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3화 (799/930)

초보티를 내는 것만으로도 모자라 사랑에 빠진 듯 미인계까지 쓸 줄이야. 그토록 아름다운 여인이 꼬리를 살랑살랑 쳐대니 대장 같은 목석까지도 홀랑 넘어간 것이리라. 청소부 노릇을 하며 산전수전 다 겪어 본 대장이었지만, 설마 그녀의 그런 행동이 계산된 것일 거라고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모양이다.

왜냐하면 상대는 신을 받드는 사제였으니까. 그것도 순진하기 짝이 없는…….

이때, 라이가 부시시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아이고, 뒷골이야…….”

라이는 인상을 팍 찡그리며 뒤통수 쪽을 문지르다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뭔가가 내 뒤통수를 친 것 같은데……?”

샘은 손가락으로 위쪽을 가리키며 능청스럽게 이죽거렸다.

“절벽 위쪽에서 돌덩이가 떨어졌다. 그나마 뒤통수에 혹 하나 생긴 걸로 끝난 것을 대지의 여신께 감사해라. 만약 돌덩이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 네 대갈통이 박살났을 테니까.”

“허걱!”

깜짝 놀란 라이는 허둥지둥 투구를 꺼내 머리에 덮어썼다. 그리고는 절벽 위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억수처럼 쏟아지는 빗물탓에 위쪽을 관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배고플 텐데 멍청하게 있지 말고 이거나 먹어.”

샘이 건네주는 구운 돼지고기를 받던 라이가 뭔가 이상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근데 수녀님은 어디 가셨어요?”

“몰라. 배가 아프다며 밖으로 튀어나가셨는데…….”

“저 빗속으로요?”

라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 되묻자 샘은 콧방귀를 뀌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럼 우리들 눈요기하라고 여기서 허연 엉덩이를 드러내고 싸시겠냐?”

그것도 그렇기에 라이는 돼지고기를 입에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불에 구워서인지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과 함께 구수한 고깃국물이 입안에 가득 퍼지기 시작했다.

돼지고기 육포만으로는 배가 차지 않을 것 같아 뭐 먹을 게 있나 배낭을 뒤지려 할 때였다.

그때까지 비오는 숲쪽을 침울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묵묵히 앉아 있던 대장이 갑자기 라이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차피 곧 알게 될 테니 솔직하게 말해 주는 게 좋겠지. 라이, 네가 알아 둬야 할 게 있다.”

대장은 담담한 어조로 얘기를 꺼냈다.

“사실…, 우리는 감찰부 소속 사람들이다. 왕실 직속이지.”

감찰부라는 데가 뭐하는 곳인지 전혀 알지 못했던 라이였기에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왕실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요.”

감찰부라는 말까지 해 줬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예상했던 반응이 나오지 않자 대장의 안색이 살짝 일그러졌다.

“너, 감찰부가 뭐하는 곳인지 제대로 알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냐?”

당연히 모르는 라이였기에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글쎄요, 잘…….”

“하기야, 모를 수도 있지. 무식한 용병에게 뭘 바라겠냐.”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쉰 후 감찰부가 하는 일이 뭔지 간단히 설명했다. 강대한 권력을 지닌 기관이나 개인에 대한 감시나 감독을 하는 게 감찰부에서 하는 일이라고. 그야말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의 권력을 지닌 기관이 바로 감찰부였던 것이다.

“우와, 정말 대단한 분이셨군요.”

말 몇 마디 했을 뿐인데도 두 눈 가득 존경심을 듬뿍 담아 자신을 바라보는 라이의 눈빛에 대장은 씁쓸한 미소를 감추기가 힘들었다. 저런 촌무지렁이 따위를 첩자라고 오판했다니. 정말 은퇴할 때가 되었다고 대장은 생각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대단할 것도 없다. 어차피 우리들은 상부의 지시대로 움직이는 꼭두각시일 뿐이었으니까 말이야.”

“꼬, 꼭두각시요?”

“그래, 그 표현 그대로지. 상부에서 시키는 일이 정말 옳은 것인지, 아니면 권력자와 야합을 한 결과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저 시키는 대로만 해야 하는 꼭두각시 말이야. 사실, 지금 우리가 쫓고 있는 트리스티 백작가의 경우도 정말 반역을 꾸민 게 맞는지조차 전혀 모르거든.”

“그, 그럴 수가…….”

어이없어 하는 라이의 표정에 대장은 허탈한 미소를 지으며 계속 말을 이었다.

“사실, 상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해야만 하는 행동대원이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웃기는 노릇이지. 행동대원은 그저 상관이 시킨 대로만 행할 뿐, 다른 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배웠으니까. 하기야, 다른 생각을 할 만한 정보조차 주어지지 않긴 하지만 말이야.”

