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사를 끝낸 후, 리치몬드는 은화 몇 닢을 라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쉬고 있을 테니, 자네는 잡화점에 가서 필요한 물건들을 사도록 하게.”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너무 고마워할 필요는 없다네. 아무 장비도 갖추지 못한 현재로서는, 자네가 도움이 전혀 되지 않으니 말이야. 대신 어설프게 행동해서 우리의 발목을 잡거나 하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걸세.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리치몬드는 소피아 수녀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혹시 필요하신 물품이 있으시다면 지금 구입하십시오. 산맥 안으로 들어가게 되면 마을이 더 이상 없으니까요. 라이에게 부탁하시든지, 아니면 함께 다녀오셔도 됩니다.”
“아뇨,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방으로 올라가서 편히 쉬십시오. 저희들은 한잔 더 한 다음에 올라가겠습니다. 이곳에 방이 3개 있다고 하더군요. 2층 가장 오른쪽에 있는 방이 제일 작다고 하니, 그곳을 소피아 수녀님께서 혼자 쓰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저 먼저 올라가 쉬도록 하죠.”
소피아 수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2층 계단 쪽으로 향할 때였다. 잊고 있던 것이 생각난 듯 리치몬드가 소피아 수녀를 향해 급히 말을 건넸다.
“아 참, 이곳에서 말을 모두 처분할 겁니다. 말을 끌고 산맥을 넘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니까요. 혹시 안장에 놔둔 물품이 있다면 미리 챙겨 두십시오.”
리치몬드의 말에 소피아 수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인 뒤, 2층으로 올라가는 대신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고 나갔다. 아마도 마구간 쪽으로 가는 것이리라.
“그럼 저는 잡화점에 다녀오겠습니다.”
“외딴 마을이라 쓸 만한 게 별로 없겠지만 잘 찾아보게. 의외로 괜찮은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
“예.”
라이가 밖으로 나왔을 때, 수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여관 주인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여관 주인은 신이 나 있었다. 오랜만에 손님이 들어온 데다, 저렇게 엄청나게 먹어 대고 있으니……. 그는 살아 있는 닭 여섯 마리가 들어 있는 상자를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아마 내일 아침 식사용으로 쓰려고 구해 온 것인 모양이다.
라이는 여관 주인을 향해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잡화점이 어디에 있는지 좀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작은 동네라 잡화점도 하나뿐이었다. 주인에게 설명을 듣고 돌아섰을 때, 그곳에 소피아 수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라이는 그녀가 마굿간에 간 게 미처 챙기지 못한 짐 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도 말과 작별 인사를 나눴던 것이리라.
라이는 못 본 척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녀 쪽에서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잡화점에 갈 거지?”
“예, 수녀님.”
“나도 같이 가. 살 것도 있고 하니…….”
아마도 기분 전환 겸 자신을 따라나서려는 것이라고 라이는 생각했다.
“예. 마침 위치를 알아 뒀으니 함께 가시죠. 저쪽입니다.”
소피아 수녀와 단둘이서만 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둘이서 오붓하게 걷는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라이의 가슴은 두근거리고 있었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걷고 있는 게 조금 어색했던 것일까. 수녀 쪽에서 먼저 입을 열었다.
“워낙 작은 마을이라 쓸 만한 물건이 없을지도 몰라. 다리를 건너오면서 경비병들이 입고 있는 갑옷 봤지?”
“예.”
“잡화점에서 판매하는 갑옷도 그 정도 수준 정도밖에 없을 거야. 그래도 괜찮겠어?”
용병단에 처음 들어가서 지급받았던 갑옷은 정말 형편없는 것들이었다. 겉모양은 용병단의 갑옷이 좀 더 나았을지 모르지만, 방어력은 오히려 이곳 경비병들이 입고 있는 게 훨씬 더 좋아 보였다. 게다가 라이는 보여지는 겉모습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실속파였다. 그렇기에 그는 태연하게 대꾸했다.
“그것밖에 없다면 어쩔 수 없잖아요.”
“무기는 어떤 걸 잘 다뤄? 검? 활?”
소피아 수녀는 이런저런 사소한 질문들을 계속 던졌다. 어쩌면 정말 궁금해서 묻는다기보다는, 둘이서 길을 가다 보니 대화가 끊기면 분위기가 어색해질까 두려워 그러는 것이리라.
“둘 다요.”
“무술은 누구한테 배웠어?”
