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06화 (802/930)

무조건 잡아 와!

몰몬트 산맥에 나 있는 길들 중에서 정식 무역로로 쓰이고 있는 것은 3개였는데 각기 쟈크 국가연합, 엔테미어 공국, 트루비아 왕국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서 엔테미어 공국으로 연결되어 있는 무역로가 가장 잘 정비되어 있었고, 가장 많은 화물이 운송되고 있었다.

이런 전략적인 요충지에 알카사스에서 요새를 건설해 놓지 않았을 리가 없다. 세브롱 요새는 유사시 1개 사단급의 병력이 주둔할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요새였고, 몰몬트 산맥에 배치된 유일한 기사단 전력인 호크 기사단 분견대가 배치되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세브롱 요새가 가지는 중요도는 엄청나게 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부에서조차 이 요새를 산적이나 몬스터 소탕의 전진기지 그 이상으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왜냐하면 크라레스는 이쪽으로 쳐들어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고, 그 외에 다른 고만고만한 나라들이야 알카사스의 눈치를 살피느라 바쁜 상태다. 그걸 잘 아는 국왕이기에 이곳 요새를 원로원 소속인 호크 기사단의 관할 아래에 놔둔 것이다.

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곳이라 세금을 두둑하게 챙길 수 있었기에 영주들은 모두들 군침을 흘리는 곳이었지만, 기사들은 이곳으로 전출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옷을 벗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저주받은 부임지였다.

면적에 비해 기사의 숫자가 적어 할당되는 임무는 엄청나게 많았지만, 거의 대다수가 잡다한 일들뿐인지라 전공을 세울 기회는 눈 씻고도 찾기 힘든 곳이었다. 그렇기에 상관에게 찍힌 골통들이나 문제가 많은 기사들을 좌천시키는 장소로 애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이곳의 분견대장인 스트론도 그런 케이스였다.

그렇기에 막강한 힘을 지닌 마법사 길드의 동부지구장이 통신 수정구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 분견대장과의 면담을 요청한 것은 세브롱 요새에 분견대가 배치된 이래 최초, 최대의 사건이었다.

“크, 큰일났습니다, 대장님.”

책상 위에 두 발을 올려놓고 늘어지게 자고 있던 스트론은 허둥대며 자신을 깨우는 마법사를 보며 짜증스럽다는 듯 소리쳤다.

“이런 빌어먹을! 무슨 일인데 깨워?”

“빨리 토, 통신실로 가셔야겠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는 마법사를 향해 스트론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좀 조용히 얘기해라. 골이 울린다. 젠장, 어제 너무 마셨어…….”

머리를 싸잡고 투덜거리던 스트론은 마법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의 입에서는 짙은 술냄새가 풀풀 풍겨나오고 있었다.

“통신실? 통신실에는 왜?”

“도, 동부지구장님께서 대장님을 찾으십니다.”

동부지구장? 직책만으로 본다면 어딘가의 동부지구를 책임지는 놈인 모양이다. 하지만 스트론의 기억에는 전혀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아마 어딘가의 상인연합에 소속된 놈이리라. 낮잠을 방해받은 탓인지 스트론은 짜증을 벌컥 냈다.

“젠장, 난 그딴 놈 모른단 말이야! 에효, 이런 곳에 처박혀 있다 보니 별 시답지 않은 놈들까지 날 귀찮게 하네.”

“저, 그게. 마법사 길드의 동부지구장님이신데요.”

스트론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술이 번쩍 깨 버린다. 마법사 길드의 동부지구장이라면 길드 내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엄청난 지위에 있는 거물이었으니까.

“뭐야! 그럼 진작에 그렇다고 말해야 할 거 아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스트론은 곧바로 통신실을 향해 허둥지둥 달려갔다. 하지만, 부하들 앞에서 체면이 있지, 그는 통신실 바로 앞에서는 속도를 줄여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대장님, 오셨습니까.”

스트론은 별것 아니라는 듯 평온한 어조로 마법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말했다.

“동부지구장이 나를 찾는다고?”

“예. 두 번째 수정구입니다.”

수정구에는 60대 초반 정도의 깐깐해 보이는 노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동부지구장쯤 되는 거물이 자신을 보자고 하는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시킬 일이 있을 것이라는 건 닳고 닳은 스트론으로서는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스트론은 자신이 신뢰하는 선임 마법사에게 눈짓을 하며 지시했다.

“자네가 통신을 주관해 주게.”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실내에 있는 다른 마법사들에게 명령했다. 마치 자신이 지구장과 동급이라도 된다는 듯한 말투다.

