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녀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그래, 리치몬드라는 사람이 일행의 리더였던 모양인데, 그 사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리치몬드의 얘기가 나오자 소피아 수녀의 안색이 급격히 우울해졌다. 닉은 별로였지만, 리치몬드나 젠슨은 아주 괜찮은 동료였으니까.
“그는 동굴에서 죽었어요.”
소피아는 일행들이 왜 동굴로 갔는지를 설명하고, 그들의 최후가 어떠했는지까지 자세히 말해 줬다. 그러자 중년 사내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초상화를 소피아에게 보여 주며 물었다.
“혹시 그 일행들 중에서 이 초상화와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 있었습니까?”
소피아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닉이네요. 니키 던컨. 그의 아버지가 아주 부유한 상인이라고 하더라고요. 리치몬드 씨의 말로는 이번 모험에 그 사람이 꽤 많은 금액을 투자했다고 했어요. 그리고 감시역으로 붙여 놓은 게 그의 아들 닉이었고요. 저는 리치몬드나 젠슨이 닉을 정중하게 대하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어요.”
그제서야 사태의 전말을 이해했는지 중년 사내가 소피아 수녀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친절하신 협조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방금 전에 말씀하신 게 사실인가요? 그가 반역죄를 저질렀다는 게…….”
“유감스럽게도 사실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역죄를 저지른 백작가의 장남이지요.”
중년 사내는 라이에게로 시선을 돌려 싸늘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제 자네와 진지한 대화를 좀 나눠 봐야겠군. 수녀님의 말씀대로라면, 신분증을 산적들에게 강탈당했다고?”
“예, 맞습니다.”
“흠, 여신께 맹세까지 하신 수녀님이 거짓말을 하실 리는 없고. 그렇다면 자네가 거짓된 정보를 수녀님께 알려 드렸다는 게 맞겠지. 그, 냥, 라이 군. 자네는 끝을 뾰족하게 갈아 놓은 나무 막대 따위로 오크를 찔러 죽인다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자신이 했었던 일이었기에 라이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사실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오크를 나무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니까.
“가능하던데요.”
순간 중년 사내의 눈썹이 꿈틀거리긴 했지만, 그는 참을성 있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물론 약간 비꼬는 듯한 어투로 말이다.
“산적 따위에게 전 재산을 몽땅 털릴 정도의 애송이 보따리 상인이 활과 도끼로 오크 십여 마리를 순식간에 도륙했다고? 그리고 오크가 어디에 매복하고 있건 아주 족집게처럼 척척 찾아내고 말씀이야.”
역시 중년 사내는 허투루 나이를 먹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라이의 말속에서 빈틈을 매섭게 찔러 들어왔다. 절대 어설프게 상대해서는 안 될 닳고 닳은 사내였던 것이다. 라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오크만 잘 찾아내는 겁니다. 오크만요. 녀석들의 지독한 악취를 제 코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거든요.”
하지만 중년 사내는 손가락을 좌우로 가볍게 흔들며 라이의 말을 부정했다.
“그게 아니지. 그것보다는 네놈이 트리스티 백작이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붙여 놓은 비밀 경호원이라고 보는 게 옳겠지.”
라이는 순간 현재 자신의 상황이 아주 웃기게 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리치몬드에게 속아 반역도 놈들에게 이용당한 것만 해도 억울한데, 하지도 않은 죄까지 뒤집어쓰게 생긴 것이다.
탈주 노예와 반역죄 중 어느 쪽이 죄질이 가벼울까? 그건 생각해 보나 마나였다.
“잠깐만요! 모든 걸 실토하겠습니다.”
중년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미소 지으며 말했다.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어서는 안 돼. 그랬다간…….”
“사실 저는 붉은 전갈 용병단에서 탈출한 도망병입니다.”
라이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지 중년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원래 용병이라는 게 돈 받고 싸우는 존재들인 만큼, 자기가 하기 싫다면 그만두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용병단에서 탈출을 했고, 그래서 도망병이라니? 정규군도 아닌 용병인 주제에 도망병이라는 말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뒤에 서 있던 궁수가 중년 사내에게로 살짝 다가와 속삭였다.
“붉은 전갈 용병단은 노예병을 주력으로 사용한다고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라이는 중년 사내와 궁수와의 상하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다. 중년 사내가 궁수보다 훨씬 윗사람이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중년 사내는 그제서야 라이의 말을 이해한 모양이다. 갑자기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흠, 용병이 도망을 쳤다기에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너 노예였냐?”
