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추격자
덩굴의 공격이 또다시 있을까봐 대장과 샘은 돌아가면서 밤새도록 경계했지만,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그리고 고통에 몸부림치던 라이가 간신히 잠에 빠져든 것도 날이 밝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샘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해독약을 발라주긴 했지만 전혀 효과가 없었다. 그러던 것이 새벽녘이 다 되어서야 서서히 독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던 것이다.
축 늘어져 있는 라이를 흔들어 깨우는 대장.
“이봐, 일어나.”
“끄응…….”
“다리는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요. 어젯밤에는 정말 죽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그만하기 다행이다. 걸을 수는 있겠냐?”
라이는 몸을 일으켜 몇 발자국 걸어 봤다. 아직까지 남아있는 고통 탓에 절룩거릴 수밖에 없긴 했지만, 그럭저럭 걸을 만은 했다.
“그 정도면 거의 다 나은 거나 마찬가지네. 짐 챙겨라. 출발해야지.”
“밥도 안 먹고요?”
“이상한 식물이 공격해오는 이곳에서? 아서라.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한 후에…….”
이때, 주위를 둘러보고 온 샘이 돌아왔다.
“뭔가 찾아낸 거 있냐?”
“아뇨. 하지만 좋은 걸 발견했습니다.”
“뭔데?”
“동굴입니다.”
싱글거리며 웃는 샘과 달리 대장은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되물었다.
“동굴? 동굴에서 뭐하려고?”
원래 날이 밝으면 최대한 멀리 도망칠 계획이었다. 뿌리를 땅에 박고 사는 식물인 만큼 쫓아오지는 못할 테니까.
“동굴에 들어가 봤는데, 꽤 깊고 넓더라고요.”
깊다는 말에 대장의 눈이 번쩍 빛났다.
“동굴 안으로 끌어들이자는 건가?”
“그렇죠. 이 망할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도 알 수가 없고, 또 어디까지 분포해 있는지도 모르잖습니까. 싸워야 한다면 차라리 우리가 유리한 곳으로 적을 끌어들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게다가 저놈 발이 저래서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도 힘들 테니 말입니다.”
“자네 말이 옳군.”
고개를 끄덕인 대장은 주위를 쓱 둘러본 다음 신경질적인 어조로 중얼거렸다.
“식인식물 따위야 볼 수만 있다면 별것도 아니지. 두고 보자. 아주 박살을 내 줄 테니까.”
이곳에서는 주변 식물들과 섞여있는 통에 놈의 본체를 찾아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동굴처럼 아무런 식물도 자랄 수가 없는 곳이라면 얘기가 틀리다. 그곳으로 들어온 식물은 몽땅 다 식인식물일 테니까.
대장과 라이는 샘을 따라 동굴로 갔다. 과연 샘의 말대로 동굴은 꽤 컸다. 입구는 작았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점 더 넓어졌다.
“괜찮은데.”
만족해하는 대장과 달리 라이는 암흑이 짙게 깔려 있는 동굴 안 깊은 곳을 두려움이 가득 담긴 눈으로 살펴봤다. 예전에 동굴 속에서 놀(Gnoll)에게 뜨거운 맛을 본 적이 있었던 그였기에, 이런 음침한 동굴에 있어야 한다는 게 달가울 리 없었던 것이다.
불안해하는 라이의 마음을 알았는지 대장은 다행히도 동굴 안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요는 식인식물들을 끌어들이는 것이었으니까. 대장은 주위를 대충 훑어본 뒤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라이, 넌 불을 피워라.”
그리고 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넌 나와 함께 밖으로 나가 땔감을 주워오도록 하자. 혹시 모르니 밤새도록 태울 수 있도록 넉넉하게 말이야.”
식인식물에 쏘인 탓에 다리가 불편한 라이를 위한 배려였다.
밖에서 땔감을 잔뜩 장만해 와 모닥불부터 피웠다. 대장과 샘이 장만해 온 나무들은 모두 축축하게 젖어있었기에 연기를 잔뜩 뿜어냈다. 그리고 그제서야 그들은 바람이 동굴 속 깊은 곳으로 흘러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연기가 동굴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연기의 방향 따위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들의 관심은 온통 식인식물에게 쏠려 있었으니까.
“정말 그것들이 동굴까지 쫓아올까요?”
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글쎄다. 나도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뭐라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식물 주제에 주위 상황을 파악하며 공격할 지능은 없을 것 같은데.”
