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엄청나게 오버하네. 지금껏 여러 수녀들과 다녀봤지만 저 년만큼 호들갑 떠는 계집은 보다보다 처음이야. 만약 목이라도 잘랐으면 오줌을 질질 싸며 난리가 아니었겠군.’
하지만 샘과 달리 수녀에게 은근히 마음이 있던 대장의 반응은 달랐다. 대장은 한숨을 내쉬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뭐라고 말해야 이 상황을 수녀에게 납득시킬 수 있을지 난감했던 것이다.
“너무 놀라지 마십시오, 수녀님. 제가 이런 건 다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이, 이유라니요?”
뭐라 말해야 할지 고민스러웠던 대장의 얼굴이 조금씩 어둡게 변해 갔다. 자신들이 다른 나라로 망명을 하러 가는 길이라는 말에 수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두려웠던 것이다.
이제 반역자로 쫓기는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를 자신들인데 과연 흔쾌히 함께 가 줄까? 어쩌면 자신의 욕심 때문에 애꿎은 수녀까지 피해를 입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해 줘야 할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대장은 차라리 지금 수녀에게 어느 정도까지는 말해 주는 게 낫겠다는 판단을 했다.
“수녀님,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라이를 기절시킨 건 놈이 감찰부의 첩보원이기 때문입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들어서인지 소피아 수녀의 얼굴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가, 감찰부라면…, 왕실에서 일하는 사람이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마, 말도 안돼. 라이는 제게 분명 노예병이었는데 겨우 도망쳤다고 말했었는데요?”
대장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자신까지 감쪽같이 속았는데 저 순진한 수녀가 영악한 라이를 의심하기는 힘들었을 테니까 말이다.
“그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죠. 라이는 레인저 교육을 받은 감찰부의 첩보원이 확실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수녀의 두 눈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빛이 역력했다.
“도대체 뭐가 뭔지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라이가 감찰부 첩보원이라는 것도 믿기지 않고, 만약 그 말이 맞다면 두 분과는 같은 왕실 소속 아닌가요? 부서는 말씀하지 않으셨지만, 트리스티 일행을 추적하고 계신 걸로 보아 법무부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실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는데…….”
지방영주가 사병을 키워 치안유지를 하고 있기에 굳이 중앙에서 범죄자들을 처리해 주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법무부에서 하는 일은 재판관을 파견하여 각 영지를 돌며 순회재판을 열어 억울하게 잡혀 감옥에 들어가 있는 자들을 구제해 줬다. 물론,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형이 집행되어 버렸다면 어쩔 수가 없는 것이고…….
하지만 법무부에서 사건에 직접적으로 관여하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모반과 같이 국가 안보와 관련된 일이거나, 왕이 직접 조사하라고 명령을 내린 경우에는 조사관을 급파하여 증거를 수집하고 죄인들을 잡아들였다. 그렇기에 수녀는 두 사람이 법무부에서 파견 나온 게 아니냐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장은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더니 힘들게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도 저놈과 같은 감찰부 소속입니다.”
소피아 수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급히 반문했다.
“예에? 같은 소속이시라구요? 그런데 왜……?”
“수녀님께 이런 말씀 드려도 될지 모르겠지만……. 사실, 우리는 이 왕국을 떠나 다른 왕국으로 망명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이 녀석을 그냥 놔둘 수가 없는 거죠.”
대장의 말에 뭘 느꼈는지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소피아 수녀는 목이 메이는 듯 어색한 음성으로 급히 물었다.
“설마, 라이를 죽이실…, 건가요?”
그러면서 쓰러져 있는 라이를 눈물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소피아 수녀. 어찌되었건 지금까지 생사를 같이 했던 동료였던 만큼 걱정이 되는 것이리라. 대장은 다시금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직 결정하지는 못했습니다. 일단 이 녀석이 감찰부에서 나온 게 맞는지 확인부터 해야겠죠. 수녀님은 여기서 편히 앉아 쉬고 계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대장은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샘에게 명령을 내렸다.
“샘, 이놈을 밖으로 데리고 가 첩보원인지 아닌지 확인을 해 보도록.”
수녀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라이가 극심한 고문에 시달리다 결국 처참한 죽음을 당할 거라고 생각한 것이리라.
“저, 대, 대장님. 잠시만요. 잠깐…….”
“예? 왜 그러십니까?”
수녀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배를 살살 만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긴장을 했더니 배가…….”
