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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의 말대로 길을 바꾼 후에는 산행이 더욱 힘들어졌다. 어떤 때는 울창한 삼림을 뚫고 지나가야 했고, 어떤 때는 수직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 산길을 오르거나 혹은 내려가야만 했다.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고, 제대로 가고 있는 것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샘의 뒤를 따라 헐떡거리며 무작정 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다. 대장은 샘의 말을 듣고 길을 바꾼 걸 후회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길을 잃어버린 것이다.
길을 벗어난 지 3시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피로도는 전날 하루 종일 걸은 것과 맞먹을 정도였다. 길도 없는 산속을 뚫고 이동하다 보니 평소보다 힘이 두세 배는 더 힘들었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강철 체력을 자랑했던 라이라고는 하지만, 밤이 되었을 때는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 버렸다.
이렇게 체력소모가 크면 먹는 것이라도 잘 먹어야 하겠지만, 마음 놓고 식사를 할 수도 없었다. 식량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던 것이다. 산맥을 뚫고 나가다 보니 처음에 가지고 왔던 식량은 모두 다 먹어버렸고, 이제부터는 마지막 마을에서 구입한 식량을 먹어야 했다. 그런데 곡물 같은 거야 끓여서 먹는다고 치더라도, 육포가 문제였다.
샘은 돌덩이처럼 딱딱한 육포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더니 인상을 찡그렸다.
“이거 무슨 고긴지 잘 모르겠지만, 이대로 그냥 끓이면 안 되겠습니다.”
“왜?”
“냄새가 영 구리구리해서 말입니다. 설마하니 썩은 고기를 말렸을 리는 없을 테고…, 뭔지는 모르겠지만 몬스터 고기를 말린 것 같습니다.”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어쩔 수 없지. 우선은 참고 먹는 수밖에. 내일부터는 뭔가 사냥해서 먹을 만한 짐승이 있는지도 살펴보도록 하자.”
“알겠습니다.”
귀족들은 이런 경우에 향신료를 뿌려 고기의 누린내를 잡는다고 하지만, 이들은 향신료라고는 손톱만큼도 없었다. 소금을 좀 가지고 있는 게 전부였으니까. 대장과 샘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음식을 씹어 삼키는 데 비해 라이는 아주 맛있다는 듯 그릇을 쪽쪽 핥으며 먹어치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대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식성 좋구나.”
“뭘요. 오크 굴에서 1년만 살아 보세요. 안 맛있는 음식이 있는지.”
라이는 대장에게 사제(師弟)의 인연을 청한 후, 지금까지 숨겨왔었던 자신의 지난 과거를 하나 둘 말해 주었다. 눈치 빠른 라이는 대장이 자신을 향해 뭔가 미심쩍어하는 것 같은 눈길을 보낸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먼저 대장이 자신을 신뢰하게 만드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면 숨기는 게 없어야 할 것은 자명한 이치.
식사를 끝마치자마자 모닥불에 흙을 덮어 불을 끄고, 모두들 잠을 청했다. 낮에 봤던 와이번은 대장 말대로 정기적인 순찰을 도는 것이었는지 그 뒤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 때문에 대장은 샘의 말만 듣고 옆길로 빠진 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은 동서남북 방향이나 간신히 알 수 있을 뿐, 자신들이 어디쯤에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상황이다.
“일단은 북쪽으로 올라가기로 하죠. 한 2~3일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동쪽으로 꺾어서 산맥을 빠져나가면 될 것 같습니다.”
“저 수풀을 뚫고? 젠장. 제대로 가고 있는 건 맞냐?”
“믿으십쇼. 딴 건 몰라도 방향만큼은 확실하게 가고 있는 중입니다.”
“젠장! 말이나 못하면…….”
배를 채운 그들은 저마다 불 옆에 몸을 눕혔다. 너무나도 피곤했던 그들은 곧이어 잠에 빠져들었다.
한참 잠에 취해있는 라이. 자는 모습이야 다른 사람들과 똑같았지만, 그의 몸속에서 흘러가는 기의 움직임은 완전히 달랐다. 단전을 중심으로 몸 전체를 도도하게 휘돌아 흘러가고 있었다. 그것도 일반인들과는 정반대로. 보통 내공의 고수들이라고 해도 낮에 열심히 수련했던 것이 밤이 되면 원상태로 기의 흐름이 되돌아가며 퇴보를 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라이의 경우 그 반대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단점 아닌 단점도 있었다. 내공수련을 할 때는 감각이 굉장히 예민해져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눈에 보이듯 느껴지는 현상이 잠결에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즉,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이 그에게 영향을 미쳐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었다.
