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 코는 개코?
‘이상하네? 분명히 오크 냄새가 난 것 같았는데…….’
바람 방향이 갑자기 바뀌었을 때 얼핏 풍겨 온 것을 제외하면 더 이상 오크 냄새는 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라이도 혹시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여기서 쉬었다가 가자.”
리치몬드의 말에 모두들 편한 장소를 골라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더위 탓에 겉에 걸치고 있던 망토나 로브는 벗어 버린 지 오래. 그 덕분에 라이는 소피아 수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몰래 감상할 수 있었다.
‘쩝, 혼자 멍청한 짓 하지 말고 나도 투구를 벗자. 괜히 이러다가 리치몬드에게 미운털이라도 박히는 날에는 앞날이 고달파지게 돼.’
라이는 투구를 쓰고 있는 탓에 이마 위로 줄줄 흘러내리는 땀도 닦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막 투구 끈을 풀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오크 냄새가 풍겨 왔다. 이번에는 아주 짙었다. 지금까지는 놈들이 바람의 방향을 헤아리며 조심스럽게 따라오고 있었기에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지만, 최후의 순간이 되어 포위망을 갖추자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러온 것이다.
라이는 급히 일어나 화살을 장전하며 외쳤다.
“오큽니다! 모두들 주의하세요.”
라이의 경고에 모두들 경악해서 황급히 주위를 살펴봤다. 하지만 리치몬드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라이를 향해 짜증 어린 질책부터 날렸다. 안 그래도 덥고 피곤한데, 새파란 신참이 자신의 충고에도 아랑곳 않고 깝죽대고 있으니 짜증이 울컥 치솟았던 것이다.
“또 그 소리로군. 내가 분명히 말했었지 않은가. 여기에는 오크가 없다고 말일세.”
리치몬드의 말에 모두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말이다. 긴장을 푼 그들은 저마다 배낭에서 먹을 것부터 꺼냈다. 강행군을 하느라 지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배가 고팠던 것이다.
“이보게, 라이.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새파란 신참 주제에 주제 파악도 못하고 나대고 있는 라이에게 경고를 할 작정이었다. 또다시 이런 식으로 동료들의 휴식을 방해하면 가만히 안 놔두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때, 리치몬드는 볼 수 있었다. 라이가 일어서 있는 저 뒤쪽의 수풀이 묘하게 들썩이고 있는 것을.
리치몬드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둘러봤다. 수풀이 들썩이고 있는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라이의 말대로 오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뭔가가 자신들을 포위한 채 육박해 들어오고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리치몬드는 경악해서 외쳤다.
“전원 전투 준비!”
그는 급히 나귀 등에 걸어 둔 방패부터 집어 들었다. 투구를 쓸 시간적 여유조차 없었다. 턱 끈을 묶지 않으면, 거칠게 움직일 때 투구가 이리저리 움직일 것은 뻔한 이치. 결정적인 순간에 시야를 가리게 되면 오히려 쓰지 않은 것만 못한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그것을 잘 알기에 그는 처음부터 투구를 집어 들 생각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검을 뽑아 들었을 무렵, 미지의 적은 리치몬드의 코앞에까지 육박해 들어와 있었다. 수풀을 헤치며 튀어나온 적은 라이의 말대로 오크였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휘둘러 오는 오크의 몽둥이를 방패로 막아 내자마자 그는 거의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붉은 피가 확 하고 뿜어져 나와 그의 갑옷은 물론이고 얼굴에까지 튀었다. 하지만 리치몬드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또 다른 오크를 향해 칼을 휘둘러야 했기에. 주변이 온통 오크 천지였다. 한 놈이라도 빨리 해치우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리치몬드나 젠슨은 그럭저럭 오크와의 접전을 시작하는 데 성공했지만 닉은 그렇지 못했다. 한창 먹는 데 열중하고 있었던 그는 미처 방어 자세를 취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몽둥이를 치켜든 채 순식간에 자신의 코앞까지 육박해 들어온 오크! 닉은 완전히 공황상태에 빠져 버렸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몽둥이가 자신의 머리통으로 떨어지는 것을 본 닉은 본능적으로 눈부터 질끈 감았다.
