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4화 (800/930)

숲속의 유령, 트롤

다음날 아침, 대장은 샘을 앞세워 올리버 트리스티 일행이 지나간 흔적을 뒤따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새벽녘에 비는 그쳤지만, 길은 한발자국도 떼기 힘들 만큼 질척거렸다. 게다가 자칫 몸의 균형을 잃기라도 하면 흙탕물에 나뒹굴 만큼 엄청 미끄러웠다. 그렇다보니 평소보다 이동속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늦은 오후쯤 되었을 때 흔적을 살피며 맨 앞에서 걸어가던 샘의 발길이 우뚝 멈췄다. 그는 땅바닥을 가리키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트롤입니다.”

샘의 말에 라이는 온몸에 소름이 쫙 끼치는 걸 느꼈다. 트롤의 무서움을 직접 경험했었기 때문이다.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샘이 가리킨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아주 커다란 발자국들을. 비가 온 다음이라 땅바닥이 물렁했기에 발자국이 아주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하지만 심각한 표정의 샘과 달리 대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런 깊은 산맥이라면 트롤 몇 마리쯤 사는 게 당연한 건데, 왜 그렇게 호들갑이야?”

“그게 아니라 발자국 방향이 문제죠. 아무래도 놈들을 뒤따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 발자국을 살펴보던 대장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우연히 방향이 겹친 게 아닐까? 놈들과는 아직 3일 정도의 거리차가 있다고 했었잖아.”

“트롤의 능력을 너무 얕잡아 보시는 거 아닙니까?”

트롤이 마음만 먹으면 그 정도 거리쯤은 하룻저녁이라도 주파가 가능했다.

“겨우 세 명입니다. 무장을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트롤이 그런 것쯤 신경이나 쓰겠습니까. 이게 웬 떡이냐 하며 군침을 흘리면서 쫓아가고 있는 거겠죠.”

샘의 말에 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길안내 좀 편하게 받는가 싶었더니…….”

대장과 샘은 상부로부터 올리버 트리스티 일행을 처리하라는 급작스런 명령을 받고 이리로 달려왔다. 그러니 제대로 된 준비가 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상부에서는 소피아 수녀라는 첩자가 있었기에, 수월하게 임무를 처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지도 따위의 부가적인 자료들을 지원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어느 쪽으로 도망치고 있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기에 올리버 트리스티 일행이 트롤에 의해 전멸당한다고 해서 산맥을 넘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길을 모르는 만큼, 고생을 몇 갑절은 더 해야 하리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시간 여유는?”

“그다지 많지 없습니다. 숲의 유령이라 불리듯, 숲속에서 트롤의 이동속도는 경이적일 정도니까요. 어쩌면 오늘 밤에 놈들을 덮칠지도 모르죠.”

“허, 참. 그렇다고 트롤의 이동 속도를 우리가 따라잡는다는 건 아예 불가능할 테니, 이거 난감하군.”

어찌해야 할지 고민을 하고 있는 대장에게 샘은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뭘 그렇게 어렵게 고민하십니까?”

“좋은 방법이라도 있어?”

“다리 아프게 우리가 왜 쫓아갑니까? 차라리 놈을 우리 쪽으로 끌어들이면 되죠.”

라이가 그게 무슨 소린지 어리둥절해 하고 있을 때 대장은 금방 이해를 했는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갑자기 허공을 향해 악을 쓰기 시작했다.

“야이, 빌어 처먹을 트롤 새끼야! 이거나 먹어랏!!”

대장이 내지른 웅혼한 외침은 메아리를 남기며 멀리멀리 퍼져나갔다. 대장이 갑자기 허공을 향해 감자바위를 먹이며 괴성을 지르자마자 라이는 기겁해서 소리쳤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트롤이 가까이에 있다는데 소리를 지르시다니…….”

대장은 패닉상태에 빠져있는 라이의 표정을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며 대답했다.

“뭐가 어때서, 어차피 놈이 들으라고 그런 건데.”

“미쳤어. 미쳤어…….”

얼굴에 핏기를 잃고 허둥거리고 있는 라이를 대장은 흥미롭다는 듯 바라봤다. 대장은 확신했다. 녀석은 어딘가에서 트롤을 만나 아주 뜨거운 맛을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을.

‘정말 특이한 놈이야.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많은 경험을 한 것 같거든. 그러기도 쉬운 게 아닌데 말이지.’

대장은 당황해 하는 라이에게 자신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일부러 말해 주지 않았다. 라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으니까.

“네 표정을 보니 트롤에게 뜨거운 맛을 봤던 적이 있는 모양이구나?”

“뭐…, 개고생을 한 적이 있긴 있었죠.”