“나는 지구장과 은밀한 얘기를 나눠야겠으니 자네들은 잠시 밖에 나가 있게.”

당직 마법사들을 밖으로 전부 내보낸 후, 스트론은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수정구 앞에 섰다. 방금 전 부하들에게 보여줬던 근엄한 모습은 그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대신 그의 얼굴에는 아부성 짙은 미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선임 마법사는 이미 그런 그의 모습을 알고 있었던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대신 눈길을 옆으로 슬쩍 돌렸을 뿐이다.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동부지구장님.”

「허허, 그쪽에 좀 골치 아픈 일이 생겨서 말이야. 그런데 자네가 무척 유능하다는 소리에 이리 통신을 넣게 되었다네.」

“어떤 일 때문에 그러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만족하실 수 있도록 성심을 다하겠습니다.”

「역시 듣던 대로 꽤나 유능한 친구로군. 그런데 이번 일은 철저히 비밀을 요하는 일인데, 할 수 있겠나?」

“걱정하지 마십시오. 혹시나 해서 다른 마법사들은 전부 밖으로 내보냈고, 지금 통신을 주관하고 있는 마법사는 제가 가장 신뢰하는 부하니까요.”

「역시 하나를 보면 열을 알 수 있다고, 일처리가 마음에 드는군. 이런 유능한 친구가 왜 그런 한지에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어.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내 다른 곳으로 발령날 수 있도록 힘을 좀 써 주겠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지구장님. 시키실 일이 있다면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완벽하게 보안을 유지해 지구장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기사단과 길드, 군대로 친다면 육군과 해군만큼이나 거리가 있는 집단이다. 그런데도 스트론이 마법사 길드의 동부지구장에게 이렇게 납작 고개를 수그리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두 집단 다 원로원의 휘하에 속해 있다. 저런 거물이 손을 써 준다면 이 시골구석에서 벗어나는 것도 꿈은 아닌 것이다. 스트론이 체면불구하고 꼬리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동부지구장은 만족스런 미소를 보냈다. 부하의 조언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는 스트론에게 2시간 전에 우연히 입수하게 된 놀라운 정보에 대해 말해줬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그 자들을 붙잡아서 나에게 보내 줄 수 있겠나?」

비록 이런 곳에 좌천되어 있다고는 하나 분견대장을 맡을 정도면 머리가 둔해서는 힘들다. 스트론은 동부지구장이 말해 준 정보의 가치를 곧바로 알아차리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이 정보가 진짜라면 동부지구장쯤 되는 거물이 직접 자신을 찾은 것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그 말은 결국 자신에게도 엄청난 기회라는 말이었다. 만약 이 일만 완벽히 해낸다면 마법사 길드의 동부지구장이라는 엄청난 거물을 뒷배경으로 지니게 되는 것이었으니까.

스트론은 잔뜩 긴장한 어조로 대답했다.

“맡겨만 주십쇼, 지구장님.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 내 이 보답은 충분히 하도록 하지. 그런데…….」

여기까지 말한 지구장의 얼굴이 돌연 수정구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목소리를 나직하게 깔며 속삭이듯 말했다.

「명심하게. 만약 이 일이 외부로 흘러나가기라도 한다면 자넨 지옥을 경험하게 될 게야. 알겠나?」

“거, 걱정하지 마십시오. 쥐도 새도 모르게 은밀하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잘 부탁하네.」

수정구에서 동부지구장의 모습이 사라지자, 옆에 서있던 선임 마법사가 걱정스럽다는 표정으로 급히 물었다.

“이러다 혹시 그자들을 붙잡는 데 실패라도 하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크크, 괜찮아. 뭔가를 얻으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지. 게다가 저런 거물이 뒷배가 되어 준다는데 내가 무슨 짓인들 못하겠나.”

“하지만 너무 위험합니다. 감찰부에서 운영하는 킬러들은 보통 2인 1조로 움직인다고 들었습니다. 하나는 검객, 또 하나는 레인저죠. 산속에 숨어들어간 레인저를 잡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는 대장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게다가 이런 일을 길드 본부가 아닌 동부지구장이 직접 부탁을 해 왔다는 건…….”

“알아, 알아. 길드 내 권력 싸움에 한방에 훅 갈 수도 있다는 걸. 그러니까 성공하면 좋은 거고, 만약 실패한다고 해도 동부지구장의 이런 행위를 길드 본부에 꼰지르면 그것도 제법 두둑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게 아니겠나. 그렇게 되면 동부지구장이 나한테 복수를 하고 싶어도 할 수조차 없겠지. 동부지구장에서 쫓겨날 테니까, 흐흐흐…….”

