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1화 (807/930)

일행이 동굴 밖으로 빠져나간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아 키메라 오크 여섯 마리가 동굴 속 깊은 곳에서 꿀꿀거리며 달려 나왔다. 그들은 목이 잘린 채 쓰러져 있는 동료를 발견하자마자 한 마리는 다시 동굴 안쪽으로 달려 들어갔고, 나머지는 그 주위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가 던전으로 들어가는 입구고, 키메라 오크는 던전을 지키는 파수꾼일 거라는 대장의 예상이 맞은 것일까? 키메라들은 침입자의 존재를 파악했음에도 불구하고 밖으로 달려 나가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서로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죽은 동료의 사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처음에는 주변을 경계하는 척이라도 하고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의 시선은 사체로 집중되었다.

그들이 사체를 둘러싸고 모인 이유는 뻔한 것이었다.

주르륵…….

굵은 송곳니가 튀어나와 있는 입술 사이로 침이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린다. 그 중 한 마리가 도저히 참지 못하겠는지 사체의 손을 붙잡고 덥석 베어 물었다. 처음 시작이 어렵지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러자 주위에 둘러싸고 있던 다른 오크들 역시 사체의 각 부분을 노리고 일제히 달려들었다.

우직우직…, 쩝쩝쩝…….

동굴 안쪽이 환하게 밝아 오기 시작하더니, 웬 여자의 상큼한 목소리가 동굴 안을 울렸다.

“콜록콜록! 이게 무슨 냄새야? 멍청한 것들! 이상이 있으면 나한테 보고하라고 했더니, 그런 것도 제대로 못해?”

천천히 걸어나오는 여자의 앞에는 환하게 빛나는 구체(球體) 하나가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마법사들이 어두운 곳에서 횃불 대용으로 흔히 사용하는 라이트 마법이다.

여자의 용모는 이런 동굴 속에서 흉칙하게 생긴 오크 떼와 어울리고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방금 전 동굴 안으로 달려갔던 오크 한 마리가 그녀의 뒤에서 풀이죽은 채 따라오고 있는 것을 보면, 그녀가 이 오크들을 통제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밖에 불이라도 난 거야? 어?”

싸늘하기만 했던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극도의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동굴 바닥에 어지러이 찍혀있는 발자국과 모닥불의 흔적을 본 것이다. 그리고 그 주위에 흩뿌려져 있는 시뻘건 핏자국도…….

“침입자?”

여행객들이 애용하는 두터운 가죽부츠가 남긴 발자국이다. 그녀는 모닥불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다 모닥불 주위에 흩뿌려진 시뻘건 핏자국으로 다가섰다.

축축하게 피에 젖은 흙을 조금 집어 만져 보기도 하고 냄새도 맡아 보며 분석을 하는 여마법사. 곧이어 그녀는 이 피가 오크의 것이며, 피의 상태가 아주 신선하다는 것을 파악해 냈다.

여마법사는 싸늘한 표정으로 키메라들에게 일갈했다.

“이 망할 놈들아! 내가 먹는 걸 허락하지 않은 사체는 절대 먹지 말라고 했잖아. 앙!”

그러자 마치 엄마에게 야단맞은 애들처럼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딴청을 피우는 키메라들.

대장은 동굴 속에 대마법사가 건설한 던전이 있는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사실은 원로원에서 건설한 비밀연구소가 자리잡고 있었다. 여기에 있는 오크형태의 키메라도 이곳 비밀연구소에서 다년간의 연구를 통해 만들어 낸 작품들 중 하나였다.

모델넘버 ‘CE003’, 연구원들끼리는 보통 ‘3호’라고 불리는 이 키메라 오크는 강력한 전투력을 지니고 있긴 했지만 대가리가 너무 나쁘다는 점이 흠이었고, 그 점이 그녀의 속을 썩이고 있었다.

