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끼를 통째로 기다란 나뭇가지에 꿰어 불 위에 올려 털부터 태웠다. 보드랍던 토끼털이 타오르며 노린내를 풍기던 것도 잠시, 곧이어 맨들맨들한 토끼 가죽만이 남았다. 라이는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돌려 고기가 타지 않고 골고루 익게 만들었다.
귀엽던 토끼가 점차 고깃덩이로 화해 가는 것을 소피아는 불만 가득한 눈길로 째려보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고소한 냄새가 풍기자 그녀의 표정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그녀도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뱃속의 아우성을.
고기 표면에서 기름이 부글부글 끓으며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고소한 냄새는 더욱 짙게 풍겨 나왔다. 라이는 고기에서 눈을 떼지 않고 타지 않게 계속 나뭇가지를 돌렸다.
이때, 갑자기 뒤에서 소피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그녀는 라이의 바로 뒤에 와 있었다. 노릿하게 구워지는 토끼 고기 냄새의 유혹을 참지 못했던 것이리라.
“이제 다 익은 거 아냐?”
“좀 전에 이 고기는 안 드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순간 소피아 수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의 잘못을 모른 척할 정도로 그녀의 심성이 삐뚤어진 것은 아니다. 뭐니 뭐니 해도 신을 섬기는 사제였으니까. 그녀는 솔직히 사과했다.
“그런 말 해서 정말 미안해. 이렇게 맛있게 바뀔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어.”
“그러시겠죠.”
이 상황에서 소피아 수녀를 질책해 봐야 뭐 하겠나. 라이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를 내줬다.
“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이제 다 익은 거 아냐?”
“속까지 다 익으려면 조금 더 있어야 합니다.”
소피아는 황홀한 듯한 표정으로 냄새를 맡더니 감탄사를 연발했다.
“이렇게 맛있는 냄새가 날 줄이야……. 라이는 요리 솜씨가 정말 대단한 거 같아.”
“과찬이십니다. 그냥 내장 꺼내서 구운 것밖에 없는데요.”
한참을 더 소피아의 애를 태운 후에야 라이는 고기를 불 밖으로 꺼냈다.
“이제 대충 익은 것 같네요.”
라이는 토끼 뒷다리 하나를 뜯어 소피아에게 건네줬다.
“고마워.”
생긋 미소 지으며 고기를 덥석 받아 드는 소피아. 겉모습만 봤을 때는 정말 천사 같았다. 라이는 사람의 겉과 속이 이토록 다르다는 것에 신비함마저 느꼈다. 어제까지만 해도 흠모의 대상이었던 아름답던 수녀가 이제는 젠장녀와 민폐녀를 넘어 웬수덩어리로 바뀔 줄이야.
‘젠장, 그래도 쓸데가 한 가지는 있네. 눈이 즐겁다는 거. 그래, 많이 드십쇼. 이게 제가 차려 드리는 마지막 식사니까요.’
이번에는 자신이 먹기 위해 토끼의 다른 쪽 다리를 붙잡았을 때였다. 어디선가 머리털이 쭈삣 설 것만 같은 매서운 파공성이 들려왔다. 라이가 재빨리 고개를 숙이는 찰나, 화살 하나가 그와 소피아 사이를 지나가 나무에 푹 하고 박혔다.
‘헉! 언제?’
토끼를 굽는 것에 너무 정신을 판 것을 후회하며 라이는 급히 일어섰다. 허리에 꽂아 둔 도끼를 뽑으려는 순간, 싸늘한 경고성이 들려왔다.
“꼼짝 마!”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괴한은 둘. 그중 뒤쪽에 서 있는 사내가 화살을 쏜 것이었다. 궁수는 어느새 새로운 화살의 장전을 끝내 버린 상태. 그 재빠른 속도에 라이는 그의 궁술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더군다나 궁수가 쓰고 있는 가죽투구를 보자 라이의 경계심은 더욱 높아졌다. 용병대 내에서 저런 가죽투구를 쓰고 있었던 건 모라이어스와 같은 레인저들뿐이었다.