대장의 의견에 샘도 동의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어젯밤의 공격패턴으로 봤을 때, 놈들은 주위에 먹잇감을 발견하면 무조건 공격하는 것 같습니다. 줄기가 많이 잘려 버린 탓에 지금은 잔뜩 웅크리고 있겠지만, 밤이 되면 또 다시 공격해 올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겠죠.”
줄기에 휘감기거나 찔리지만 않는다면 그다지 상대하기 어려운 것도 아니었기에 대장은 여유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자자, 밤새도록 제대로 자지도 못하고 고생했으니 뭐라도 좀 먹고 푹 쉬도록 하자. 오늘 밤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그나저나 라이의 발이 빨리 나아야 할 텐데.”
험한 몰몬트 산맥을 넘으려면 어지간한 체력으로는 힘들었다. 그렇기에 대장은 무리해서 산맥을 넘기 보다는 차라리 하루 푹 쉬며 체력을 회복하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결정한 것이다.
모닥불 위에 작은 냄비를 걸고 곡물을 넣어 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라이가 죽을 끓이는 동안 샘은 육포를 잘라 일부는 죽 속에 넣고, 나머지는 나무막대에 꽂아 불에 구웠다. 고기가 익으면서 구수하면서도 누릿한 냄새가 동굴 속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모두들 동굴 밖을 경계하며 식사 준비를 하고 있을 때, 적은 의외로 동굴 밖이 아닌 동굴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취익, 칙!”
등 뒤에서 갑작스럽게 들려온 콧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뒤쪽으로 돌아갔다. 오크였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오크라고 단정 짓기에도 어려웠다. 오크와 비슷하게 생기기는 했지만 훨씬 더 우락부락하게 생겼다. 겉모습뿐만이 아니다. 라이는 놈에게서 풍기는 냄새가 예전에 지겹도록 맡았던 오크 냄새와 조금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전체적인 생김새로 봤을 때, 오크 말고 딱히 떠오르는 다른 몬스터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변종 오크…, 인가요?”
라이의 질문에 샘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글쎄다……. 뭐, 오크면 어떻고 아니면 어때? 생긴 거 보니 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샘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넘쳤다. 오크 따위가 변이가 일어나서 강해져 봐야 얼마나 강해지겠는가. 그래 봐야 오크인데……. 그가 활에 장전하기 위해 막 화살을 꺼내들려 할 때였다. 어슬렁거리며 다가오던 변종 오크가 움직인 것은.
탓!
그런데 이건 평범한 오크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결코 짧지 않은 거리를 눈 깜박할 새에 좁힌 변종 오크가 제일 먼저 노린 것은 샘이었다. 만약 샘이 어설픈 궁수였다면 그 일격에 숨통이 끊어졌으리라.
위기감을 느낀 샘이 급하게 몸을 굴려 가까스로 변종 오크의 기습적인 일격을 피해냈다. 그와 동시에 모닥불빛에 변종 오크가 들고 있는 무기가 뭔지 드러났다. 그런데 놈이 들고 있는 것은 투박한 나무 몽둥이 따위가 아니었다.
“창?”
그것도 엉성하게 만든 엉터리 창이 아니라, 날카로운 쇠붙이가 제대로 장착되어 있는 진짜 창이다. 뒹구르르 몸을 굴려 공격권에서 도망치려는 샘을 바짝 따라붙으며 변종 오크가 재차 공격을 시도했다. 놈의 창이 샘의 몸통을 막 꿰뚫으려는 찰나, 대장의 장검이 번쩍였다.
챙!
그와 동시에 쌍방 간의 무기가 불을 뿜었다. 화려한 창놀림. 수준 높은 창술은 아니었지만 기본은 갖추고 있다. 저게 오크가 맞나? 아니면 오크의 탈을 쓴 사람이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쌍방 간의 승부가 갈렸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는 변종 오크. 가슴이 쩍 벌어져 있고, 피가 샘솟듯 뿜어져 나오고 있다. 그걸 본 라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방어 자세를 취하고 있던 도끼를 아래로 슬그머니 내렸다. 저 정도의 상처라면 치명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곧이어 변종 오크가 무너지듯 쓰러지리라.
하지만 라이의 예상은 또다시 빗나갔다. 비틀거리던 변종 오크가 갑자기 도약하더니 라이를 향해 창을 휘둘러 왔던 것이다. 방심하고 있던 라이는 기겁을 하며 도끼를 들어 올려 간신히 공격을 막아냈다.
