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론이 자신의 집무실에 돌아온 후 십여 분쯤 지났을까? 밖에서 가볍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이 열리며 선임 마법사와 함께 건장한 기사 한 명이 실내로 들어왔다. 허리에 차고 있는 검 한자루 외에는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았지만, 용맹스런 기운이 물씬 풍기는 야성미 넘치는 기사였다. 사실 그건 좋게 표현했을 때 얘기고, 나쁘게 표현한다면 단순무식해 보이는 인물이라는 얘기다.
“대장님, 찾으셨습니까?”
“용기사들 중에서 자네가 길눈이 제일 밝다고 알고 있기에 불렀다네.”
스트론은 동부지구장에게서 들었던 정보들 중에서 추적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만 적당히 추려서 이야기해 줬다. 그 자료는 소피아 수녀가 추격대에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머리를 쥐어짜 최대한 상세하게 작성해 놓은 자료였다. 일행이 마지막으로 들렀던 마을 이름, 그곳에서 어떤 방향으로 출발해 며칠 정도를 걸었고, 도중에 본 몇몇 특징 있는 장소들의 설명들까지.
광활한 산맥이었지만, 그 일대 지리에 밝은 도튼이었기에 그 정도만 해도 충분했다.
“어디를 말씀하시는지는 대충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그건 왜……?”
“그쪽으로 가 보면 사내 3명으로 이뤄진 파티를 찾을 수 있을 걸세. 둘은 좀 나이가 많고, 하나는 어리다고 하더군.”
“3명으로 이뤄진 파티라구요? 뭐, 그들에게 전달하실 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도튼의 질문에 스트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다.
“아니, 그놈들을 잡아 오라는 걸세.”
그 말에 도튼은 난색을 표했다.
“쉽지 않은 일인데요. 잡아 오라고 하는 걸 보니 그들이 도망치는 중일 텐데, 우리가 상공에 나타나기만 해도 곧바로 몸을 숨길 게 뻔한데…….”
도튼의 부정적인 반응에 스트론은 인상을 왈칵 찡그리며 소리쳤다.
“숲 속을 걸어가면서 하늘을 날고 있는 와이번을 발견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그리고 재수가 없어서 그 놈들이 와이번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별 상관없을 거야. 정기적인 순찰을 돌고 있는 걸로 생각할 테니까 말이야.”
스트론은 그들이 감찰부에서 쫓아오는 것에 대한 대비만을 할 뿐, 이곳의 기사단이 자신들을 찾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들도 감찰부의 첩자인 수녀가 원로원파인 이곳 기사단에 지원을 요청할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앓는 소리 그만하고 어서 놈들을 잡아 와! 자네에게 말해 준 건 3일 전의 정보야. 놈들이 이동하고 있는 속도와 방향을 생각한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을지는 대충 감이 오지? 그 일대를 샅샅이 뒤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낼 수 있을 거야. 산맥이라는 게 광활해 보여도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은 게 아니니까.”
“그건 대장님의 말씀이 전적으로 옳으십니다만…….”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던 도튼은 혼자서는 무리라는 생각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시다면 수색 작업에 몇 명 더 지원해 주십쇼. 혼자서 그 넓은 면적을 샅샅이 훑는다는 것도 쉽지 않고, 설사 발견했다 치더라도 놈들을 잡아 실어 나르려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비록 제 귀염둥이가 힘이 좋긴 합니다만, 건장한 사내를 셋씩이나 실고 오는 건 좀…….”
휘하에 있는 용기사들을 몽땅 다 투입하는 게 훨씬 더 효율적이라는 것을 스트론이 몰라서 도튼만 불러 은밀히 지시를 내리고 있는 게 아니다. 동부지구장이 특별히 비밀 엄수를 부탁한 일이다. 가급적이면 아는 사람이 적은 게 좋은 것이다. 더군다나 와이번의 경우 워낙 덩치가 커서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것을 요새 안에 거주하고 있는 수많은 눈들이 목격하게 된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요새 내의 모든 와이번들이 일제히 날아오른다면 사람들의 쓸데없는 관심을 살 수 있다.
