장 나이 어린 종자라고 예상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놀랍게도 사내가 아닌 여사제였다. 겨우 4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파티에 사제가, 그것도 희귀한 여사제가 끼어 있을 줄이야.
라이는 멍한 눈빛으로 소피아 수녀를 바라보며 자신이 아주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이런 오지산골에서 사람을 만난 것만 해도 굉장한 행운인데, 거기에 여사제까지 끼어 있다니.
소피아 수녀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한 발 한 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깊숙이 눌러쓴 후드의 그림자 속에 숨겨져 있던 그녀의 얼굴을 훔쳐볼 수 있었다. 너무나도 아름다워 도저히 사람이라고는 생각조차 하기 힘든 미모였다. 라이는 여사제의 얼굴을 감히 쳐다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의 얼굴은 어느새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쑥맥 같은 라이의 반응에 소피아 수녀는 살포시 미소 지었다. 겉보기와 달리 그녀의 나이가 꽤 많은 것도 있었지만, 순진한 라이의 표정에 꼭 어린 동생을 보는 듯했기 때문이다.
‘참, 귀여운 아이네…….’
“아픈 데가 어디야? 말 놔도 괜찮지?”
“물론이죠, 수녀님. 이…, 이쪽입니다.”
“여기?”
“예? 예, 수녀님.”
곧이어 일반인들은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신성마법의 주문은 마법사들의 주문과 달리, 마치 노래와도 같아서 귀를 즐겁게 해 줬다. 더군다나 부드러운 손짓까지……. 마법의 사용을 위한 주문이 아니라 신께 대한 찬송과 경배를 보는 듯 아름답기까지 했다.
이윽고 그녀의 손에서 희뿌연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하자 그녀는 재빨리 두 손을 라이의 상처 위에 올려놨다. 이런 광경은 몇 번 봤었음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통증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희뿌연 빛이 사라지며 치료가 끝나자, 라이는 소피아 수녀에게 감사를 표했다.
“이제 다 나은 거 같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수녀님.”
“뭘, 이 정도 가지고 감사는. 내상(內傷)이라서 제대로 치료가 되었는지 확신할 수 없거든. 그러니 혹시라도 상처 부위가 계속 아프면 나한테 곧바로 말해. 다시 한 번 치료를 해 줄 테니까.”
“예,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라이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일행은 이 근처 가까운 마을까지 그를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오크와 같은 몬스터들이 득시글거리는 숲 속에 무기도 없이 맨손인 상인을 그냥 내버려 둔다는 건 곧 죽으라는 말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몇 번이고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는 라이에게, 일행의 리더인 리치몬드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우리에게 신세를 졌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네, 젊은이. 평소 이렇게 선행을 베풀어 둬야, 자비의 여신께서 우리가 위험해 처했을 때도 도움을 주실 게 아니겠나.”
일행은 말을 타고 이동하지는 않았다.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을 정도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무거운 갑옷을 입은 사람이 계속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것은 말에 커다란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방패뿐만 아니라, 투구와 조끼처럼 생긴 외장 갑옷도 벗어서 말에 실었다. 그런 다음 말고삐를 잡고 걸었다.
일행 중 리치몬드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났지만, 뭔가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있어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라이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닉’이라는 소년이 있긴 했지만, 숫기가 없는지 라이와의 대화를 별로 달가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라이는 젠슨 옆에 서서 걸어가며 그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젠슨을 통해 이 파티의 구성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그의 예상과 달리 이 파티에 종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네 명으로 이뤄진 모험가 파티였다. 젠슨의 말에 의하면 모두들 쓸 만한 실력의 소유자들이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