대장은 곧바로 수녀가 생리현상 때문에 힘들어 한다는 걸 눈치챘다.
“아, 그럼 천천히 다녀오십시오. 저희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소피아 수녀는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함을 표한 뒤 비가 쏟아지고 있는 숲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런데 처음에는 천천히 걸어가는 듯싶던 수녀가 갑자기 속도를 올려 전속력으로 숲 속을 향해 내달리는 게 아닌가.
착잡한 표정으로 수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대장은 이런 수녀의 변화에 그저 멍하니 있었지만, 샘은 기민하게 반응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화살을 뽑아 수녀를 향해 연거푸 쏴댔다.
슉, 슉, 슈슉.
놀라운 속사 실력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날아간 화살들 중에서 한두 발 정도가 수녀의 몸을 꿰뚫은 듯 보였다. 하지만 수녀는 잠시 몸을 비틀거리는가 싶더니 더욱 빨리 가속하며 순식간에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 짧은 순간에 50여 미터가 넘는 거리를 도망친 것만 해도 놀라운데, 신성마법을 사용하여 화살까지 막아내다니. 그것만 봐도 소피아 수녀의 능력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결국 지금까지 그녀가 보여줬던 어리버리했던 모습이 모두 연극이었음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움직임이었다.
자신의 화살 공격을 피한 수녀가 숲 속으로 모습을 감추자 샘은 분통을 터트리듯 소리쳤다.
“이런 젠장할! 저년이었을 줄이야!”
소피아 수녀는 처음에는 은근슬쩍 달라붙어 이들의 행동과 위치를 상부에 보고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라이를 죽이지 않고 심문하겠다는 말에 생각을 바꿔 도주를 감행했다. 라이를 고문하다 보면 결국 자신이 첩자라는 것이 들통날 게 뻔했으니까.
이를 으드득 갈던 샘은 장비를 챙겨들며 대장에게 말했다.
“뒤쫓아 가서 저 잡년을 해치우고 오겠습니다.”
그때까지 소피아 수녀가 사라진 곳을 망연히 바라보며 서있던 대장은 샘의 말에 흠칫 정신을 차렸다.
“뭐…, 뭐라고?”
“뒤쫓아 가서 해치우고 오겠다구요.”
수녀가 제아무리 첩자 교육을 받았다고 해도 숲 속에서는 레인저인 샘의 손바닥 안이었다. 가녀린 소피아 수녀가 샘이 쏜 화살에 맞아 숲속에 시체가 되어 뒹굴게 될 것을 생각하면 대장은 샘을 보낼 수가 없었다.
“이렇게 폭우가 내리는데 뒤쫓아 가겠다는 건가? 게다가 조금 있으면 완전히 어두워질 텐데…….”
“겨우 수녀 나부랭이를 쫓는 일인데 큰 문제없습니다. 늦어도 내일 새벽까지는 처리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처연한 음색으로 대꾸했다. 말을 하는 대장의 얼굴은 한순간 10년은 늙어 버린 듯 추레하게 변해 있었다.
“그냥 놔두게.”
“예? 설마, 저년을 이대로 살려 주자는 말씀이십니까?”
대장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짙은 회한이 담겨 있었다.
“그녀에게 무슨 죄가 있겠나. 이따위 조직에 몸담고 있는 가엾은 여인일 뿐일세.”
샘은 답답하다는 듯 활로 숲속을 가리키며 대장에게 거칠게 소리쳤다.
“죄가 있고 없고가 문제가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가 어디로 갈지 저년이 훤히 다 알고 있다는 게 문제란 말입니다. 만약 저년이 상부에 보고라도 하는 날에는…….”
“보고를 한다 해도 별 상관은 없을 거야.”
“예? 그게 무슨…….”
“상부에서 우리가 배신한 걸 알았다고 해도 어쩔 수가 없을 거라는 말이지. 우리를 잡겠다고 청소부를 보내기에는 너무 늦었거든. 국경이 바로 코앞이지 않은가.”
“하지만 마법사를 통해 공간이동 시키면 순식간이잖습니까.”
“자네가 잠시 잊어버리고 있나 본데, 왕도에서 이곳까지 공간이동한다는 게 그리 쉬운 게 아닐세.”
