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는 반역자?
그래도 첫날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그때까지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튼튼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놀 떼가 기습이라도 할 새라 뜬눈으로 밤을 새운 후부터는 얘기가 달라졌다.
무엇보다 짠 육포를 우걱우걱 먹고 난 뒤 배가 아프다며 근처 숲 속으로 들어간 소피아 수녀가 무섭다고 라이에게 근처에 있으라 신신당부한 뒤부터다. 당시 숲 속에서 들려오던 요란한 굉음과 함께 요상한 냄새까지.
그 전까지만 해도 어느 정도 여사제로서의 품위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걸쭉하게 뭔가를 배설한 이후부터는 소피아의 행동과 말이 완전히 달라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안 그래도 피곤해 죽겠는데 소피아 수녀는 툭 하면 다리 아파, 배고파, 목말라…….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르겠지만, 성직자라면서 인내심이라고는 말라비틀어진 쥐꼬리만큼도 없었다.
만약 라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소피아의 투정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 줬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녀는 아름다웠고, 고귀한 성직자의 신분이었으니까. 하지만 라이는 그 누구보다 삶에 대한 집착이 강한 사람이었다. 문제는 식량도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도망을 치다 보니 지금은 배고픔에 지쳐 자칫 아사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도 소피아 수녀가 계속 힘들다, 배고프다면서 투정을 부리니 라이의 그녀에 대한 환상이 조금씩 깨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우와, 정말 양심도 없네. 어떻게 내 육포의 대부분을 뺏어 먹은 주제에 배고프다는 말이 나와? 그리고 물은……. 물도 자기가 다 마셨잖아.’
아주 미쳐 버릴 지경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있었던 것이 겨우 하루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라이가 이런 생각을 할 정도로 소피아의 투정은 심했다. 하지만 이건 그녀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리치몬드 일행과 헤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그녀는 파티의 일원으로서 자신이 맡은 임무를 훌륭하게 완수해 내고 있었으니까.
그녀로 하여금 이 정도 역경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게 만든 건 순전히 그동안 같이했던 파티원들 탓이었다. 신전을 나온 이래, 그녀는 지금까지 아쉬운 것 하나 없이 생활해 왔었다. 자신이 결정하거나 생각한 것도 없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 모험을 해 왔지만, 정작 그녀가 알고 있는 지식은 극히 적었다. 그리고 할 줄 아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 누가 가녀리고 인형처럼 아름다운 수녀에게 감히 일을 시키겠는가. 그저 귀한 보석을 대하듯 아끼고 또 아끼다가 필요할 때 신성마법 한 번 받는 것만으로도 모두들 감사히 여겼다. 그리고 그런 동료들의 태도가 그녀를 뼛속까지 철없는 소녀로 만들어 놨던 것이리라.
그리고 남자라 느껴지지 않는 라이의 모습에 그동안 성직자로서 지켜 왔던 가면이 벗겨진 것이다. 물론 그 결과는 라이로 하여금 여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 만큼 끔찍한 것이었지만.
‘도저히 이렇게는 못살겠어.’
한참 동안을 고민하던 라이는 결국 마음을 굳혔다. 다음 날 아침에 몰래 혼자 떠나기로. 산속에 홀로 남겨진 소피아 수녀가 어떻게 될지 볼 보듯 뻔했지만, 그는 애써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이 상태로는 수녀보다 자신이 먼저 죽게 생겼으니까.
‘그래, 그것만이 내가 살길이야.’
“빨리 걸으시죠, 수녀님. 어제는 그럭저럭 뱃속에 들어온 게 있어서 놀들이 사냥을 나오지 않았는지 몰라도, 오늘은 어떨지 모른단 말입니다.”
“알아! 지금 최대한 빨리 걷고 있잖아. 헉헉…….”
거친 숨소리, 그리고 얼굴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만 봐도 그녀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라이는 더 이상 소피아를 채근할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소피아가 헐떡거리며 물었다.
“혹시 물 남은 거 없어?”
라이는 짜증 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수녀님이 다 드셨잖아요.”
“아앙, 나 목말라.”
“좀 참으십쇼. 서둘러 걸으시면 오늘 저녁때쯤에는 개울가에 도착할 수 있을 테니까요.”
어르고 달래며 걸어가고 있긴 했지만 생각보다 별로 속도가 나지는 않았다. 이런 상태로는 내일 아침은 되어야 개울가에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이때 라이의 눈에 토끼 한 마리가 보였다. 라이는 재빨리 소피아를 쳐다봤다. 다행히 소피아 수녀는 아직 토끼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토끼를 발견했다는 걸 라이가 소피아에게 알리지 않은 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사실 점심때쯤에도 토끼를 한 마리 봤었다. 크고, 통통하고, 맛있어 보이는 토끼를. 라이는 즉시 소피아에게 그 사실을 알렸었다.