라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힘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예.”
“이제야 이해가 되는군. 네놈이 왜 굳이 다른 사람의 신분증을 이용하려고 했는지를 말이야.”
라이는 재빨리 무릎으로 바바박 기어가 중년 사내 앞에 꿇어 엎드리며 애원했다. 그가 낼 수 있는 최대한 애처로운 목소리로.
“나으리, 제발 살려 주십쇼. 도망친 노예가 붙잡히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되는지 잘 아시잖습니까? 그러니 제발 모른 척 눈감아 주시면 안 될까요? 제 억양을 들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는 이 나라 사람이 아닙니다요. 저 북쪽의 작은 왕국에서 노예상인들에게 억지로 납치당해 끌려왔습지요. 고향의 다 쓰러져 가는 낡은 집에는 늙으신 어머니와 아직 어린 동생들이 제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그러니 제발 도와주십쇼, 나으리.”
라이가 평소 하지 않던 짓을 한 이유는 중년 사내의 선해 보이는 인상 때문이었다. 그리고 얘기를 하면서 슬쩍 중년 사내의 눈치를 살피니 자신의 거짓말이 제법 먹혀들어 가는 것 같기도 했다.
희망이 보이는 듯하자 라이는 자신이 겪었던 노예생활을 최대한 불쌍하게 포장하여 주저리주저리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을 하다 보니 자신의 신세가 너무 기구하고 서글퍼져 두 눈에서 하염없이 눈물까지 흘리게 되었다.
아마도 그게 주효했던 것 같다. 말을 듣던 중년 사내의 싸늘한 눈빛이 많이 누그러진 듯했으니 말이다.
‘역시 가족을 들먹이고, 인정에 호소하는 게 제일 잘 먹히는구나. 노예상인들과 같은 인간쓰레기들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겠지만, 저런 순둥이한테는 직방이지.’
라이는 초조한 마음으로 중년 사내의 입에서 ‘그간 고생이 많았겠구나. 그래, 빨리 고향에 가 보거라’ 하는 말이 튀어나오길 애타게 기다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중년 사내는 뭔가 골똘히 궁리만 하고 있을 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기나긴 기다림의 시간이(실제로는 얼마 지나지도 않았다) 지난 후, 드디어 중년 사내의 무겁게 닫혀 있던 입이 열렸다.
“수녀님께서는 이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엥? 그럼 나는?’
중년 사내는 라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너는 그 동굴로 우리를 안내해라. 올리버라는 놈만 잡으면 네 녀석을 풀어 주마.”
그 순간 하마터면 라이는 큰 소리로 만세라도 부를 뻔했다. 당장은 아니지만 자신을 풀어 주겠다는 언질을 받게 되었으니 말이다.
‘흐흐흣, 겨우 살았다. 역시 내 눈썰미가 보통이 아니라니깐. 마음이 약해 보여 슬쩍 감성을 건드려 줬더니,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줄이야…….’
중년 사내는 뒤에 서 있는 궁수에게 시선을 돌려 지시를 내렸다.
“샘, 저 녀석 포박을 풀어 줘.”
궁수의 이름이 샘이었던 모양이다. 샘은 중년 사내의 지시를 받자마자 라이에게 다가와 단단히 묶여 있던 포박을 풀어 줬다. 라이는 얼른 공손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며 중년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은 감성에 휘둘려 이런 결정을 내렸겠지만, 나중에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 풀어 준다는 말에 쇄기를 박으려는 의도였다.
“저…, 어르신. 송구스럽습니다만, 올리버인지 뭔지 하는 놈만 잡게 되면 절 풀어 주신다는 말씀, 정말이시죠?”
“허, 이놈이 속고만 살았나. 내가 하찮은 네놈 따위를 붙잡아서 어디다 써먹을 데가 있겠냐? 허긴 도망쳤다는 용병단에 넘기면 술값 정도는 벌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자신의 몸값이 무려 금화 150개라는 걸 중년 사내가 눈치채면 끝이었다. 그렇다면 절대로 자신을 풀어 줄리 없을 테니까. 그렇기에 라이는 정색을 하며 중년 사내에게 말했다.