그때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샘이 슬쩍 끼어들었다. 그는 라이가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들어가며 말했다.

“우리와 같은 하급 대원들은 트리스티 백작가의 잔당들을 잡으라는 명령이 떨어지면 그들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또는 어디로 도주하고 있는지 그 경로만 알면 그것으로 충분해. 그들이 무슨 죄를 저질렀는지까지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단 소리지. 그건 우리보다 높은 직급의 상관들의 몫이거든. 안 그래?”

“그, 그건 그렇죠.”

알아듣기는 한 것인지 라이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자 대장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그의 음성은 착잡함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내가 지금껏 적지 않은 세월동안 감찰부에서 일해 왔지만, 첩보원과 직접 접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윗쪽에서 내린 지시대로 행동할 뿐이지, 첩보원에게서 직접 정보를 들을 수는 없거든.”

“처, 첩보원이요?”

라이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듯하자 대장은 부연 설명을 해줬다.

“흠, 감찰부에는 여러 부서가 있는데 그 중에는 각지에서 정보를 취합하여 보고하는 첩보원과 우리처럼 죄인을 추적하여 체포하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없애 버리는 일을 하는 청소부가 있지.”

맡은 임무만 다를 뿐,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차피 같은 감찰부 소속인데 왜 그렇게까지 첩보원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건지 라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라이의 모습에 대장은 또다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런 첩보원을 너도 만났었지. 바로 소피아 수녀 말이야. 사실 그녀가 트리스티 패거리의 움직임을 감시해서 상부에 보고하고 있었던 첩보원이었거든.”

대장의 말에 라이는 순간 망치로 머리통을 한대 맞은 것처럼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좋게 말하면 순진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멍청한 수녀가 감찰부 첩보원이었을 줄이야.

“노, 농담이시죠?”

“믿기 힘든 모양인데 나도 얼마 전에야 겨우 알았지. 그만큼 아주 교활한 계집이야. 순진한 척 시간을 끌면서 우리가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나, 얼토당토않은 이유를 대면서 우리와 합류한 것이나…….”

그 말에 라이는 다급히 의문을 토해냈다.

“잠깐만요. 대장님 말씀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좀 이상하잖아요. 소피아 수녀님이 트리스티 패거리의 정보를 캐내기 위해 거기에 잠입해 계셨던 거라면, 그들과 떨어져 나온 것으로 임무는 종료된 거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대장님과 함께 여기까지……?”

“네 말이 맞다. 그녀는 우리에게 직접 정보를 줄 수 없어. 그리고 추적이라면 그녀보다는 샘 쪽이 훨씬 뛰어나지. 그런데도 굳이 우리와 합류하는 길을 택했다면 그 이유가 뭐겠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떠올리기 힘들자 라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글쎄요…….”

그러자 옆에 있던 샘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것도 몰라?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서일 게 뻔하잖아. 아마 위쪽에서 지시를 받은 것이겠지.”

샘의 생뚱맞은 말에 라이는 더욱 이해하기 힘들었다.

“감시라고요? 대장님도 감찰부라면서요. 그런데 왜 같은 식구를 감시한다는 겁니까?”

라이의 질문에 씁쓸한 미소를 짓던 대장은 잠깐 입술을 질끈 깨문 뒤 씹어뱉듯 말을 토해냈다.

“난 은퇴할 때가 다 된 몸이야. 그리고 샘도 그건 마찬가지지. 너에게 이런 말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만…, 감찰부에서 나 같은 청소부를 그대로 은퇴시켜 줄 거라고 생각하나?”

“당연히 그래야죠. 그동안 열심히 충성을 다하신 거에 대한 대가이지 않습니까?”

“그래, 네 말대로 몇십 년을 충성을 다해 일을 했지. 그런데 우리 알카사스는 다른 나라하고 다른 점이 하나 있단다. 그게 뭐냐 하면, 원로원의 힘이 너무 강하다는 거야. 거의 왕권에 필적할 정도지. 우리 신세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야.”

“…….”

라이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그랬기에 아무 말 없이 그저 대장만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 네게 감찰부에서 하는 일이 뭔지 설명해 줬었지?”

“예.”

“다른 나라들처럼 왕권이 막강하다면야 비리를 저지른 단체나 사람을 국왕이 징계하면 끝나는 일이야. 하지만 그들이 국왕과 맞먹는 힘을 가진 원로원과 관계가 있다면? 그때는 감찰부에서 국왕에게 조사 결과를 보고해 봐야 아무런 소용이 없어. 그때는 어떻게 하느냐 하면…, 우리가 그것들을 비밀리에 처리해 버리는 거야. 이렇게.”

그러면서 대장은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휙 긋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런데 그런 사실이 원로원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

그 말은 라이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원로원에서 알면 큰일나겠네요. 안 그래도 왕권하고 맞먹는 힘을 가졌다고 했으니…….”