“그때 얘기 좀 해봐.”

트롤이 올까 두려워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초조해 하는 라이와 달리 대장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샘의 뒤를 따르며 라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사방에 짙은 어둠이 깔리며 해가 지기 시작했다.

앞서 가던 샘이 나무가 몇 그루 없는 평탄한 곳을 발견하자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늘은 여기에서 야숙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두근, 두근, 두근…….

해질 무렵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하는 게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는다. 대장이 질러댄 고성을 트롤이 못 들었을 리 없다고 라이는 판단했다. 그렇다면 놈은 반드시 이리로 올 거다. 그것도 오늘 밤에!

라이는 슬그머니 모닥불 주위의 나무들을 올려다봤다.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자는 게 좋지 않을까?’

참기 힘들 정도로 매혹적인 생각이었지만, 라이는 애써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래도 그건 정답이 아닌 것 같았다. 트롤이 얼마나 나무를 잘 타는지는 이미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모닥불 옆에 모두와 함께 있는 게 보다 안전하리라.

라이는 슬쩍 모닥불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불 옆에 자리를 잡고 반쯤 드러누워 있는 대장의 모습이 보였다. 나른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하고 있다. 트롤의 습격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듯 천하태평이다.

‘설마…, 트롤도 오크처럼 불을 겁내지 않는 건 아니겠지?’

이번에는 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반쯤 누워 있는 자세는 대장과 비슷했지만 한결 긴장감 어린 표정이다. 불빛을 바라보고 있는 눈빛이 매섭게 느껴진다. 언제나 느끼는 것이지만 인상만 봤을 때는 샘 쪽이 대장보다 훨씬 높은 사람처럼 보인다. 두툼한 눈썹, 사나워 보이는 매부리코, 덥수룩한 콧수염. 그리고 자신감 있어 보이는 표정까지도…….

그에 비해 대장은 마음씨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순한 인상이다. 돈을 빌려주고도 돈 달라는 소리를 못하고 쩔쩔매며 속만 태우고 있는 그런 순둥이. 어떤 때는 아주 무능력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그 탓에 라이는 처음에 그를 과소평가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하지만 함께 지내다 보니 생긴 것과 성격이나 능력이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저렇게 순하게 생긴 사람이 검술 실력도 좋았고, 두뇌 회전도 재빨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안심이 된다는 말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의 첫 여행을 함께했었던 백작의 부하들도 나름 실력자들이었지만, 트롤 한 마리를 당해 내지 못해서 이리저리 쫓겨 다니지 않았던가.

‘젠장, 피해 다녀도 시원찮을 판에 고함을 질러서 트롤을 불러들인다고?’

트롤이 얼마나 무서운지조차 모르고 있다니. 이대로 몰래 빠져나가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라이는 내심 고개를 가로저었다. 오히려 그러다 트롤의 뱃속으로 한끼 식사감이 될 확률이 높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뭉쳐 있어도 살아남을까 말까 한 상황인데, 혼자 떨어져 나갈 생각을 하다니.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밤은 점점 깊어만 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샘이 전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평상시 같았으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어딘가로 슬그머니 사라졌을 샘인데 말이다.

‘샘도 아는 거야. 트롤이 올 거라는 것을!’

그 이후부터 라이는 샘을 관찰하는 것에 신경을 집중했다. 그가 하는 작은 움직임까지도. 화살 한 발과 함께 활을 품에 안고 있는 걸 보면, 유사시에 저걸 쏠 생각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트롤이 겨우 화살 한 발 맞는다고 꿈쩍이나 할까? 트롤이 얼마나 재생력이 뛰어난데…….

‘혹시…, 독?’

독화살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트롤이 경이적인 해독능력까지 지니고 있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으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덧 꽤 오랜 시간이 흘러있었다. 트롤에 대한 공포감에 잠은 이미 멀리 달아나 버린 상태.

라이는 문득, 지금 이 순간이 그가 오랫동안 꿈꿔왔던 상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대장도 자고 있고, 샘도 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슬그머니 도끼를 들어 저 둘의 머리통을 쪼개 놓기만 하면 끝인 것이다.

만약 지금 트롤이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그런 상황만 아니었다면, 라이는 과감하게 행동으로 옮겨 버렸으리라.

‘젠장, 재수가 없으려니. 기회가 와도 꼭 이런 지랄 같은 상황에 오다니…….’

이때였다. 자는 줄 알았던 대장이 벌떡 일어선 것은. 대장은 자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대장의 머리통을 도끼로 까버리겠다는 자신의 속마음이 들킨 것 같아 라이는 크게 당황했다.

“왜, 갑자기……?”