“놈들 중에서 둘만 잡아 오면 돼. 어린놈은 필요 없고 나이 많은 두 놈만. 참, 그 대신 반드시 살려서 데리고 오도록. 말만 할 수 있다면 병신이 되도 상관없으니까. 알겠나!”
“쩝, 놈들이 뭔 죄를 지어서 도망치는 겁니까?”
“그건 자네가 알 필요 없고, 나이가 많은 둘 중에 한 놈은 전직 레인저라고 하니 참고하도록 하게.”
“나머지 두 놈은요?”
“나도 잘 몰라. 명심할 거는 지금 이 임무가 극비라는 사실이야. 쓸데없이 주둥아리를 나불거렸다가는 어떻게 될지 잘 알지?”
그 말에 도튼은 인상을 왈칵 썼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 ✻ ✻
산악전에 특화된 레인저가 길을 안내하는데다가, 트롤과 맞짱을 떠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검술실력을 자랑하는 대장까지 있다. 덕분에 쉽게 산맥을 넘어갈 수 있을 거라고 라이는 기대했지만, 그 기대는 며칠 지나지 않아 산산이 깨져 버렸다. 산맥 위를 유유히 날고 있는 와이번을 샘이 운 좋게 발견한 것이다.
샘은 다급히 품속에 지니고 있던 외눈 망원경을 꺼내 자세히 살펴보더니 대장에게 보고했다.
“와이번입니다.”
와이번이라면 예전에 사막에서 한번 본 적이 있다. 그때의 와이번을 다시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라이는 신이 나서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번 것은 예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작았다. 좁쌀만 한 점을 보고 그게 와이번이라는 것을 알아본 샘의 능력이 대단하다고 생각될 뿐이다.
샘은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망원경을 대장에게 건네주며 투덜거렸다.
“망할 년이 벌써 보고를 마친 모양이군요. 용기사(Dragon Knight)까지 날아온 것을 보면…….”
하지만 대장의 생각은 샘과 달랐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여기서 가장 가까운 국왕파 기사단이 주둔하고 있는 곳은 엔테미어 공국의 수도야. 그것도 말이 주둔이지, 휴양차 가 있는 거지. 거기에 있는 용기사가 그 짧은 시간동안에 여기까지 날아왔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하게나.”
“그럼 우리가 지나온 길을 훑으며 이리로 다가오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우연이겠지.”
“우연이라고요?”
“그래, 우연. 세브롱 요새에서 정기순찰 나온 용기사일 거야. 자세히 보면 제대로 무장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잖아.”
“그게 더 이상하죠. 저런 복장으로 순찰을 도는 용기사를 저는 본적이 없거든요. 뒤에 앉아있는 마법사도 평상복을 입고 있잖아요.”
망원경으로 보니 샘의 말 그대로였다. 용기사나 마법사. 둘 다 가벼운 평상복 차림이다. 용기사는 허리에 검 한 자루만 달랑 차고 있을 뿐이다. 저렇게까지 하고 있는 이유는 한 가지 밖에 생각할 수 없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대장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건 샘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정기적인 순찰이라면 휙 지나가겠지만, 저건 마치 뭔가를 찾기라도 하듯 천천히 저공비행하고 있잖아요. 아무래도 감이 안 좋아요.”
여기까지 말한 샘은 분하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빌어먹을! 그때 아무리 대장님이 말리셨더라도 뒤쫓아 가서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망할 년! 끝까지 사람 애를 먹이고 있네.”
혼잣말인 것처럼 샘이 떠들어댔지만, 자기 들으라고 하는 소리인 것을 대장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 착잡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직까지도 수녀가 감찰부의 첩보원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대장이었다.
“뭐, 그렇게까지 찝찝하다면 자네 내키는 대로 하게. 그래,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겠나?”
대장은 아직까지도 용기사가 정기순찰을 나온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용기사가 겁날 게 없지만, 마법사의 탐지능력은 엄청났다. 저들이 자신들을 찾고 있는 게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깊은 산속을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걸 발견했다는 것은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이다. 흔히 있는 일이 아닐 테니까. 그들이 누군가에게 재미삼아 이 얘기를 흘린다고 해도, 재수가 없다 보면 그게 돌고 돌아 감찰부의 귀에 들어갈 수도 있었다. 세브롱 요새에 감찰부의 첩자가 없다고는 장담할 수가 없었으니까.