레인저들이 강철투구 위에 가죽을 한 겹 덧씌워 놓은 형태의 투구를 애용하는 이유는, 수풀 사이를 통과할 때 나뭇가지가 투구에 부딪쳐도 소리가 거의 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의외의 괴한들, 그런데 산적이라고 보기에는 실력이 너무 뛰어나다.
‘도대체 뭐 하는 놈들이지?’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을 통해 라이는 한 가지 틈을 발견할 수 있었다. 궁수를 너무 믿고 있는 탓인지 앞쪽에 서 있는 중년 사내가 아직 검조차 뽑지 않고 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검뿐만이 아니다. 투구조차 쓰지 않고 있다.
아마 50은 되고도 남았으리라. 중년 사내의 나이가 많다는 점이 더욱 라이를 고무시켰다. 중년 사내의 순해 보이는 인상 탓에 라이는 그를 은연중에 만만하게 보고 있었던 것이다.
라이는 중년 사내와 자신과의 거리를 가늠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거리가 조금 멀었다. 중년 사내 혼자라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겠지만, 궁수까지 상대해야 하는 걸 감안한다면 무리였다. 지금은 항복하는 척하면서 다음 기회를 엿보는 게 나으리라.
생각을 정하자마자 라이는 재빨리 두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반항할 생각이 없다는 표시였다.
“저희들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제 동굴을 탐험하다가 놀 떼를 만나 가진 걸 몽땅 다 날려 버렸거든요.”
라이의 말에 중년 사내가 빙긋 미소 지었다. 옆집 아저씨처럼 순해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말투는 신랄하기 그지없었다.
“놀? 그런 삼류 몬스터에 쫓겨 짐을 몽땅 놔두고 도망쳤다고? 그렇게 형편없는 놈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한두 마리라면 그렇겠죠. 하지만 우리를 습격한 건 거의 삼백 마리가….”
소피아 수녀가 그 상황에 대해 뭐라고 거들어 줄까 싶어 옆을 힐끗 바라본 라이는 기가 막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소피아 수녀는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모닥불 근처에 퍼질러 앉아 토끼 고기를 뜯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정말 도움이 안 되는 여자였다.
‘이런 떠그랄! 저런 년한테 잠시라도 기대를 한 내가 등신이지.’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니 중년 사내의 뒤에 서 있는 궁수와 눈이 마주쳤다. 중년 사내와 달리 궁수의 눈매는 정말 매섭기 짝이 없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차가운 눈빛이다.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좀 더 높게 치켜들며 말을 이었다.
“… 넘어 보였습니다.”
그런 모습을 본 중년 사내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식사 중에 미안하네만, 우리는 지금 사람을 찾고 있는 중이야. 자네는 우리가 찾는 사람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서 말이지. 자네 이름이 뭔가?”
순간 라이의 눈은 번개와 같은 속도로 괴한들의 장비를 훑었다. 가볍고 실용적인 무장. 그리고 그 위를 허름한 군청색 로브로 가리고 있다. 용병들이 즐겨 입는 옷차림이다.
‘설마……?’
순간, 용병단에서 자신을 잡기 위해 파견되어 나온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덜컥 들었다. 저 중년 사내의 묘한 분위기가 마음에 걸리던 차였는데, 사람을 찾고 있다고 하지 않는가. 게다가 이 깊은 산속에서 말이다.
라이는 가급적 담담하게 대꾸하려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올리버 트리스티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열심히 토끼 고기를 뜯고 계시는 이분은 겉모습만 봐도 대충 짐작이 가시겠지만, 소피아 수녀님이시구요.”
올리버 트리스티라는 말에 중년 사내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신분증은 있겠지?”
살짝 일그러진 중년 사내의 표정이 조금 찜찜하긴 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라이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신분증을 꺼내 중년 사내에게 던져 줬다.
중년 사내는 신분증을 꼼꼼히 살펴본 다음, 라이를 몇 번이고 쳐다보며 확인하는 듯했다.
“과연, 맞군.”
이때, 궁수가 냉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올리버 트리스티는 지금 어디에 있지?”
