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수꾼은 아닌 것 같고
라이가 모험가 일행과 만난 다음 날 오후쯤이었다. 드디어 멀리 작은 마을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리치몬드는 멀리 보이는 마을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라이에게 말했다.
“저 마을이 틴스부르라네. 이 근방에서는 제일 큰 마을이지.”
리치몬드의 말과 달리 그다지 큰 마을은 아니었지만, 몬스터에 대한 경계 태새는 완벽했다. 마을 전체를 높직한 울타리로 감싸 놓은 것만으로도 부족해, 울타리 밖에 해자(垓字)까지 파 놨다. 거리가 멀어 해자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저 정도만 해도 마을 단위의 방어선이라고 하기에는 좀 과한 면이 있었다. 아마 어지간한 몬스터는 쳐들어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리라.
마을이 점점 가까워지자 해자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 서 있는 경비병들이 보였다. 사냥꾼이라고 착각할 만큼 투박한 가죽갑옷, 창처럼 굵고 커다란 화살들, 그리고 손에 들고 있는 커다란 활. 그것도 모자라 경비병들의 허리춤에는 도끼가 매여 있었다.
“헉!”
경비병들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며 걷던 라이는 갑자기 숨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은 도렌 영지의 병사들임에 틀림없었다. 얼마 전까지 적으로서 전투를 벌였던…….
라이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자, 리치몬드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혹시 산적들에게 신분증까지 털린 건가?”
그제서야 신분증에 생각이 미친 라이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이 상태로는 마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 빌어먹을 산적 놈들에게 먼지 한 톨 남김없이 탈탈 털렸기에…….”
“흐음, 이거 아주 곤란하게 됐군. 요즘 도렌은 메르헨과 영지전 중이기 때문에 신분증 검사를 철저하게 할 텐데…….”
이때, 옆에 있던 젠슨이 끼어들었다.
“리치몬드 씨. 경비병에게 사정을 말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힐 거 같으니, 차라리 올리버의 신분증을 라이에게 빌려 주면 어떨까요?”
“아, 그렇지. 그거 좋은 생각이군.”
리치몬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돌려 뒤쪽에 서 있던 닉을 바라봤다.
“닉, 올리버의 신분증 네가 가지고 있지?”
“그, 그건 왜……?”
“그걸 이 친구에게 건네줘. 내키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당분간만 빌려 주는 거니까 네가 이해하도록 해.”
닉은 알겠다는 듯 곧바로 품속을 뒤져 신분증 하나를 꺼내 라이에게 건네줬다.
“여기 있어.”
라이가 신분증을 받아 들자, 젠슨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쯧, 그 신분증은 얼마 전에 죽은 우리 동료의 유품이지. 닉의 불알친구이기도 하고. 꽤나 붙임성이 좋은 녀석이었는데, 재수가 없었어. 어쨌든 새 신분증을 만들 때까지는 자네가 그걸 쓰도록 하게.”
“하지만 이게 통하겠어요? 올리버라는 동료 분과 제가 닮은 것도 아닐 텐데…….”
신분증에는 그 대상의 신체적 특징이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젠슨은 걱정 말라는 듯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핫핫, 너무 걱정하지 마. 운 좋게도 올리버와 자네는 생긴 게 비슷하니까 말이야.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 그리고 나이. 이 세 가지만 대충 비슷하면 나머지는 얼렁뚱땅 넘어갈 수 있거든. 그렇게 자세히 보지도 않겠지만, 봐 봐야 저들이 뭘 알겠어? 뭐, 여행 도중에 병에 걸렸다거나, 아니면 몬스터와 싸우다 부상을 당해 몸이 많이 축났다고 둘러대면 통과시켜 줄 거야.”
“아…, 그건 그러네요.”
라이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떨리는 손으로 신분증을 두 손으로 꼬옥 움켜쥐었다.
꼬일 대로 꼬인 인생이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며칠 동안 산속에서 개고생을 하며 헤매고 난 뒤, 꼬인 실타래가 서서히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런 인심 좋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 수 있었겠는가.
“여러모로 신경을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핫핫,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렇게 고맙다면 나중에 혹시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자네가 거하게 한잔 사. 그럼 되지 않겠어?”
리치몬드는 젠슨의 너스레에 피식 웃으며 일행을 재촉했다.
“자, 여기서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일단 마을로 들어가세. 시원한 맥주부터 한잔하고 싶으니 말이야.”
마을 정문을 무사히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모험가 일행은 식당부터 찾았다.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식당으로 가려면, 어느 쪽으로 가야 합니까?”
이런 산골 오지 마을에 있는 식당들은 거의 대부분 숙박업을 함께 한다. 마을 주민들이 매 끼니를 식당에 와서 해결할 리는 없고, 결국 뜨내기 여행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하다 보니 그런 것이다.