알카사스 전역에 공간이동 마법을 방해하는 역장이 거미줄처럼 쳐져 있는 이유는 제2차 제국전쟁과 마도전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대륙이 뒤흔들릴 만큼 거대한 전쟁들을 겪으면서 알카사스는 기사단 전력에 있어 코린트나 크라레스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과거 코린트가 크라레스를 박살냈을 때 써먹었던 공간이동을 활용한 기습공격이라는 전술을 자신들이 당한다면 일격에 나라가 멸망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질 수 있었다. 그만큼 두 국가의 기사단 전력은 차원을 달리할 정도로 막강했던 것이다.
알카사스에서는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법에서 찾아냈다. 드래곤들이 사막지역에 역장을 쳐서 인간들이 공간이동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놨듯, 그들도 그와 유사한 시설들을 왕국 곳곳에 만들어 놓은 것이다.
물론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드래곤들이야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고 공간이동을 하겠지만, 실력이 떨어지는 인간 마법사들은 공간이동 중에 아차 하면 역장에 휘말려 엉뚱한 곳으로 공간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운 좋게 생명을 건지는 사람도 간혹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땅속으로 공간이동을 해 시체조차 건지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본부에서 마법사 길드에 연락해 잠시만 역장 방출을 멈추어 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지금껏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말에 이렇게까지 반박을 하는 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지만 대장은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러다 싸늘한 시체가 되어 산맥에 파묻히기 싫은 것이리라. 아니, 단칼에 죽으면 차라리 낫다. 자칫 사로잡히기라도 하면 끊임없는 고문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할 게 뻔했다.
“샘, 날 믿게. 왕국 최고의 방어무기라고 할 수 있는 역장 방출을 멈추려면, 제아무리 감찰부라고 해도 마법사 길드가 납득할 수 있는 타당한 이유를 대야 하지. 그런데 그 이유를 뭐라고 꾸며대지? 그러다 자칫 조직 내에 배신자가 나왔다는 걸 길드가 눈치채기라도 하면 오히려 혹을 떼려다가 혹을 더 붙이는 꼴이 되는데 말이야. 그렇기에 차라리 우리들에 대한 암살을 은밀히 의뢰하면 했지, 그런 무모한 짓은 절대로 못할 거야.”
공간이동을 할 수 없다면 감찰부의 킬러들이 여기까지 오는 데 굉장히 많은 시간이 소모되리라. 그리고 그들이 도착할 즈음에는 자신들은 이미 국경을 넘어 멀리 사라진 뒤일 터였다. 그렇기에 샘은 마지못한 척 활을 내려놓았다.
“쩝…, 대장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사실,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악조건 속에서 수녀를 추격하여 죽인다는 게 레인저인 샘으로서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문제만 없다면 대장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허탈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던 샘의 시야에 아직까지도 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라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는 라이를 가리키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 녀석은 어떻게 할까요? 이대로 목을 따버릴까요?”
“그냥 놔둬. 감찰부에서 첩보원을 두 명씩이나 투입했겠나? 가뜩이나 인력도 모자랄 텐데…….”
“그건 그렇긴 합니다만, 구태여 저 녀석을 데리고 갈 필요는 없잖습니까? 이번 기회에 깔끔하게 정리를 하는 게…….”
잠시 처연한 눈빛으로 소피아 수녀가 도망간 숲속을 바라보던 대장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데 얼굴 표정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어느 샌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휴우, 아냐. 그냥 놔두는 게 좋겠네. 트리스티 패거리도 3명, 우리도 3명. 혹시라도 청소부들이 우리 뒤를 쫓아온다면 혼란을 주기에 딱 좋지 않겠나?”
“아, 그거 좋은 생각이네요. 없애는 거야 국경을 넘어간 뒤에 해도 언제든 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한동안은 동료인 척 이용해 먹어야 했기에, 샘은 쓰러져 있는 라이를 발로 대충 밀어 비교적 물기가 적은 곳으로 옮겼다. 그리고 모닥불가로 가서 라이가 굽던 돼지고기를 집어 들고 다시 굽기 시작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열이 받는지 고기를 굽는 샘의 입에서 연신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망할 년! 어쩐지 수상쩍더라. 동료들이 다 죽었다는데도 불구하고 놀(Gnoll)이 득실거리는 동굴 근처에서 얼쩡거리고 있을 때 눈치챘어야 했는데…….”
그 말에 대장의 얼굴에 착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허허, 지금 와서 그런 말 해 봤자 뭐하겠나?”
“그년한테 그렇게까지 감쪽같이 속은 게 너무 화나고 분통이 터져서 그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