“저쪽으로 가죠. 그게 최곱니다.”
샘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길이 나있지 않은 울창한 숲이었다.
“숲속에 숨는다고 해결이 될까? 동굴 속 깊은 곳에 몸을 숨기지 않는 한, 마법을 피해갈 수는 없잖나.”
“저기에 숨자는 게 아니라, 저쪽으로 가자는 겁니다.”
없는 길을 개척하며 가자면 몇 배는 힘이 더 들 것이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산길에 있어서는 샘이 그보다 아는 게 훨씬 더 많았으니까. 앞으로의 고생이 눈에 선했기에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샘과 대장이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도 모르고 라이는 와이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와이번과의 거리는 조금 더 좁혀져 있는 상태.
“저 혹시 안 보실 거면 제가 좀 망원경을 봐도 될까요? 와이번이 어떤 건지 자세히 보고 싶어서요.”
떨떠름한 표정을 짓긴 했지만, 대장은 망원경을 건네줬다.
“용기사는 처음이지? 저게 바로 용기사다. 잘 봐 둬라. 이제 두 번 다시 보기 힘들지도 모르니까…….”
망원경으로 보니 저 멀리 저공비행하고 있는 와이번을 좀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와이번 위에 한 사람만 타고 있을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두 명씩이나 타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와이번이 날고 있는 속도는 그리 빠른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날개 젓는 모양새로 봤을 때 아주 천천히 날고 있는 것 같은데요?”
“당연하지. 아래쪽을 살펴봐야 할 테니까.”
“그럼 숨어 있다가 화살로 공격하면 어때요?”
라이가 그런 생각을 할 만도 했다. 낮은 고도를 천천히 날고 있는데다가 갑옷조차 입고 있지 않다. 몰래 저격한다면 손쉽게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라이의 말에 샘이 콧방귀를 뀌며 빈정거렸다.
“그거 지금 웃자고 하는 농담이지?”
“…….”
한심하다는 듯한 샘의 시선에 라이는 은근히 울화가 치밀었다. 아직 어리다 보니 잘 모를 수도 있는 건데, 뭘 그렇게까지 빈정거린단 말인가. 그때 옆에서 대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와이번에 대해 설명해줬다.
“와이번은 아주 희귀하다 보니 엄청나게 비싸지. 그런 와이번에 어중이떠중이들을 태울 것 같으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닌 것 같았기에 라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와이번을 향해 화살 수백 발을 날려 봐라. 죽일 수 있는지. 오히려 우리 위치만 노출될 뿐이야.”
그러자 옆에서 샘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듀에이트급 기사만이 용기사가 될 수 있어. 우리 정도 실력으로는 떼로 덤벼도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이지.”
그래듀에이트라는 말에 라이는 움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순간 올란도가 성벽을 뛰어오르던 장면이 뇌리에 떠올랐던 것이다. 당시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경악해서 외쳤었다. 그래듀에이트라고.
라이가 올란도를 떠올리며 조용히 있자 대장은 겁을 집어먹은 거라고 착각했다. 그는 일부러 자신감 있는 미소를 씨익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용기사가 그래듀에이트라고 해서 그렇게 겁먹을 건 없다.”
그때 샘이 옆에서 다시 끼어들었다.
“지금 우리 상황에서는 용기사보다 마법사가 더 짜증나는 존재야. 나무 밑에 숨는다고 해서 마법사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거든.”
샘이 마법사를 운운하는 것을 보니, 용기사와 함께 타고 있는 사람이 마법사인 모양이다. 샘은 라이의 손에서 망원경을 뺏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자, 시간이 없다. 빨리 움직이자.”
라이가 길을 따라 걷기 시작한 지 몇 초 되지도 않아 등 뒤에서 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그쪽이 아냐. 이쪽이야.”
샘은 숲속으로 들어가 단검을 뽑아 들고 나뭇가지들을 잘라 길을 만들며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