가장 큰 식당이라고 알려 준 곳을 찾아갔음에도, 식당의 규모는 작고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마을에 식당이라고는 이거 하나뿐이었으니까.
“신선한 고기 있습니까?”
“신선한 거라곤 닭밖에 없수다.”
마치 먹기 싫으면 나가라는 듯 퉁명스런 어투의 주인장이었다. 이곳을 나가 봐야 달리 식사를 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 배짱 장사를 할 수밖에.
“그럼 구운 닭 5마리에…….”
“쩝, 지금 닭이 3마리밖에 없는데…….”
“그럼 3마리 전부 구워 주시고, 나머지는…….”
잠시 메뉴를 고민하던 리치몬드는 곧 귀찮다는 듯 대충 주문했다.
“나머지는 주인장이 알아서 가져다 주시죠. 맛있는 걸로 말입니다.”
“그럽시다. 잠시만 기다리슈.”
얼마 지나지 않아 주인은 스튜 한 사발과 빵을 양손 가득 들고 왔다.
“우선은 이걸로 허기를 채우슈. 나머지는 준비되는 대로 가져다 드릴 테니까.”
리치몬드는 사발에서 스튜를 가득 떠 그릇에 담은 뒤 라이에게 건네줬다.
“배가 많이 고프겠지만, 우선 이거라도 먼저 먹게.”
라이는 군침을 꼴깍 삼키며 그릇을 받아 들었다. 따뜻한 스튜의 향기에 배가 뒤집어지는 것만 같았다. 라이는 감사하다는 말을 함과 동시에 그릇에 얼굴을 처박았다.
쩝쩝, 후르륵.
뭘 넣고 끓였는지조차 알기 힘들 정도로 건더기가 뭉개져 버린 스튜였지만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음식이라 그런지 너무나도 맛이 있었다. 게다가 만든 지 며칠은 족히 지나 보이는 딱딱한 빵조차도 입 안에 넣자마자 사르르 녹아 버리는 것만 같았다.
탁자 위에 놓인 음식이 몽땅 다 사라지고 나서야 라이는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릴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그의 눈길이 가장 먼저 훑은 것은 소피아 수녀였다. 식탁에 앉으면서 언제나 머리 깊숙이 눌러쓰고 있던 후드를 벗어 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눈길이 소피아 수녀에게 머문 것은 거의 순간이나 다름없는 짧은 시간이었다. 행여 소피아 수녀가 자신의 눈길을 눈치챌까 재빨리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렸기 때문이다.
라이가 두 번째로 바라본 대상은 닉이라는 소년이었다. 평소 닉은 소피아 수녀처럼 후드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기에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닉이 후드를 벗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러고 보니 닉의 머리카락 색깔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물론 닉의 머리 색깔이 자신보다 약간 옅었지만, 얼핏 보면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비슷했다.
‘그러고 보니 눈동자 색깔도 비슷하네…….’
하지만 머리카락 색깔이나 눈동자 색깔이 비슷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분증의 원주인인 올리버라는 소년의 인상착의도 그와 비슷하다는데 말이다.
별로 친하게 지내지도 않는 닉에 대한 관찰은 그쯤에서 끝내고, 라이의 눈길은 다시 한 번 소피아 수녀를 훔쳐본 후 재빨리 젠슨에게로 이동했다.
“빵하고 스튜일 뿐인데 정말 맛있네요. 주인장 솜씨가 보통이 아닌가 봐요.”
라이의 말에 젠슨은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게 아니라, 네 배가 그만큼 고팠던 거겠지.”
스튜와 빵을 시작으로 음식들이 계속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이 정체를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닭구이뿐이었다. 나머지는 뭘 넣고 만들었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허접스런 음식들뿐이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이곳은 오지에 위치한 산골 마을이었으니까. 그나마 소금에 절인 두툼한 돼지고기 조각이 군데군데 보이는 걸 보면, 주인장이 나름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음식의 이름이 뭐가 되었건, 그들은 나오는 족족 뱃속에 밀어넣었다. 시원한 맥주와 함께……. 여기까지 오면서 씹어 먹고 있던 건조 식량에 비한다면 이건 진수성찬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배가 불러오자 그제서야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생각이 미친 라이는 리더인 리치몬드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자신을 동료로 받아 줄 수 없겠느냐고. 하지만 리치몬드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곧바로 거절했다.
“미안하네만, 자네가 우리 파티와 함께하기는 힘들 것 같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젠슨도 리치몬드의 의견을 거들었다.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마. 우리처럼 적은 인원으로 구성된 파티는 한 사람이라도 제구실을 못하면 순식간에 전멸당할 수도 있기에 하는 말이니까. 말이 좋아 모험이지, 정말 위험한 일이야. 어떨 때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땡전 한 푼 못 건지기도 하니까.”