“으으으…….”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암흑의 기운이 스멀스멀 자신을 향해 덮쳐오기 시작했다. 라이는 그것을 피해 도망치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를 않으니 미칠 지경이다. 아무리 죽어라 발을 옮기려 해도 천근쯤 되는 바위가 발에 달라붙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걷는 것조차 힘들었다. 뒤따라오던 암흑의 기운이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흐으윽!!”
눈을 번쩍 뜬 라이.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었다. 라이는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봤다. 주위는 온통 시커먼 암흑뿐이다. 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나뭇잎들 사이로 점점이 별이 보인다는 것 정도…….
“휴~, 꿈이었구나.”
그 순간 그의 다리에서 뭔가 따끔하는 통증이 느껴졌다.
“응? 모기가 물었나?”
처음에는 모기와 같은 벌레에게 물린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따끔하는 정도에서 시작한 통증이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곧 전신으로 퍼져가는 지독한 고통에 라이는 자신이 독사에 물린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 대장! 대장! 일어나 봐요!”
그러자 암흑 저편에서 대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독사예요, 독사! 물렸다구요!”
그 말에 대장은 벌떡 일어섰다. 만약 진짜로 독사에 물렸다면 큰일이다. 지금 이곳에는 신관도 없고, 제대로 된 해독약도 없다. 아쉬운 대로 상처에서 독액을 빨아내는 수밖에 다른 치료법이 없는 것이다.
“어느 쪽 다리냐?”
“이, 이쪽이요.”
대장은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라이의 허벅지를 단단하게 동여맸다. 그것도 아주 신속하게. 샘은 옆에 서서 연신 부싯돌을 쳐댔다. 그들이 잠자는 사이에 모닥불은 꺼져 버린지 오래였다. 이 상황에서 갑자기 횃불을 켜들 수도 없었기에, 아쉬운 대로 부싯돌의 불똥이라도 밝혀 대장에게 도움을 주려는 것이다.
부싯돌이 순간적으로 뿜어내는 희미한 빛에 의지해 라이의 다리를 살펴보던 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는다.
“어디를 물렸다고?”
“여, 여기요. 아파 죽겠어요.”
“여기라고?”
대장은 라이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자세히 살펴봤다. 과연 상처가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뱀에게 물린 자국이 아니었다. 오히려 화살이 뚫고 들어간 것처럼 작은 구멍이 하나 뻥 뚫려있었고, 그곳을 중심으로 피부가 검붉은 색으로 부풀어 오르고 있는 중이다.
이때, 옆에서 연신 부싯돌을 키던 샘의 눈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뭔가 기다란 덩굴 같은 것이 라이의 다리 부근에까지 뻗어와 있었던 것이다.
“이게 뭐지?”
그런데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덩굴 같은 그것이 스르륵 움직이더니 라이의 다리를 꽉 감아버렸기 때문이다.
“흐억!”
깜짝 놀란 라이가 버둥거리며 발을 뒤로 빼려고 했지만 덩굴이 감고 있는 힘은 의외로 강했다. 그리고 덩굴에 휘감긴 부분에서 따끔따끔하는 느낌이 있더니 곧이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지독한 통증이 몰려왔다.
“으아악! 이, 이게 뭐야?”
휘감기지 않은 다른 발로 덩굴을 맹렬하게 차댔지만, 덩굴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강한 힘으로 라이를 어딘가로 끌고 가려고 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통증에도 불구하고 라이는 사력을 다해 덩굴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어떻게 된 노릇인지 온 몸에 힘이라고는 전혀 실리지 않았다.
“사, 살려…….”
그때서야 어찌된 영문인지 대충 감을 잡은 대장이 단칼에 덩굴을 잘라버렸다.
서걱!
“흐음, 음유시인들이 흥미위주로 만들어낸 상상의 산물인줄 알았는데, 이런 게 정말 존재할 줄이야.”
그들은 덩굴의 공격이 멈춘 틈을 이용해 불부터 지폈다. 모닥불이 피어오르며 주위가 훤하게 밝아진다. 불빛을 이용해 주위를 치밀하게 살펴봤지만 식인식물처럼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방금 전의 일이 한바탕 꿈처럼 느껴질 정도다.
물론, 방금 전의 일이 꿈이 아니라는 확실한 증거가 남아있었다. 검붉은 색으로 퉁퉁 부어올라있는 라이의 발. 그리고 말라비틀어진 덩굴줄기 몇 가닥. 대장이 그걸 자른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벌써 덩굴줄기는 바짝 말라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