스트론이 이런 분야에는 워낙 닳고 닳은 인물이었기에 선임 마법사는 그제야 환히 웃으며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대장님, 공로를 인정받아 영전을 하시게 되거든 저를 잊으시면 절대로 안 됩니다.”

“걱정 말게. 내가 마누라를 잊어버리는 일은 있어도 자네를 잊는 일은 결단코 없을 걸세.”

이때, 갑자기 수정구가 점멸하는 게 보였다. 누군가가 통신을 보내오고 있는 것이다. 선임 마법사는 수정구 위에 손을 쓱 올려 채널을 열었다. 채널을 열자 상대편의 모습이 수정구에 드러났다. 지금껏 본적이 없는 시커먼 로브를 입고 있는 음침한 분위기의 인물이었다.

“여기는 호크 기사단 몰몬트 분견대입니다. 그쪽의 소속을 밝혀 주십시오.”

「이쪽은 감찰부요.」

감찰부라는 말에 선임 마법사는 숨이 턱 막혔다. 하지만 그는 최선을 다해 긴장한 티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감찰부…, 라고요? 감찰부에서 무슨 일로…….”

「여섯 시간 정도 후에 귀 요새의 이동마법진을 쓰고 싶소. 가능하겠소?」

알카사스 내에는 여러 대도시에 건설되어 있는 마법탑에서 공간이동을 방해하는 역장을 방출하고 있었다. 초대형 마법진을 통해 얻어진 방대한 마나를 이용할 수 있었기에 역장의 효력은 반경 수십 킬로미터에 걸쳐 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간이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각 도시에 건설되어 있는 ‘공간이동 문’을 이용하면 된다. 공간이동 문의 경우 도시에서 생산된 방대한 마나를 이용할 수 있기에 출력도 좋았고, 또 각 마법탑에서 방출하고 있는 역장들의 간섭에 대해 정밀하게 계산하여 보정한 뒤에 설계했기에 안전한 공간이동이 가능했다.

감찰부에서 ‘공간이동 문’의 사용 가능 시간을 물어보는 이유야 뻔했다. 바로 배신자들을 척살할 부대를 보내겠다는 뜻이리라. 이에 생각이 미친 선임 마법사는 급히 잔머리를 굴려 대책을 강구했다.

“안타깝습니다만…, 한동안은 마법진을 사용하실 수 없을 듯합니다.”

「뭣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는 거요?」

“하아, 그게 몇몇 마법탑에서 방출되는 역장의 수치계산에 문제가 생겨서 지금 보정하고 있는 중입니다. 작업이 아직 완전하게 끝나지 않은 관계로 조금 위험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그쪽이 전적으로 책임지실 용의가 있으시다면 언제든지 사용하십시오. 수리가 끝날 때까지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을 테니까요.”

공간이동이 위험하다는 것만큼 커다란 공포심을 지니게 하는 말도 드물다. 공간이동의 실패는 곧 죽음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었으니까. 특히 그 위험성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그 충격이 더욱 컸을 것이다. 상대는 대답도 하지 않고 통신을 끊어버렸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스트론은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이죽거렸다.

“하여간에 잔머리 하나는 끝내준단 말이야. 그나저나 이로써 동부지구장이 얻은 정보가 가짜가 아니라는 게 확인이 된 셈이로군.”

선임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흐흐, 마법사가 아무나 되는 줄 아십니까? 어지간한 머리로는 꿈도 꾸기 힘든 직업이 마법사입니다. 그나저나 감찰부에서 좀 더 은밀하게 움직일 줄 알았는데, 이렇게까지 대놓고 마법진을 쓰겠다고 요청해 올 줄이야…….”

“그만큼 똥줄이 빠질 정도로 급하다는 소리겠지. 바꿔 말하면 우리가 잡으려는 놈들의 가치가 크다는 말일 테고.”

“어쨌거나 빨리 움직이셔야겠습니다. 역장을 핑계로 이곳 마법진을 쓰지 못하게 했다고 해도, 감찰부의 발목을 잡을 수 있는 건 하루나 이틀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까요.”

잠시 머리를 굴려 대원들을 생각해 보던 스트론은 선임 마법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일단 도튼을 찾아 내 방으로 데리고 오게. 그리고 자네는 다른 마법사들의 입단속을 확실하게 시키고. 알겠나?”

“염려 놓으십시오. 잘 처리해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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