“쉿! 저기 토끼가 있어요.”
토끼를 잡게 조용히 하라는 뜻으로 알려 줬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소피아 수녀의 반응은 라이의 예상을 넘어선 것이었다.
“와아! 귀여워!”
지쳐서 더 이상 못 걷겠다며 징징거리던 그녀가 갑자기 토끼를 껴안겠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리고 팔짝팔짝 뛰어갈 줄이야 라이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토끼는 다리야 날 살려라 하면서 도망쳐 버렸고, 라이는 기가 막혀 미칠 지경이 되어 버렸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소피아는 라이가 왜 화가 난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왜…, 왜 그러는 거야?”
“몰라서 물으십니까? 토끼를 잡아야 먹을 수 있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저렇게 귀여운 토끼를? 안 돼! 잡지마. 난 그렇게는 못해.”
아직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된 듯 어이없는 대답을 하는 소피아의 말에 도저히 참지 못하고 라이의 짜증이 드디어 폭발했다.
“그러면 배가 고프다는 말씀을 하지 마시던가요!”
라이가 언성을 높인 후에야 소피아 수녀는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미, 미안해. 나 때문에 화났어?”
소피아 수녀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애처롭게 말하면 라이로서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소피아의 진실 된 모습을 라이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토끼를 잡아서 구워 놓으면 한 조각이라도 더 먹겠다고 군침을 줄줄 흘릴 것이라는 것을.
‘에이, 가증스러운 년.’
라이는 욕설을 애써 속으로 삼킬 뿐, 차마 대놓고 말하지는 못했다. 어떻게 저 애처로운 얼굴에 욕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마왕이나 변태가 아니고서야…….
살그머니 소피아 수녀의 눈치를 살피던 라이는 재빨리 화살통에서 화살을 뽑아 활시위에 걸었다. 시위를 끝까지 당겼다가 놓자, 퓨웅 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가는 커다란 화살. 이렇게 큰 화살을 고작 토끼 한 마리 잡겠다고 쏘고 있는 자신의 신세가 처량할 뿐이다.
퍽!
다행히도 화살은 토끼의 머리를 단박에 꿰뚫어 버렸다. 소피아 수녀는 그때까지도 라이가 화살을 왜 쐈는지 그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왜 화살을 쏜 거야? 혹시 몬스터라도…….”
“아뇨. 수녀님께서 굉장히 귀여워하시는 토끼라는 놈을 잡기 위해서죠.”
“어,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애를…….”
라이가 죽은 토끼를 들고 오는 것을 보자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바라보던 소피아는 갑자기 두 손을 모아 웅얼거리며 뭔가 기도를 올렸다.
“먹고 살자니 어쩔 수 있습니까. 그런데 수녀님께서는 토끼 고기 드셔 본 적 없으십니까?”
“먹어는 봤지만…, 이렇게 죽어 있는 건 본 적이 없어.”
소피아는 쪼그리고 앉아 토끼털을 손으로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정말 부드럽다…….”
“필요하시면 가죽을 벗겨 드릴까요?”
벗겨 준다는 말에 소피아의 얼굴이 흠칫 굳는다. 그녀는 토끼에게서 재빨리 손을 떼며 뒤로 주춤 물러섰다.
“가죽도 벗기는 거야?”
“아뇨. 통째로 구워 버릴 거예요. 가죽 벗기기도 귀찮은 데다가, 잘 구워 놓으면 맛있으니까요.”
아직 해가 지려면 꽤 여유가 있었지만, 라이는 이쯤에서 자리를 잡고 야숙을 하기로 했다. 배가 너무 고팠기 때문이다.
“오늘은 여기서 야숙하기로 하죠.”
주변에서 마른 나뭇가지들을 주워다 불을 피울 때도 소피아 수녀는 옆에 쭈그리고 앉아 구경만 했다. 라이는 으레 그렇거니 하며 수녀에게는 일을 시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모닥불이 기세 좋게 타오르기 시작하자, 라이는 토끼를 집어 들었다.
“그거 정말 먹을 거야?”
“당연하죠.”
토끼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자 특유의 구린내가 진동을 한다.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소피아는 코를 막고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난 안 먹어. 그거 절대로 안 먹을 거야.”
고기가 다 구워지면 태도가 바뀔 것을 잘 알고 있는 라이로서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예, 예. 그러시든가요.”
‘내가 두 번 다시 사제하고 여행을 하면 사람이…….’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건 수녀가 걸어 줬던 신성마법이 가져왔던 그 무시무시한 살상력! 아마 그것 때문에 리치몬드가 소피아 수녀를 데리고 다녔던 것이겠지. 적당히 그녀의 비위를 맞춰 주면서…….
‘맞아. 소피아가 문제였던 거야. 다른 여자…, 아니 남자 사제는 괜찮겠지.’
더 이상 여자 사제는 꼴도 보기 싫은 라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