하지만 대장이 노려보고 있는 건 자신이 아니었다. 라이가 누워 있는 뒤쪽 숲이었다. 그리고 대장의 손에는 언제 뽑아 들었는지 시퍼런 장검이 쥐어져 있었다.

“크르르르…….”

트롤은 낮은 소리로 목을 울렸다. 기분이 좋을 때 내는 울림이다.

‘어떤 놈이 맛있을까?’

모닥불 가에 자리 잡고 있는 호비트의 숫자는 셋. 사위는 짙은 어둠에 잠겨 있고, 쌍방 간의 거리는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트롤의 눈에는 호비트들의 얼굴 주름까지 셀 수 있을 정도로 확연히 보였다.

호비트 사냥을 한두 번 해 보는 것도 아닌 트롤이었기에, 그 중 가장 만만해 보이는 놈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왼쪽에 누워 있는 어린 놈! 고기도 연한 것이 입속에 넣으면 살살 녹을 것만 같았고, 더군다나 녀석에게서는 신경 쓰이는 쇠 냄새가 적게 난다.

트롤은 사냥감들의 냄새를 다시 한 번 음미한 후에 목표와의 거리를 천천히 좁혀 나갔다. 바람을 타고 향기로운 냄새가 솔솔 풍겨온다.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뚝뚝 흘리며 입맛을 다시는 트롤.

조심조심 살금살금 움직이는데다가 어둠까지 짙어 호비트들은 자신의 접근을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하고 있다. 은밀한 행동이 힘들다고 생각될 때까지 사냥감과의 거리를 최대한 줄였다고 판단되는 순간, 트롤은 몸을 날렸다. 유연한 그의 몸은 몇 발자국 떼기도 전에 전속력까지 가속할 수 있었다. 사냥감이 자신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자신이 내리찍은 몽둥이에 골통이 빠개져버린 후가 되리라.

하지만 그 순간, 트롤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갑자기 호비트 한 마리가 벌떡 일어서는 게 아닌가. 그놈은 언제 빼들었는지 번쩍거리는 긴 쇠막대까지 들고 있다. 자신의 접근을 용케도 눈치챈 모양이다. 순간, 트롤의 입가에 비웃음이 맺혔다. 저따위 얄팍한 쇠붙이 따위로는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없다는 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기에…….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놈을 무시하고 예정대로 처음 찍은 사냥감을 공격하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사냥감의 대가리를 박살낸 뒤 그 시체를 들고 나올 동안 저놈의 공격을 그대로 허용해야만 할 게 아니겠는가. 어지간한 상처 따위 금방 재생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다. 트롤은 어쩔 수 없이 공격 목표를 바꾸기로 했다. 먼저 먹나 나중에 먹나의 차이일 뿐, 어차피 저 세 마리의 호비트들은 모두 다 자신의 뱃속으로 들어가게 될 테니까.

워낙 거리가 가까웠던 탓에 트롤이 땅바닥을 두어 번 박찼을 뿐인데도, 이미 목표물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다. 트롤이 흉포한 울음을 흘리며 커다란 몽둥이로 호비트의 대갈통을 내리찍으려는 그 순간, 트롤의 눈앞에서 은빛 섬광이 터져 나왔다.

“크아악!!”

바로 그때였다. 멍하니 대장을 바라보고 있던 라이의 머리 위로 뭔가가 휙 하고 날아간 것은. 그리고 그와 동시에 물을 바가지로 흩뿌린 것 같이 축축한 뭔가가 그에게로 뿜어져 날아왔다. 짙은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 것은 그 후의 일이다.

“으, 으아악! 이, 이게 뭐야?”

라이의 머리 위로 날아간 것은 커다란 몽둥이를 꽉 움켜쥐고 있는 트롤의 팔이었다. 거기에 얻어맞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긴 했지만, 잘린 팔에서 뿜어져 나온 핏물을 고스란히 뒤집어 쓸 줄이야.

“우엑, 갑자기 이, 이게 뭐야……?”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서던 라이는 일순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머리통을 잃어버린 트롤의 몸이 몇 발자국 걸어가는 듯 하더니 털썩 땅바닥에 나뒹구는 게 아닌가.

그 광경을 본 라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설마, 저 순해 빠진 인상의 대장이 혼자서 트롤을 해치워 버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으니까. 게다가 드잡이질도 아닌 단칼에 목을 베어 버리지 않았는가. 저런 실력자를 몰라보고 여차하면 도끼로 찍어버리고 튈 생각을 했다니. 라이는 일순 온몸에 소름이 짝 끼치는 것을 느꼈다.

대장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장검에 묻은 피를 깔끔하게 닦아 검집에 집어넣고는 라이에게 물었다.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다친 데는 없지만, 냄새가 정말 지독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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