머리가 나쁘면 시키는 대로 하기만 해도 좋겠는데, 이놈들은 시키는 말도 제대로 듣지 않고 있었다. 이번 경우가 그 좋은 예다. 먹는 걸 허락받지 못한 사체는 절대로 먹지 말라고 명령을 내려놨건만, 식욕을 참지 못하는 것이다. 정말이지 인내심이 형편없는 놈들이었다. 하기야 오크 대가리를 붙여 놓은 키메라에게서 뭘 더 바랄까만은…….

침입자들의 발자국은 키메라들이 짓밟아 엉망으로 되어 있었고, 사체는 깨끗하게 뜯어먹어 버려 커다란 뼛조각 몇 개 외에는 남은 게 없다.

“으이그, 내가 미쳐. 이런 돌대가리 자식들을 데리고 경비를 해야 하다니…….”

어쩔 수 없이 여마법사는 마법으로 대지의 기억을 읽을 수밖에 없었다. 고차원적인 마법이라 꽤나 힘이 들었지만 어쩔 것인가. 이것 외에는 침입자를 알아낼 방법이 없는데.

대지의 기억을 읽기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여마법사는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냈다. 침입자는 모두 셋. 희미한 영상이긴 했지만 그들의 행색으로 봤을 때 모험자 패거리인 듯했다.

여마법사는 키메라들에게 동굴 밖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명령했다.

“이곳에 들어왔던 침입자들을 찾아서 죽여. 먹어도 상관은 없지만 머리통만큼은 반드시 가지고 와. 알겠어?”

머리통을 가져와야 키메라들이 침입자들을 확실히 없앴다는 걸 알 수 있었기에 그렇게 명령한 것이다. 시체를 먹어도 된다는 말에 키메라 오크들은 신이 나서 동굴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리고 홀로 남은 여마법사는 핏자국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청소를 시작했다. 오크 뼈는 물론이고 주위에 흩뿌려진 핏자국까지도 마법으로 깨끗하게 태워 없앴다. 키메라의 사체는 피 한 방울조차도 남김없이 깨끗하게 처리해야만 했다. 이 피를 흡수한 식물이 식인식물로 변태하는 것이었으니까.

이 문제점만 없었다면 키메라 오크는 오래전에 대량으로 생산되어 알카사스 왕국의 군사력 증대에 일익을 담당했었으리라. 하지만 아직까지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에 소량만이 생산되어 연구소의 경비용으로 사용되며 테스트되고 있는 중이었다.

동굴을 벗어난 라이 일행은 입에서 단내가 나오도록 산길을 내달렸다.

“저 위로 올라가자!”

대장이 가리킨 곳은 산봉우리 위쪽이었다. 그쪽은 돌이 많아서 그런지 키 큰 나무가 거의 자라지 못해 넓은 공터를 이루고 있었다.

셋은 미친 듯 치달리다가 숨이 턱 끝에 차서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걸음을 멈췄다.

헐떡거리며 땅바닥에 주저앉는 샘. 그에 비해 라이는 거친 숨을 내쉬고는 있었지만 다소 여유가 있는 표정이었다. 이건 확실히 대장으로서도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어린놈의 체력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렇지, 산악전 전문가인 레인저보다 더 좋다는 건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식인식물에 발을 찔려서 제대로 걷기조차 힘들어했지 않았던가.

‘정말 이해가 안 되는 녀석이로군.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렇게까지 체력이 좋을 수가 있지? 웬만큼 훈련해서는 도저히 저런 체력을 만들 수 없는데 말이야…….’

잠시 라이를 쳐다보던 대장은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지금은 라이의 체력 따위에 신경을 쓸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었다. 주위를 살펴보니 키 작은 관목이나 풀밖에 없었기에 저 아래쪽까지 훤히 내려다보였다.

“헉헉, 따라오는 거 같냐?”

“아,아뇨. 따라오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헉헉, 대장님 예상대로 그 키메라는 던전을 지키는 파수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래도 안심하기는 일러. 그 던전 속의 마법사가 살아 있는지, 아니면 죽었는지에 따라서 키메라들의 대응이 달라질 테니까 말이야. 마법사가 오래전에 죽어 버렸길 비는 수밖에…….”