그 순간, 들려온 오크의 처절한 비명 소리!
“꾸웨우욱!!”
곧이어 자신의 발 앞에서 뭔가가 털썩 쓰러지는 육중한 소리가 들려왔다.
닉은 살짝 눈을 떠 봤다. 그는 볼 수 있었다. 방금 전에 자신을 향해 돌진해 오던 오크가 쓰러져 있는 것을. 그리고 오크의 등을 관통하고 삐죽이 솟아나와 있는 창을 볼 수 있었다. 아니, 창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굵고 긴 화살이었다.
급히 뒤를 돌아보니 얼마 전에 동료가 된 라이라는 녀석이 활을 쏘고 있는 게 보였다. 화살 한 발을 쏘고는, 또다시 화살을 활통에서 뽑으려고 할 때였다. 닉은 라이의 뒤통수를 향해 육박해 들어가고 있는 오크를 발견했다.
“라이! 뒤를 조심해!”
조심하라고 경고를 하긴 했지만, 그는 사실 라이가 이 위험한 상황을 벗어나기 힘들 거라 생각했다. 굵고 긴 화살은 연사에 부적합했다. 다음 화살을 장전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너무 부족했던 것이다.
하지만 라이는 죽지 않았다. 그는 화살을 활통에서 뽑는 대신, 허리에 차고 있던 도끼를 뽑아드는 것과 동시에 집어던졌던 것이다. 커다랗게 회전하며 날아간 그의 도끼는 놀랍게도 오크의 이마에 정확히 박혔다.
“꾸에에엑!”
정말이지 놀라운 실력!
라이는 닉을 향해 감사의 눈빛이라도 보내려고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닉을 향해 달려들고 있는 또 다른 오크를. 라이는 짜증이 벌컥 치솟았다.
‘저 새끼는 싸우지도 않고,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어느샌가 화살을 뽑아 든 라이는 닉을 공격하려고 하는 오크를 향해 쐈다. 그런 다음 활을 집어던지고 방금 전에 자신의 도끼에 맞아죽은 오크에게로 달려가 놈의 이마에 박혀 있는 도끼를 뽑아 들었다.
“이 새끼들! 다 죽었어!”
라이가 활쏘기를 포기한 것은 화살의 크기가 너무 커 한 발 한 발 쏘는 데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적과 뒤엉켜 싸울 때는 오히려 칼이나 도끼 같은 단병기가 훨씬 더 효과적이다.
한 마리, 두 마리……. 놀라운 속도로 오크를 해치워 나가는 라이. 라이의 활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닉에게 어느새 다가왔는지 젠슨이 옆에 와 있었다. 그의 장검은 물론이고, 방패까지 오크의 피로 붉게 얼룩져 있었다.
“이봐, 닉!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정신 차려.”
“아, 예.”
닉은 얼굴을 붉혔다. 실전 경험이 전혀 없는 초보도 아니면서 정신을 놓고 있었다니, 창피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재빨리 어깨에 메고 있던 활을 끌러 들었다. 화살을 화살통에서 뽑아 든 그는 화살을 시위에 걸어 당기는 순간 조준까지 함께 완료했다. 최대치까지 시위를 당김과 동시에 놔 버린 그는 눈으로는 새로운 목표를 찾으며 화살을 화살통에서 뽑아 들었다. 그리고 또다시 발사하는 닉. 라이의 장대한 화살에 비한다면 파괴력은 약할지 몰라도, 연사속도에 있어서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격전은 시작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미친 듯 공격하던 오크들이 어느 순간, 썰물 빠지듯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헐떡거리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은 라이는 급히 투구부터 벗어던졌다. 그의 얼굴 전체는 땀으로 목욕을 한 듯 흥건했다. 땀을 훔칠 새도 없이 수통부터 꺼내 입에 무는 라이.
어느새 라이 옆으로 다가온 리치몬드가 말을 건넸다.
“다친 데는 없는가?”
라이는 물 마시기에 바빠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대신 괜찮다는 듯 손바닥을 흔들어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라이를 보며 리치몬드는 정중한 어투로 말했다.
“자네의 경고를 무시한 것, 정말 미안하네.”