“네 말이 맞다. 증거만 있다만 그런 감찰부를 원로원에서 가만히 놔둘 리가 없지.”

여기까지 말한 대장은 침중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듯 물었다. 하지만 그건 라이에게 건넨 질문이라기보다는 현재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되씹어보려는 듯한 느낌이 더 강했다.

“이제 왜 감찰부에서 몇십 년 동안 충성을 다한 우리를 고이 은퇴시켜 주지 않고 죽이려고 하는지 이해를 하겠냐? 그리고 첩보원을 시켜 우리를 감시하게 했는지도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대장과 샘은 아무 말 없이 모닥불을 멍하니 바라봤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그들 사이를 짓눌렀다. 침중한 표정으로 불빛을 바라보던 대장은 힘겹게 다시 입을 열었다.

그것은 대장이 8년 전쯤에 하달된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당시 대장과 샘은 한적한 시골에서 농부로 위장한 채 암약하고 있는 적의 첩자를 처치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전까지의 사냥감들처럼 순식간에 해치워 버렸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이번 사냥감은 좀 달랐다. 샘이 장거리에서 은밀하게 저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위기 감지능력이라도 있었던 것인지 기습을 했는데도 성공을 못하고 오히려 반격을 당한 것이다.

곧이어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자칫 샘이 그자의 손에 목숨을 잃을 위기까지 겪어야 할 만큼 농부로 위장한 중년사내의 실력은 뛰어났었다. 이에 도주로를 차단하고 있던 대장까지 달려와 합류해서야 겨우 중년사내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었다.

마지막 명줄을 끊기 위해 다가간 대장에게 중년사내는 고통에 신음하면서도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충격적인 말을 해줬다. 그건 그 중년사내가 적국의 첩자도 아니었고, 죄인이거나 반역자도 아닌, 대장과 똑같은 감찰부의 사냥개였다는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그것도 이제는 은퇴한……. 감찰부에서는 그가 알고 있는 비밀이 혹여 원로원파의 귀로 흘러들어갈까 우려하여 없애 버리려 한 것이다. 죽은 자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는 법이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지금 대장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는 정보부가 해야 할 일들이었다. 원래 감찰부는 감시하고 조사한 결과를 국왕에게 보고만 할 뿐, 그에 대한 처리를 할 권한은 지니고 있지 못했으니까.

그런데 알카사스의 왕실에서는 멀쩡한 정보부를 놔두고 왜 감찰부까지 킬러를 운용할 수 있도록 허용했을까? 그 이유는 막강한 힘을 지닌 원로원 때문이었다.

알카사스 마법사들의 대다수를 회원으로 거느리고 있는 마법사 길드를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한, 정보부에서 하는 일들은 모두 다 속속들이 원로원의 귀에 들어가고 있다고 봐야 했다. 그렇기에 왕실에서는 자신들이 은밀히 움직일 수 있는 정보단체가 필요했고, 그래서 만들어낸 해답이 감찰부의 보강이었던 것이다. 감찰부는 국왕 직속의 기관이었으니까.

대장의 설명을 듣고 난 라이는 놀라움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리고 대장과 샘이 감찰부를 벗어나 타국으로의 망명을 원하고 있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샘도 나도 이제 슬슬 은퇴할 나이가 되어가지. 결국 임무를 수행하기 힘들어지면 8년 전 그 중년사내처럼 누군가의 손에 의해 싸늘한 시체가 될 걸세. 그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죽음의 길로 달려갈 수는 없지 않겠나. 그래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지. 이번 임무는 우리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기회야. 반역자들을 추격한다는 핑계로 산맥을 뚫고 지나가다 몬스터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처럼 위장할 수도 있고, 잘만하면 국외로 도주할 수도 있으니까. 게다가 감찰부는 국내에서야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지만 타국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는 없거든.”

“그럼 국경만 넘으면 살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샘이 침울한 표정으로 대답을 해줬다.

“젠장! 겨우 한숨 돌리는 정도지, 그걸로 안심할 수는 없다. 그동안 우리가 감찰부에서 행한 숱한 임무들 때문이라도 놈들이 우릴 가만 놔두겠냐? 당연히 우리의 흔적을 쫓아 암살자를 보내거나 뭔 수를 쓰겠지. 어쩌면 평생 쫓기며 살아야 할지도 몰라.”

라이는 두 사람이 이런 얘기까지 왜 자신에게 해 주는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다 뭘 떠올렸는지 급격히 처연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저한테 그런 걸 얘기해 주는 이유가 뭐죠? 이제 저를 죽이시려는 건가요?”

샘이 힐끗 대장을 쳐다봤지만 그는 그저 묵묵히 모닥불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다.