챙!
도끼를 들어 막지 않았다면 옆구리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뻔 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방금 전의 공격은 죽기 전에 ‘너 죽고 나 죽자’ 하는 식의 발악적인 공격이 아니었다. 기습공격이 실패하자 변종 오크는 마치 춤을 추듯 창을 휘두르며 연속적으로 라이의 목숨을 노려왔다. 도끼로 창날을 겨우겨우 쳐내던 라이는 우연히 놈의 가슴어림을 보게 되자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내장이 보일 정도로 쩌억 베였던 변종 오크의 가슴에서 더 이상 피가 흘러나오지 않는 것이 아닌가. 숨이 차오를 만큼 격하게 움직이고 있는데도 말이다.
“이거 오크가 아니라 트롤이었나? 하지만 아무리 봐도 오크인데…….”
수세에 몰린 라이는 급하게 대장을 찾았다. 방금 전의 격돌 이후로 대장은 뭔가 생각에 잠기기라도 한 듯 멍하니 서있었다. 그 때문에 변종 오크의 공격을 라이 혼자 감당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오크였다면 즉사를 해도 몇 번은 했을 정도로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공격을 해오니 라이로서는 환장할 지경이었다.
“이봐요, 대장! 이 괴물 좀 어떻게 해 봐요!”
비명에 가까운 라이의 외침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대장은 변종 오크의 뒤쪽으로 재빨리 다가서더니 단칼에 목을 날려 버렸다. 떨어져 나간 변종 오크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올라왔다.
라이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뒤로 후다닥 물러섰다. 목이 잘린 오크가 다시 일어나 창을 휘두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죽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어휴, 죽다 살았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라이는 대장의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바뀌는 것을 보고 의아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는 동굴 안쪽을 힐끗 바라봤다. 혹시 대장은 저 안에서 변종 오크들이 우글우글 달려나올 것을 염려하고 있는 것일까?
갑자기 대장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소리쳤다.
“지금 당장 밖으로 나가야 돼!”
대장의 말에 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긴 했지만 밖으로 나가지는 않았다.
“바람이 동굴 안쪽으로 흘러 들어가는 건 사실입니다만, 지금 당장 도망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모양을 보니 제대로 된 오크는 아닌 것 같은데요.”
“제대로 된 오크가 아니기 때문에 그래. 빨리 나가자!”
라이는 모닥불 위에 굽고 있던 고기를 힐끔 바라봤다. 그의 마음을 느꼈는지 대장이 채근한다.
“어서 서둘러!”
마지못해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라이. 그의 얼굴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그걸 느낀 대장이 말해줬다.
“저건 키메라야.”
“키메라요? 그런 몬스터 이름은 처음 들어보네요. 난 오크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 마법생물 키메라 말이다. 너는 키메라가 뭔지도 모르냐?”
라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대장은 한숨을 푹 내쉰 후 말했다.
“설명은 나중에 시간 날 때 자세하게 해 주마. 어쨌거나 키메라라는 건 자연적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마법사들이 만든 마물이야.”
대장의 말에 샘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면 저 안에 던전이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지. 마법사가 저런 키메라를 단 한 마리만 만들었을 리는 없다는 것을.”
“던전이라면 들어가서 살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저 속에 마법사가 숨겨 놓은 보물이나…….”
아직 상황파악을 제대로 못한 라이가 순진한 얼굴로 끼어들었다가 대장의 야단만 맞았다.
“이게 어디서 주워들은 영웅담을 떠올리는 모양인데, 던전 탐험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냐? 방금 전에 키메라하고 싸워 봤잖아. 얼마나 강한지 말이야. 그런 게 수십 마리쯤 달려 나온다면 너 상대할 자신이나 있는 거냐?”
전설에나 나오던 미지의 던전을 탐험한다는 것에 혹해 있던 라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아뇨.”
“자 조금만 더 도망치자. 던전을 지키는 놈들일 테니 밖에까지 따라 나오지는 않을 거야.”
“젠장, 제가 제대로 정찰을 했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 대장.”
“자네가 미안할 게 뭐가 있나. 어쨌거나 이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 둘 수가 없다는 게 한이로군. 모험가 길드에 이 위치를 알려 주면 두둑하게 한몫 받아낼 수 있었을 건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