가죽투구 사이로 보이는 매서운 눈초리. 그걸 보자마자 라이는 심장이 멎을 만큼 깜짝 놀랐다. 올리버 트리스티의 신분증을 보여줬는데도 그를 찾다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
상대가 찾는 게 정말 올리버 트리스티인 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혼란을 주기 위해 일부러 저러는 것인지 분간을 할 수가 없었다. 정보가 너무 부족했다.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어 좀 더 정보를 얻어 보려 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궁수의 가죽투구 사이로 보이는 눈빛에 서서히 짙은 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죽기 싫다면 순순히 실토하는 게 좋을 게다.”
리치몬드는 분명히 올리버 트리스티가 모험을 하는 와중에 죽었다고 했었다. 아직 리치몬드에 대한 신뢰가 채 가시지 않은 라이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라이는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거기 신분증에 나와 있지 않습니까. 제가 올리버 트리스티입니다. 오랜 모험 탓에 살이 좀 빠지기는 했습니다만, 틀림없는 사실이죠.”
그러자 중년 사내는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더니 품속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가 종이를 활짝 펼치자 누군가의 얼굴이 아주 세밀하게 그려져 있는 게 보였다.
‘설마 정말로 올리버를 찾고 있는 건가?’
중년 사내는 초상화를 라이가 보기 좋게 펼쳐서 보여 주며 말했다.
“네놈과 별로 닮은 것 같지는 않지? 하지만 본인이 올리버 트리스티라고 주장하니 어쩔 수 없군.”
여기까지는 꽤 재미있다는 듯한 말투로 말하던 중년 사내가 갑자기 무시무시한 음성으로 외쳤다.
“네놈을 반역죄로 체포하겠다.”
반역죄라는 말에 라이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설마 얘기가 이렇게 꼬일 거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헉! 바, 반역죄라니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중년 사내는 쏜살같이 달려들어 라이를 포박하려 했다. 밧줄을 들고 접근해 오는 찰나의 시간을 활용해 어떻게든 대항할 수도 있었겠지만, 라이는 그러지 못했다. 반역죄라는 말에 정신이 멍해져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닉이라는 놈을 닮은 초상화, 그리고 반역죄. 지금까지 리치몬드 일행과 함께 움직이며 이상하다고 느꼈던 부분들이 일순간에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리치몬드와 젠슨이 왜 어리숙한 녀석을 그렇게까지 감싸고 돌았는지를…….
‘그랬던 거였어. 그래서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 닉을 동료인 척 함께하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그 비싼 말을 헐값에 팔아 치운 거나 오크 떼가 있음에도 강행군을 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군. 빌어먹을, 바보같이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지금까지 토끼 고기를 뜯어먹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어 라이의 속을 뒤집어 놓았던 소피아 수녀. 그녀는 중년 사내가 갑자기 라이를 포박하자 더 이상은 못 본 척할 수 없었는지 끼어들었다.
“그는 올리버 트리스티가 아니에요.”
꽁꽁 묶은 라이의 몸에서 무기들을 빼앗아 땅바닥에 던져 버리며 중년 사내가 소피아 수녀에게 물었다.
“그럼 이 사람은 누굽니까?”
새파랗게 젊은 아가씨였지만, 신을 받드는 사제로서 예우를 해 주는 것만 봐도 중년 사내가 막돼먹은 인물이 아님은 확실했다.
“라이라고 하는 아이예요. 성은 없고, 그냥 라이요.”
소피아는 라이를 언제 만났고, 어떻게 해서 여기까지 오게 되었는지 자세하게 설명했다. 짐짓 흥미롭다는 듯 경청하던 중년 사내. 하지만 소피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비꼬듯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어떻게 믿습니까?”
“제가 섬기는 이레네(Irene)님의 이름을 걸고, 이 모든 게 단 한 치의 거짓도 없다는 것을 맹세하겠어요.”
그러면서 소피아는 평화의 여신을 모시는 신전에서 발행한 신분증명서를 꺼내 보여 줬다.
“제가 이레네님을 섬기는 수녀라는 것을 못 믿으시겠다면 신성마법을 시연해 보여 드릴 수도 있어요. 혹시 상처를 입으신 분이 계시나요?”
소피아가 이렇게까지 나오자 중년 사내는 한발 뒤로 물러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