두 사람이 자신의 합류를 거부하자 라이는 몸이 달아올랐다. 현재 속옷만 한 벌 달랑 입고 있는 처지에, 이대로 이들과 헤어지게 되면 앞으로 뭘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게다가 언제 용병단에서 추적자가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랬기에 라이로서는 최소한 위험지역을 벗어날 때까지만이라도 이들 곁에 붙어 있고 싶었다. 라이는 짐짓 볼멘 목소리로 항변했다.
“제가 상인이긴 하지만 검이라면 제법 쓸 줄 압니다. 몬스터 몇 마리쯤 해치울 실력도 없다면, 어떻게 이런 산골짜기까지 물건을 지고 올 생각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산적들한테 기습을 당한 탓에 지금 이런 몰골이긴 합니다만, 저 그렇게 동료의 발목을 잡을 만큼 물러 터진 놈은 아닙니다.”
라이의 말에 리치몬드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옆에 앉아있는 젠슨과 귓속말로 뭔가 대화를 나눴다. 이윽고 결정을 내렸는지 리치몬드는 라이를 향해 침중한 어조로 말했다.
“지금 우리가 가고자 하는 길은 아주 험난하다네.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지. 그래도 우리와 함께 가고 싶은가?”
“도대체 어디로 가시는데 그러십니까?”
리치몬드는 주위를 슬쩍 둘러본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산맥을 관통하여 국경을 넘을 걸세.”
그 말에 라이는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국경을 넘는 방법이야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굳이 이 오지 중의 오지인 도렌 영지까지 와서 사람들이 다니지도 않는 길로 산맥을 넘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견문이 짧은 라이가 도렌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도렌 영지 쪽에서는 산맥을 넘어가는 통로가 없다는 것을. 만약 있었다면 도렌 영지가 이토록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산맥을 넘어 오고 가는 물자들에 대해 약간의 통과세… 아니, 세금 따위를 붙일 필요조차 없다. 교역을 하기 위해 영지를 통과하는 상인들이 뿌리는 돈만으로도 영지 전체가 흥청거릴 테니까.
‘흠, 평범한 모험자 파티가 아닌가 보네. 그럼 이들의 정체가 뭘까? 짐이 거의 없는 걸로 보아, 밀수꾼들은 아닌 것 같고…….’
라이가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민을 하는 듯하자, 리치몬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왜 쉬운 길을 놔두고, 굳이 험한 산맥을 넘어 국경을 통과하려는지 이해를 못하겠지?”
“예.”
“하지만 우리와 아무런 연관도 없는 자네에게 그런 속사정까지 얘기해 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네. 자네는 그저 우리와 함께 갈 것인지, 아니면 자네 살길을 찾아 떠날 것인지만 결정하게.”
약간 찜찜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국경을 넘는다는 말은 라이에게 거부하기 힘든 유혹이었다. 현재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는 노예의 굴레를 벗어던질 수가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받아만 주신다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라이의 대답에 리치몬드의 눈빛이 순간 음침하게 변했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따라나서겠다는 라이가 오히려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리치몬드는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았다.
“함께하겠다니 동료로서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알려 줌세.”
리치몬드는 다시 한 번 조심스럽게 주위를 더 훑어봤다. 그래 봐야 식당 안에 손님이라고는 그들 일행밖에 없었지만.
“이름을 듣기만 해도 알 만한 그런 대마법사의 던전이, 저 산맥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네. 우리는 그 지도를 입수했지.”
그 말만으로도 라이의 의심은 씻은 듯 사라져 버렸다. 운이 좋으면 돈벼락을 맞을 수도 있는 것이 바로 던전 발굴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굳이 험난한 산맥을 넘으려 하는 것에 대한 이유가 되고도 남았다. 이들은 정말 모험가 파티였던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소수로 움직이는 걸 보면 꽤나 능력이 있는 파티일지도 모른다.
라이의 눈에 어린 의혹의 빛이 사라자자 리치몬드는 씨익 미소 지었다.
“어쨌거나 동료가 되었으니, 앞으로 발굴하게 될 보물의 지분(持分)에 대해서 미리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겠군.”
지분을 나눠 준다는 말에 라이의 이성이 더욱 뒤흔들렸다.
“무, 물론이죠.”
“지금껏 숫한 난관을 뚫으며 여기까지 온 우리들과 자네의 지분이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나?”
그건 맞는 말이었다. 그랬기에 라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던전의 보물을 발굴하게 되면, 자네에게 그중 3%를 주겠네. 그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하는데,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나?”
라이는 마치 꿈을 꾸는 것만 같았다.
모험가! 이 얼마나 가슴이 설레는 단어인가. 어디에 얽매이는 곳 없이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며 모험을 즐긴다. 라이가 어렸을 적부터 수도 없이 상상의 나래를 펴며 동경해 왔던 직업이었다. 라이는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승낙했다.
“자네의 지금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걸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