간신히 수통에서 입을 뗀 라이는 거친 숨소리를 뿜어내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도 오크가 있는지 정확히 확신하지는 못했었는데요, 뭘.”
“그러고 보니 자네 실력이 아주 출중하더군.”
이런 칭찬은 용병대 안에서는 들어 본 적이 없었기에 라이는 무척이나 쑥스러웠다. 그런 라이의 어깨를 토닥이며 리치몬드가 말했다.
“자네가 큰소리칠 만도 했어. 일전에 자네에게 3%의 배당을 주겠다고 했지만, 오늘 보니 내가 너무 적게 불렀더군. 자네 실력을 몰라봤기에 벌어진 착오였다네. 용서해 주게. 자네한테 10%를 주지. 그만한 실력이 되니까.”
리치몬드가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 줬을 뿐만 아니라, 배당까지 파격적으로 올려 준다고 하니 라이는 하늘이라도 날듯 기분이 좋았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리치몬드는 동료들을 둘러보며 큰 소리로 물었다.
“누구 다친 사람은 없나?”
파티원 한 명 한 명의 몸 상태를 훑어보며 확인한 후에야 리치몬드는 말을 이었다.
“오크 영역을 빠져나갈 때까지는 힘들더라도 완전무장한 상태로 움직이도록 하자. 자네들도 알다시피 이번에는 아주 운이 좋았어. 여기 이 친구가 경고를 해 준 것도 도움이 되었지만, 무엇보다도 오크 놈들이 우리들을 얕보고 얼마 안 되는 숫자로 덤빈 덕분이라고 봐야 하겠지. 만약 이번에 공격한 오크들의 숫자가 30마리 정도가 아닌, 100마리 이상이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나?”
리치몬드의 지적은 모두의 가슴을 서늘하게 했다.
“이번 같은 행운이 또다시 반복될 거라고는 기대하지 말자. 아마 오크의 다음번 공격은 전력을 다한 것이 될 거야. 모두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도록.”
리치몬드의 지시가 떨어진 후, 모두들 당나귀 등에 올려 뒀던 여분의 무장을 착용하느라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닉은 무장을 갖추는 것도 잊은 채 질투 어린 시선으로 라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나이도 비슷한 것 같은데 어떻게 저렇게 놀라운 실력을 가질 수가 있을까? 어렸을 때부터 기사가 되는 수업을 받아 왔던 자신도 한순간 공포에 질렸었는데…….
‘별 볼일 없는 용병의 자식인 주제에…….’
방금 전에 보인 자신의 추태를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지금까지는 라이를 천한 상인 나부랭이라고 생각하며 은근히 무시해 왔었다. 그런 그에게 실력에서 밀린 것은 둘째 치고,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릴 추태까지 보였으니……. 겉으로 말은 못했지만 속으로는 미칠 지경이었던 것이다.
젠슨은 완전무장을 갖춘 후 라이에게로 다가왔다. 라이의 투구가 눈구멍만 대충 뚫어 놓은 대량 생산형이라면, 젠슨이 사용하는 투구는 평상시에는 안면 부위의 방어판을 위쪽으로 들어 올려 보다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고급품이었다. 그렇기에 투구를 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는 그의 얼굴을 잘 볼 수 있었다.
젠슨은 든든한 우군이라도 만난 듯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덕분에 오늘 살았다.”
“뭘요. 운이 좋았던 것뿐입니다.”
“내가 앞서 가면서 아무리 살펴봐도 오크의 흔적은 찾지 못했었는데, 너는 어떻게 찾아낸 거지?”
“후각이죠. 오크에게서는 독특한 냄새가 나거든요.”
젠슨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냄새라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젠슨은 오크 사체로 다가가 코를 킁킁거렸다. 오크에게서 지독한 악취가 난다는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개가 아니고서야 여러 가지 냄새가 혼재되어 흐르는 숲 속에서, 오크의 냄새만을 꼭 집어 파악해 낼 수가 있는 것일까?
“제가 후각이 좀 예민한 편이거든요.”
“호오, 그거 정말 굉장한 후각이군. 어쨌거나 오늘 네 덕을 톡톡히 봤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