“술값조차도 받아 내기 힘드실 걸요. 도망 노예가 잡히면 어떻게 되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본때를 보이기 위해 장대 높이 목을 매달아 모두가 보도록 전시해 놓죠. 비바람에 썩어 목이 떨어질 때까지 말입니다. 안 그래도 죽여 버릴 노예, 잡아가 봐야 몇푼이나 주겠습니까?”
“그건 그렇군. 어쨌거나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할 테니, 일단은 푹 쉬고 있도록 하게.”
중년 사내는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라이의 무기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네놈 장비들은 네놈이 잘 챙겨라. 비무장으로 가기에는 험악한 곳이니 말이야.”
확실히 이건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라이는 너무 기뻐 환호성이라도 지를 뻔했다. 손을 묶인 뒤 그 동굴까지 질질 끌려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묶이기는커녕, 지니고 있던 무기까지 다 돌려받을 줄이야.
‘기회를 봐서 저 둘을 해치워 버리고 도망칠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너무 위험했다. 그동안 라이가 겪은 바로는 세상에는 겉모습만으로는 판단할 수 없는 숨겨진 실력자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올란도만 봐도 그렇지 않았던가. 허구한 날 술만 마시며 놈팽이처럼 굴더니, 실제로는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엄청난 실력자였다.
게다가 며칠 뒤면 풀어 준다고 하는데 굳이 위험을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만사에 조심, 또 조심하는 것만이 내가 살길이지.’
중년 사내는 벌써부터 잠을 자려는 것인지 모닥불 근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샘이라는 궁수는 어디론가 사라져서 보이지 않았다. 아마 주변을 둘러보러 간 모양이다.
그 모습에 라이는 자신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아무리 자신이 어려 보인다고 해도 용병단 출신의 노예병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거리낌 없이 행동한다는 것은 그만큼 믿는 구석이 있다는 말일 테니까.
라이도 슬그머니 모닥불 옆에 몸을 눕혔다. 온몸이 노곤했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동안은 참으로 복잡하기 짝이 없는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 같다. 게다가 어제는 경계를 하느라 밤까지 꼴딱 새워야 했지 않은가. 설상가상으로 방금 전에는 중년 사내를 만나 간이 쪼그라들 정도로 놀라기까지 했고 말이다.
며칠 후 풀어 주겠다는 언약을 받고 나니 긴장이 풀린 탓인지 피곤이 더욱 몰려왔다. 자신도 모르게 커다랗게 하품을 하던 라이의 눈에 땅바닥에 떨어진 뼈다귀 하나가 들어왔다. 그건 소피아 수녀가 먹다 버린 뼈다귀였는데, 아직 살점이 제법 많이 남은 것처럼 보였다.
‘젠장, 개고생해서 구웠건만 난 한 입도 제대로 먹지 못했는데. 에고, 배고파라.’
라이는 눈을 질끈 감고 애써 잠을 청하려고 했다. 하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피곤해서 쓰러질 것만 같았는데, 땅바닥에 버려진 뼈다귀에 붙어 있는 살점을 보고 나자 배가 고파 미칠 것만 같았다.
라이는 살그머니 눈을 뜬 뒤 뼈다귀의 상태를 살폈다. 비록 소피아 수녀가 먹다 버린 거고 흙이 묻어 있긴 하지만 도저히 뼈다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땅에 떨어진 걸 주워 먹다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정말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워낙 배가 고프다 보니 이런저런 것을 따질 상황이 아니다.
라이는 슬쩍 중년 사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년 사내는 이미 잠이 깊이 든 듯 나직하게 코까지 골며 자고 있었다. 이번에는 소피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피아 역시 배부르게 고기를 먹었는지 편안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봤지만 샘이라는 사내는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아마 주변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는 모양이다.
라이는 누가 볼세라 잽싸게 손을 뻗어 뼈다귀를 움켜잡았다. 그리고는 품에 껴안듯 가슴 쪽으로 가져와 대충 흙을 털어 낸 뒤 입 안에 밀어 넣었다. 미처 못 털어 낸 흙 때문에 입 안이 버석거리기는 했지만, 뼈에 붙은 작은 살점들은 너무나도 맛있었다.
‘이렇게라도 먹어야 살 수 있다. 빌어먹을…….’
살점을 다 먹은 뒤 뼈까지 쪽쪽 빨아먹던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어느새 잠에 빠져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