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6화 (792/930)

라이의 말에 수녀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녀도 아는 것이다. 그들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것을. 뜻밖에도 수녀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자 라이는 그녀를 힐끗 쳐다봤다. 일렁이는 횃불에 비친 그녀의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런 젠장! 누군 동료를 버리고 도망치는 게 좋아서 이러는 줄 아나?’

라이는 더 이상 말을 해 봐야 구차한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았다. 그래서 입을 꾹 다문 채 소피아 수녀의 팔을 잡은 손에 힘을 더욱 주며 달리기 시작했다.

“끼히이잉!”

이때, 내버려 두고 온 당나귀들이 내지르는 처절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 자신들을 향해 돌진해 오던 놀들이 당나귀들을 덮친 모양이다. 라이는 달리면서도 간절히 빌었다. 제발 놀들이 당나귀 고기를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자신들의 존재를 잊게 해달라고.

“끼익!”

“끽끽! 끼긱!”

뒤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괴상한 울음소리와 당나귀들의 처참한 비명. 라이와 소피아 수녀는 둘 다 공포에 질려 무작정 밖으로 내달렸을 뿐이다. 어떻게 동굴 밖까지 달려 나왔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밖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동굴 밖으로 나왔음에도 라이는 멈추지 않고 조금이라도 넓은 공터를 향해 달렸다. 움직임을 볼 수 있고, 대비할 약간의 여유만 가질 수가 있다면 놀 따위야 무서울 게 없었으니까.

“헉헉헉!”

한동안 숨을 고르며 동굴 입구를 살펴봤지만, 다행히도 놀은 한 마리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람 셋과 당나귀 네 마리로 만족한 모양이다.

“휴우~!”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는 라이. 하지만 그때까지도 소피아 수녀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있었다. 동료를 내팽개치고 자신들만 밖으로 도망쳤다는 게 너무나도 죄스러웠던 모양이다.

어느 정도 숨을 고른 후에 라이는 수녀의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여기 이렇게 계속 있을 수는 없어요. 해가 지기 전에 최대한 멀리 가야 합니다.”

“정말…, 그들을 구할 수 없었을까?”

애처롭게 묻는 수녀를 향해 라이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그건 수녀님께서 저보다 더 잘 아실 거 아닙니까. 후퇴를 결정한 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좀 전의 상황에서는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요.”

물론 이건 소피아 수녀에게 하는 말인 듯싶었지만, 자기 자신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동료를 버리고 도망쳤다는 죄책감에 시달려야 할 테니까. 하지만 정말 그 상황에서 동료들을 구출할 수 없었을까? 시도를 해 보지 않았으니, 그건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신성마법을 걸어 드렸어야 했어. 최소한 ‘속도 증가’만이라도 리치몬드 씨에게 걸어 드렸었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오지 않았을 텐데…….”

“이미 지나간 일을 이제 와서 후회하셔 봐야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지금은 최대한 빨리 안전하게 마을로 돌아갈 고민을 하는 게 옳습니다.”

최악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라이의 마음은 절망감이 아닌 묘한 기대감으로 잔뜩 들떠 있었다. 상황이야 어찌 되었든 지금 아름다운 수녀와 단둘이 있지 않은가.

물론 내딛는 걸음마다 몬스터가 튀어나오고 하루 종일 쫄쫄 굶게 된다고 해도, 그럼에도 낭만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라이의 나이는 열일곱, 한창 성에 눈을 뜰 나이였다. 때문에 아름다운 소피아 수녀와 함께 걸어간다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한껏 들떠 있었다.

“헉헉~, 좀 쉬었다가 가면 안 될까?”

“동굴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합니다.”

“나, 다리 아파……. 조금만 쉬었다가 가.”

밤이 되어 어두워지기 전에 동굴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다리가 아프다며 눈물을 흘리는 소피아 수녀가 너무 애잔해 보였다. 그랬기에 라이는 이래선 안 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럼 잠깐만 쉬었다 갈게요. 정말 잠깐만입니다. 해가 지기 전에 가급적 동굴에서 멀리 떨어져야만 하니까요.”

“그래, 알겠어.”

소피아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자리에 털퍼덕 주저앉아 품속에 지니고 있던 육포를 꺼내 우물거리기 시작했다. 짭짤한 육포를 먹었으니 목이 마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 물까지 벌컥벌컥 들이키는 것을 보던 라이는 애가 타서 급하게 말했다.

“지금 가지고 계신 식량과 물로 마을까지 가야만 해요. 아껴서 드세요.”

“알았어, 내 껀 내가 알아서 할게.”

대부분의 식량과 물은 당나귀 등에 실려 있었다. 지금 그들이 가지고 있는 건 개인적으로 품속에 지니고 있던 약간의 육포와 작은 물통 하나씩이 전부였다. 아껴서 먹는다면 이틀 정도는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배고프다고 저렇게 먹어 대면 한입에 끝날 적은 양이었다.

하지만 라이는 모질게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소피아 수녀는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여자였으니까.

‘우와, 어떻게 된 게 얼굴이 온통 눈물 콧물 범벅인데도 저렇게 예쁘냐?’

지금까지 소피아 수녀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아마 동료들을 내팽개치고 두 사람만 살겠다며 도망친 것에 대한 죄책감에 심신이 극도로 지친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얼마 도망치지도 못했는데도, 다리가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는 것이리라. 라이는 소피아 몰래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그녀를 반드시 지켜 주겠다는 결심을 굳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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