라이는 은퇴한 용병이었던 아버지에게 배웠다고 대충 둘러댔다. 라이는 감히 소피아 수녀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대답을 했기에 그녀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대화가 길어질수록 수녀의 표정이 점차 심각하게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상인이라면서 왜 굳이 모험가 파티에 참여하려는 거지?”
“모험을 해 보고 싶었거든요. 모험가가 되는 것은 제 오랜 꿈이었습니다, 수녀님.”
라이의 대답에 소피아 수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망설였다.
‘이런 말을 해 줘도 괜찮을까? 꽤나 순진해 보이는 소년인데, 혹시 상처를 받을지도 모르는데…….’
지금껏 살아오며 다른 사람에게 모진 말을 단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던 그녀다. 하지만 이번에는 말을 안 해 주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양심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애써 용기를 냈다.
“이런 말을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지만…, 오해하지 말고 들어. 그건 좋은 선택이 아닐지도 몰라.”
“예? 대체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 우리 파티가 수행하고 있는 모험의 난이도가 너무 높기 때문에 하는 말이야.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위험이 너무 크거든.”
그제야 소피아 수녀가 뭘 염려하고 있는지를 눈치챈 라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제가 모험을 해 본 적이 없긴 하지만, 다른 분들께 폐를 끼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자신 있게 말하자, 소피아 수녀는 더 이상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잡화점에 도착할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아무런 대화도 오고 가지 않았다.
“아, 저기인 거 같네요. 저 허름한 가게 말입니다.”
오지의 가난한 마을이었기에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잡화점에서 팔고 있는 물품들은 라이의 예상보다 훨씬 더 초라하고 빈약하기만 했다.
몇 벌 있지도 않은 갑옷은 도렌 영지의 병사들이 착용하던 바로 그 투박하기 짝이 없는 가죽갑옷이었다. 그리고 장검은 아예 팔지도 않았고, 활과 화살은 몬스터 사냥용의 초대형뿐이었다.
라이는 한숨을 푹 내쉬면서도 심란한 눈빛으로 가게 안을 열심히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모험을 하다 죽기 싫으면 어떻게든 장비를 맞춰야 했으니까.
다음 날 새벽, 아직 해가 뜨지도 않아 사위가 어둠에 잠겨 있을 때 그들은 일어나 출발 준비를 서둘렀다. 미리 여관 주인에게 말을 해 뒀었기에 그들이 일어나는 시간에 맞춰 따끈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고, 갓 구운 빵이 가득 들어 있는 자루도 준비되어 있었다. 저 정도면 며칠 정도는 배불리 먹기에 충분하리라.
험난한 산맥을 이동해야 하는 만큼, 일행의 말들은 모두 팔아 버리고 당나귀 네 마리를 사서 짐을 나누어 실었다. 어쨌거나 이런 산골 마을에서 말들을 다 팔아 치워 버린 것만 봐도 리치몬드가 얼마나 수완이 좋은 리더인지 라이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산간벽지에서 그런 훌륭한 준마를 제값 받고 팔기는 힘들었을 텐데…….’
라이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모두의 속이 쓰릴 것을 뻔히 알면서 그들의 상처를 헤집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로서도 어쩔 수 없었으리라. 험한 산길을 뚫고 이동하는 데 있어서 덩치 큰 말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뻔했으니까.
산맥을 향해 출발한 지 4일째 되는 날 오후, 라이는 어렴풋이 풍겨 오는 오크의 냄새를 맡았다. 보통사람이라면 숲에서 풍겨 나오는 여러 가지 냄새들 탓에 알아채지 못하고 넘어갔겠지만, 오크 굴에서 신물 나게 살아 봤던 라이의 코가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예전에 용병단에 있었을 때와는 달리, 지금은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줘야 할 때였다.
“리치몬드 씨, 주변에 오크가 있는 거 같은데요.”
하지만 리치몬드는 라이의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여관 주인의 말 때문에 그러나? 이 주변에 오크들이 서식하는 건 사실이겠지만, 자네 걱정이 좀 지나친 것 같구먼. 걱정하지 말게. 우리는 아직 오크들의 영역에 들어서지도 않았으니 말일세.”
“너무 자신하시는 거 아닙니까? 오크들이 여기서부터 우리들의 영토라고 말뚝을 박아 놓은 것도 아니고 말이죠. 일단 대비는 좀 해 두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방어 장비의 무게가 워낙에 무겁다 보니 위험이 닥친 경우가 아니라면 외장 갑옷과 투구, 방패 따위는 나귀에 실어 놓는다. 방어 장비를 몽땅 다 걸치고 산길을 이동했다가는 얼마 가지도 못하고 쭉 뻗어 버릴 게 뻔했으니까.