“저는 한낱 도망노예라구요. 대장님과 샘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감찰부에 고발할 수도, 할 생각도 없어요. 게다가 저 역시 용병대에서 보내올 추격자를 피해 타국으로 도망쳐야 할 판이라구요. 전 그저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신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단 말입니다.”

라이의 울먹거리는 말투에 대장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휴우, 죽이지 않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단지 우리 사정이 이렇다는 걸 그저 말해 주고 싶었을 뿐이니까.”

이때, 샘이 슬쩍 활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야기를 하던 중 추격자에 대한 말이 나온 뒤부터 그의 얼굴에는 초조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어느 정도 쉬었으니 슬슬 출발하시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주위는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좍좍 퍼붓고 있는 중이다. 대장은 밤하늘을 올려보다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금 움직이기에는 너무 상황이 안 좋아. 차라리 푹 쉰 뒤 내일 아침에 움직이는 게…….”

하지만 샘은 대장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불안한 표정으로 폭우가 쏟아지는 밤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거칠게 반박했다.

“이러다 그 망할 년이 세브롱 요새로 달려가서 지원요청이라도 하면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폭우를 뚫고 가려면 좀 힘들기는 하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산맥을 넘는 게 최선입니다.”

알카사스는 크라레스 제국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몰몬트 산맥 주변에 대규모 군대를 주둔시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광활한 산맥에 대한 순찰은 필요했고, 그 필요에 의해 세브롱 요새에 1개 분대급의 기사단 분견대(分遣隊)를 주둔시켜 두고 있었다.

조급해 하는 샘의 심정을 다 안다는 듯 대장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게. 세브롱 요새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단은 원로원파야. 수녀가 머리통에 망치라도 맞지 않고서야 거기에 찾아가서 도움을 청할 리가 없지.”

“하지만 감찰부의 이름으로 협조를 요청한다면, 시시콜콜 이유를 말하지 않아도 그래듀에이트 한두 명 정도 지원받는 건 별로 어렵지 않을 거 아닙니까?”

이에 대장은 콧방귀를 뀌며 대꾸했다.

“흥, 자네는 기사단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군. 비록 변방에 처박혀있는 기사단 분견대라고는 하지만 감찰부라는 이름에 덜덜 떨 만큼 나약한 곳이 아니야. 게다가 첩보원 주제에 제대로 된 감찰부 신분증을 몸에 지니고 있을 리도 없지 않겠나. 자신의 신분도 제대로 증명할 수 없는 수녀의 말 몇 마디에 그래듀에이트들이 움직일 거라고 생각하나? 오히려 감찰부를 사칭한 죄로 그녀를 지하감옥에 처넣어 버리겠지. 그런 상황에서는 감찰부에서도 어떻게 할 방법도 없을 테고 말이야.”

“신분을 밝히지 않고, 그저 마법통신을 쓰게 해달라고 요청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감찰부 쪽과 채널이 연결되기만 하면…….”

처음에는 격정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토로하기 시작했지만 뭘 느꼈는지 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기만 했다. 대장은 그런 샘의 모습을 바라보다 피식 웃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 생각대로야. 그러다 자칫 우리들에 대한 정보가 원로원으로 넘어갈 수도 있다는 점이지. 그렇기에 그녀가 세브롱 요새로 가서 지원을 요청하거나, 마법통신을 하지는 못할 거라는 걸세.”

샘도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불안감이 가시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대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부연설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감찰부 소속인 우리들이 배신을 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세브롱에 주둔하고 있는 기사들이 어떻게 반응할까? 아마 우리를 붙잡더라도 절대로 감찰부에 넘겨주진 않을 거야. 너무 반항이 심해서 사살할 수밖에 없었다고 둘러댄 뒤, 곧바로 원로원 쪽에 넘겨줄 테지.”

“아, 아무리 그래도 감찰부를 상대로 그런 거짓말을…….”

“그동안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우리가 감찰부 소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거라는 데 내 목을 걸어도 좋네.”

은퇴한 킬러들을 감찰부에서 죽이는 이유가 뭐겠는가. 그들이 그동안 수행했던 숱한 임무들 중에는 차마 세상에 공표하기 힘든 추악한 비리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감찰부의 비리, 아니 왕실의 비리가 왕권을 위협하고 있는 원로원의 귀에 들어가는 것만큼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했다. 그런 감찰부였기에 두 사람을 잡는답시고 원로원파에 속해있는 세브롱의 기사단에 협조 요청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샘도 납득이 되는지 더 이상의 반론은 제기하지 않았다.

“나 같은 청소부도 이런 사실을 아는데 첩보 교육을 받은 수녀가 그걸 모를까. 그녀는 절대로 세브롱 요새로는 가지 않을 거야. 그러니 오늘은 마음 편히 푹 쉬고, 내일 날이 밝은 후에 출발하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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