그 순간 대장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풀을 뚫고 여섯 마리의 키메라 오크들이 달려 나오고 있는 것을 본 것이다. 태생적 한계상 다리가 짧은 놈들이었지만, 치달리고 있는 그들의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았다.

키메라 무리들을 자세히 살펴보던 대장은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우려했던 것보다 숫자가 적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법사도 없는 듯했다. 키메라를 만든 고위급 마법사가 함께 따라왔다면 죽었다고 복창해야 했을 텐데 말이다. 저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해치울 수 있으리라.

빨리 해치우고 더욱 멀리 도망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대장은 아직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샘의 등을 툭툭 쳤다.

“이봐, 나왔어.”

샘은 숨을 거칠게 몰아쉬느라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했다.

“며…, 몇 마립니까?”

“여섯 마리. 어쨌거나 다행이야. 마법사가 만든 키메라가 몇마리 되지 않았던 모양이니까 말이야.”

샘은 자신들이 있는 쪽을 향해 짧은 다리로 뒤뚱거리면서 부지런히 달려오고 있는 키메라 오크들을 바라보다가 가래침을 퉤 뱉으며 투덜거렸다.

“망할 놈의 새끼들.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지?”

“독화살 준비해. 아까 보니까 회복력이 좋아서 화살 따위로는 죽지도 않겠더군.”

샘은 품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그는 조심스럽게 마개를 연 다음, 화살촉을 차례로 병 안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독을 묻힌 화살은 옆에 따로 가지런히 놨다. 혹시 실수로라도 화살촉에 긁히기라도 했다가는 목숨이 위태로운 것이다.

샘은 자신의 행동을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고만 있는 라이에게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소리쳤다.

“뭐하고 있어? 너도 묻혀.”

“예? 예.”

라이도 서둘러 자신의 화살을 꺼내 독을 묻히기 시작했다.

“맹독성이니까 끝에만 살짝 묻혀도 충분해.”

라이의 화살은 워낙 크고 길기에 연사에는 불리했다. 그렇기에 그는 화살 3개에만 독을 묻혔다. 많이 쏴 봐야 3발 정도가 한계일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샘과 라이, 두 명은 시위에 화살을 건 채로 키메라 오크들이 사정권 안에 들어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이윽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사정권 안에 들어왔음을 확신한 샘이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피웅!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이 키메라에게 명중할 때쯤, 샘은 벌써 다음 화살을 장전한 채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모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화살에 가슴을 명중당한 키메라가 전혀 데미지를 입지 않은 듯 계속 달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분명 바뀐 건 있었다. 화살에 맞은 키메라의 흉성이 폭발한 듯 기괴한 괴성을 내지르며 달려오던 속도가 더 빨라진 것이다.

“혹시 병이 헷갈린 거 아냐?”

대장의 물음에 샘은 짜증어린 목소리로 대꾸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쇼. 헷갈릴 게 따로 있지. 제가 지니고 다니던 독병을 헷갈리겠습니까?”

그 말에 대장의 인상이 왈칵 일그러졌다. 두 사람에게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벌써 눈치챈 것이다. 저걸 만든 마법사가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독에 면역력을 심어놓은 것이라는 걸. 하지만 대장은 자신의 생각을 아예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자칫 샘이나 라이의 마음이 흔들려 집중력을 잃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샘은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쏜 화살이 연거푸 빗나간 것이다. 대장은 샘의 어깨를 토닥이며 나지막하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로 조언했다.

“정신 똑바로 차려. 지금은 제대로 쏘는 데만 집중해. 어쩌면 독약 효과가 조금 늦게 나타나는 건지도 모르니까.”

샘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심호흡을 했다. 그런 다음 맨 앞에 달려오는 놈을 목표로 향해 시위를 놨다.

피웅~

퍽!

이번에는 정확하게 명중했다. 하지만 맞춰 봐야 뭐하겠는가. 첫 번째 화살에 격중되었던 키메라가 아직까지도 열심히 달려오고 있는데……. 걸리적거리는 화살은 이미 뽑아 버린 상태였고, 상처에서 흘러나오던 피도 어느덧 멈춰 버렸다. 가슴에 나 있는 핏자국만 아니라면 놈이 화살에 맞았는지조차 의문스러울 지경이다.