오크의 존재 유무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중무장할 것을 권하는 라이. 리치몬드는 그런 라이를 향해 의심스런 눈길을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젠슨처럼 주변의 흔적을 주의 깊게 살펴본 것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가 있나? 저기를 보게.”
일행들보다 10여 미터쯤 앞서 가고 있던 젠슨은 간혹 허리를 굽혀 수풀이나 낙엽 더미를 뒤적이며 뭔가 흔적이 없나 살피고 있었다.
“저렇게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데도 젠슨은 오크에 대해서 지금까지 단 한 마디도 말을 꺼내지 않았네. 그런데도 자네는 뜬금없이 오크가 주위에 있다고 말하니, 내가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라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꾸했다.
“저는 제 감각을 믿을 뿐입니다. 특히 후각을요.”
라이는 자신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당나귀 등에 걸어 놨던 투구를 들어 머리에 썼다. 묵직하긴 했지만, 나름대로 안도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투구를 쓰지 않은 채 오크가 휘두르는 몽둥이에 머리를 직격당했다가는 머리통이 수박처럼 박살난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리고 등에 메고 있던 활도 손에 들었다.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도록.
그런 라이의 모습을 보며 리치몬드는 콧방귀를 뀌었다.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니 괜스레 시위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흥, 후각이라고? 자기 코가 개코라도 된다는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고 있어. 뭐, 까불어 봤자 얼마 견디지 못하고 투구를 벗겠지.’
생각은 그랬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선두에 가고 있는 젠슨을 향해 소리쳤다.
“젠슨! 혹시 이상한 흔적을 발견한 거라도 있나?”
“별로 없습니다. 오히려 흔적이 너무 없어서 문제죠. 이 정도까지 깊게 들어왔으면, 야생동물의 발자국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여야 정상인데…….”
“마을에서 벗어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은가. 차차 나오겠지.”
리치몬드는 수풀에 가린 하늘과 주위를 둘러봤다. 망토는 물론이고 외갑(外鉀)과 투구까지 벗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등은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사슬갑옷처럼 벗지 못하고 그냥 입고 있는 장갑(裝甲)의 무게만 해도 엄청난 탓이었다.
리치몬드는 이마의 땀을 닦으며 내심 투덜거렸다.
‘그나저나 덥긴 덥군. 몬스터도 없는데, 이런 산길을 완전무장을 한 채 걸어가자고? 그렇게 되면 체력적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게 되는 게 나와 젠슨인데……. 우리 둘을 지치게 만들어서 뭘 하겠다는 것이지? 생각할수록 놈의 저의가 의심스럽군.’
리치몬드나 젠슨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이미 세 시간 전부터 케른췩 이 거느린 오크 부대의 추적을 받고 있는 중이었다. 이곳 오크들은 잘 훈련된 도렌 영주의 병사들과 숱한 충돌을 겪으며 살아왔다.
호비트들이 연약한 생김새와는 달리 결코 만만한 적수가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경험으로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귀 네 마리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유혹이었다.
“족장한테 전령 보내자.”
“췩췩, 안 보내도 된다. 우리 많다!”
지금 케른췩이 거느리고 있는 부하는 무려 28마리. 호비트 다섯 마리쯤 상대하는 데는 넘칠 정도의 숫자였다.
더군다나 저놈들 중에서 힘 좀 쓸 것처럼 생긴 놈은 겨우 두 마리뿐이었다. 번쩍이는 쇠장식을 몸에 주렁주렁 두르고 있는 게 조금 거슬리긴 했지만, 둘이서 발악을 해 봐야 얼마나 하겠는가 하는 게 케른췩의 생각이었다. 나머지 3마리는 덩치도 그리 크지 않은 것이 한주먹거리도 되어 보이지 않았고…….
호비트들이 꽤 만만하게 보인 것도 사실이었지만, 마을에 전령을 보내 지원을 요청하자는 부하의 의견을 케른췩이 묵살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자기보다 상급자가 지원군을 몰고 온다면 이번 사냥의 공로를 놈이 가져가게 되기 때문이다.
주변의 모든 사냥감들을 싹쓸이해 버린 탓에 먹을 걸 구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었다. 이럴 때 저만한 사냥감을 잡아가면 부족 내에서 그의 위치는 더욱 확고해지리라. 당나귀 네 마리에 호비트 다섯 마리. 케른췩은 입맛을 다시며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췩췩, 모두 준비해라. 쉬면 공격한다!”
“췩!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