“이런 씨팔!”

샘은 자신의 화살 공격이 키메라에게 별다른 타격을 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거칠게 욕설을 내뱉으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던 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시선을 라이에게로 돌렸다. 노회한 그였기에 레인저인 샘이 이 정도라면 라이가 얼마나 많이 동요하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이 갔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라이는 전혀 흔들림 없이 화살을 키메라에게로 겨눈 채 시위를 놓을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

사실, 라이는 샘의 첫 번째 화살이 키메라에게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도망치고 싶다는 욕구에 한참을 고민해야 했다.

대장과 샘이 키메라 떼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동안 자신만 몰래 도망친다면? 하지만 곧이어 라이는 생각을 바꿨다. 지금 이 위급한 상황에서 겨우 빠져나간다고 해 봐야 자신이 잡힐 때까지 끝없이 쫓기는 일만 남을 테니까. 결국 키메라나 추격자의 검에 목이 잘린 시체가 될 확률이 굉장히 높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저 둘과 함께 협력해서 키메라와 싸우는 게 훨씬 더 생존 확률이 높은 것이다. 무엇보다 라이가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대장의 엄청난 검술 실력 때문이긴 했지만.

그런 라이를 보며 대장은 씁쓸한 미소를 감추기 힘들었다. 만약 이런 상황이 아닌, 탈출에 성공해 안정적인 삶을 살 때 만났더라면 제자로 삼아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라이가 기대한 것과 달리 그가 라이를 데리고 다니는 것은 언젠가 미끼로 써먹기 위한 것이었다.

샘이 거의 조준도 하지 않고 속사(速射)로 쏘고 있는데 반해, 라이는 첫발을 아주 신중하게 조준했다.

‘사정권 안에 들어왔나?’

아무래도 조금 먼 것 같다. 이제나 저제나 하며 초조하게 망설이던 라이가 일순 시위를 놨다. 커다랗기 짝이 없는 그의 화살은 날아가는 박력 자체가 달랐다.

슈우우우―

거리가 짧아서인지 커다란 화살은 키메라의 머리통을 그대로 꿰뚫어 버렸다.

퍽!!

샘이 쏜 화살에는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던 키메라 오크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화살에 머리통이 꿰뚫림과 동시에 뒤로 벌렁 자빠져 버린 것이다. 산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 내려가는 키메라를 보며 라이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는 커다란 활과 화살을 힘들게 들고 온 보람이 있는 것이다.

슈우우―

두 번째 화살에 맞은 키메라도 뒤로 자빠져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은 네 마리. 샘은 놀라운 속도로 화살을 쏴 대고 있었지만, 놈들에게 그런 공격은 모기에 물린 정도의 타격밖에 입히지 못했다. 녀석들의 뛰는 속도조차 줄이지를 못하고 있었으니까.

피슝.

마지막 독화살까지 날린 후, 샘은 일반 화살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활을 내려놨다. 독화살도 통하지 않는 판에 일반 화살로 쏴 봤자 헛짓거리라고 판단한 것이다. 그는 등에 매고 있던 방패를 풀어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단검을 뽑아들고 곧이어 시작될 육박전에 대비했다.

라이가 세 번째 화살을 시위에 간신히 장전했을 때는 키메라 오크들이 20여 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까지 육박해 들어온 상태였다. 라이는 급히 세 번째 화살을 날렸다. 워낙 코앞에서 쏜 화살이었기에 키메라는 피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무참한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자빠졌다.

라이는 자신이 쏜 화살에 키메라 오크가 격중되었는지 살펴볼 여유조차 없었다. 그는 곧바로 활을 던져버리고 허리에서 도끼를 뽑아들어 키메라가 내지르는 창부터 막았다.

태앵!

창과 도끼자루가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이는 강한 힘으로 오크의 창을 튕겨 올림과 동시에 한손 도끼를 양손으로 붙잡고 힘껏 휘둘렀다. 그 덕분에 평소처럼 왼손에 방패를 들고 있는 상황이었다면 불가능했을 빠른 속도로 키메라 오크에게 역공을 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공격은 키메라에게 커다란 상처를 안겼다.

키에엑!

키메라 오크가 뒤로 고개를 힘껏 젖힌 탓에 목을 완전히 잘라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1/3쯤은 잘라낼 수 있었다. 붉은 피가 분수처럼 터져 나왔다. 의외로 쉽게 한 놈 해치웠다고 생각한 라이는 주위를 둘러봤다.

역시 대장은 예상대로 키메라 오크를 손쉽게 다루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샘도 위태롭기는 했지만 키메라 오크의 매서운 공격을 차분히 막아 내고 있었다.

‘먼저 샘부터 도와주자.’

마음을 먹고 샘쪽으로 채 한걸음도 옮기기 전에 라이는 놀라운 광경을 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쐈던 자신의 화살에 가슴이 적중되었던 키메라 오크가 부시시 몸을 일으키고 있는 것을.

놈은 자신의 몸에 꽂혀 있는 화살을 분질러 버린 후, 남은 토막을 밀어서 몸에서 뽑아냈다. 화살이 뽑힌 자리에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지만, 그것도 잠시. 곧이어 피가 멈추기 시작했다.

이 믿기지 않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라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저게 가능한 일이야?”

그 순간 그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온 몸의 털이 곤두서는 듯한 해괴한 느낌과 함께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몸이 옆으로 쓱 움직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서 있던 위치를 거칠게 훑고 지나가는 창 한 자루. 놀랍게도 그건 방금 전 자신이 해치웠다고 지레 짐작했던 키메라 오크놈이 휘두른 것이었다.

“헉?!”

라이는 경악했다. 죽였다고 생각한 키메라 오크는 아직 싱싱하게 살아 있었다. 목 부분에 붉은 피가 흥건하게 묻어있긴 했지만…….

“이런 망할 놈! 정 그렇다면 다시는 살아날 수 없도록 모가지를 뎅강 잘라 주마.”

화살에 맞았던 키메라 오크가 여기에 도착하기 전에 놈을 해치워야만 했다. 살기 위해서는 그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저놈이 살아난 것을 보면, 남은 두 마리도 살아날 가능성이 컸다. 만약 그놈들까지 모두 다 가세한다면 무조건 죽음뿐이다.

그런 초조함이 라이의 몸을 딱딱하게 경직시켜, 오히려 평소보다 몸놀림을 둔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놈에게 치명타를 입힐 수 있는 위치는 정해져 있다. 키메라 오크도 바보가 아니었기에 방금 전에 베였던 목 언저리에 대한 방어를 철저하게 하고 있었다. 그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 둘 간의 대결은 라이의 기대와 달리 팽팽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챙! 챙! 툭! 퍽!

결국 생각하기도 싫었던 사태가 벌어졌다. 두 번째 화살에 맞았던 키메라 오크가 전장에 도착한 것이다. 라이는 그때까지 눈앞의 키메라 오크를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라이의 눈에 절망감이 어리기 시작했다.

서걱.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아니, 기적이랄 것도 없었다. 대장이 자신이 맡고 있던 키메라 오크의 목을 날려버리고 달려오던 키메라 오크를 맞이한 게 어찌 기적이겠는가. 라이가 기적이라고 느낀 것은 그만큼 이 기괴한 키메라 오크에게서 받은 심적 충격이 컸던 탓이다.

라이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미 대장은 전장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라이에게 또 한 마리의 키메라가 달려들자, 자신이 맡고 있던 키메라 오크의 목을 단칼에 날려 버리고 전장의 균형을 맞춘 것이다.

대장이 트롤까지 해치운 실력자라는 걸 떠올리자 불안에 떨던 마음이 차분하게 안정되었다. 라이는 격렬하게 방패와 칼을 휘두르며 키메라 오크를 압박해 나가기 시작했다. 본인이 가진 실력이 유감없이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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