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9화 (815/930)

꼬인다, 꼬여

탁탁, 타앗~

나뭇가지를 연달아 밟으며 허공으로 도약하여 놀라운 속도로 숲 속을 이동하고 있는 인영(人影). 누가 봤으면 엘프나 트롤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놀랍게도 그는 사람이었다.

“헉, 헉~”

나무 위쪽은 달빛으로 인해 꽤나 밝았지만, 발 밑 저 아래쪽은 나무 그림자에 가려 칠흑과도 같이 어두웠다.

“망할 놈의 새끼들! 잠자고 있는데 다짜고짜 공격하다니…….”

정말이지 지금 생각해도 그 사지(死地)에서 살아서 탈출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평소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던 그였지만, 그렇게까지 떼거리로 덤빈다면 얘기가 틀리다. 더군다나 그는 잠자고 있는 상황에서 난데없는 기습까지 당했다.

갑자기 뭔가 이상한 기운이 느껴져 잠이 번쩍 깼었다. 만약 그때 그가 조금이라도 망설였거나, 혹은 실수라도 했다면 여기까지 도망쳐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지금 그의 몸 상태만 봐도 방금 전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 옷은 성한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걸레가 되어 있었고, 몸 여기저기에서 난 상처에서 흘러내리는 피로 인해 전신이 피투성이였다.

주위를 조심스럽게 둘러보던 그는 약간이나마 시간적 여유를 얻었다고 판단하자마자 서둘러 치료에 들어갔다. 지금처럼 피를 흘리다 보면 체력이 급격히 떨어질 뿐만 아니라, 핏자국이 남아 얼마 가지도 못해 추격을 당할 수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검 날이 아래쪽으로 향하도록 검을 거꾸로 잡은 그는, 검 손잡이 아래쪽에 붙어있는 균형추를 조심스럽게 돌려서 뽑았다. 균형추가 뽑혀 나온 자리에는 작은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투명한 액체가 들어있었다. 비상시에 사용하기 위해 넣어 둔 포션이다.

다급히 여관을 탈출하느라 검 외에 다른 건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를 못했다. 검 손잡이 속의 빈 공간에 들어있는 미량의 포션만이 그가 가지고 있는 치료약의 전부였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 알 수 없는 만큼, 아껴서 써야만 했다.

월터는 손가락 끝에 포션을 찍어 상처에 발랐다. 미량의 포션이긴 했지만 황실에 납품되는 최고급품이었던 만큼 그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곧이어 출혈이 멈췄고, 욱신거리던 통증이 서서히 희미하게 사라져 갔다.

통증이 어느 정도 가시자, 그의 두뇌가 민첩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득 떠오른 의문 하나. 상관에게 들은 게 맞다면, 이곳에서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월터, 자네 혹시 사막에 가 봤나?”

“아뇨.”

상관의 뜬금없는 질문에 월터는 별 생각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했었다. 그러자 그의 상관은 잘됐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잘됐군. 이번 기회에 사막이란 게 어떤 곳인지 구경이나 좀 하고 오게. 이곳과는 풍광이 전혀 다를 거야. 그러니 가서 두루두루 살펴보고 견문 좀 넓히고 오라구.”

평소 실없는 소리를 곧잘 하던 상관이었기에, 처음에는 웃자고 하는 농담인 줄만 알았다.

“핫핫, 요 근래 대장님께 들은 조크들 중에서 단연 최고였습니다. 우와~, 듣기만 해도 등골이 섬뜩한데요?”

월터의 너스레에 상관은 표정을 싸늘하게 굳히며 말했다.

“농담이 아닐세.”

그 말에 웃는 얼굴 그대로 흠칫 굳어버린 월터.

“지, 지금 저에게 사막에 가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황무지와 사막은 완전히 다르다. 대륙 전체를 통틀어 사막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곳은 단 한 군데뿐이다. 마도왕국 알카사스의 서쪽 방면에 광대하게 펼쳐져 있는 대사막지대.

사막 지형에 특화된 일부 생명체들을 제외하고는 작렬하는 태양빛을 이기지 못하고 바짝 말라 고기포가 되어 버린다고 들었다. 더군다나 모래폭풍이라도 불면 지옥이 따로 없다고 했다. 그런 불지옥에 가서 이국적인 풍광을 즐기라고? 천만의 말씀. 가고 싶으면 댁이나 가시라고.

“절대로 가기 싫습니다.”

“설마 내 명령을 거역하겠다는 겐가?”

안색이 딱딱하게 굳은 상관에게서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압도적인 기세에 월터는 바짝 얼어붙어 버렸다. 급히 입을 열어 아니라며 수습하려 했지만, 입 밖으로 목소리조차 나오지가 않는다. 그저 간신히 어색한 미소만을 지어 보였을 뿐이다.

월터의 상관은 장난기도 많은데다가 워낙에 젊어 보이는 외모 탓에 함께 밖에 나가면 모두들 그가 월터의 동생인줄 알 정도였다. 더군다나 그들이 속해 있는 부대는 총원이 겨우 7명뿐이라 아주 가족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금처럼 그가 자신의 상관이라는 걸 잊어버린 게 꼭 월터의 문제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것이다.

월터가 간신히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것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대장님. 가겠습니다. 어디든 보내만 주십쇼. 불속이건 물속이건 지옥이건 어디건 가겠습니다.”

그의 상관은 겉모습은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지만, 역사책에 나올 정도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마도대전은 물론이고 제1, 2차 제국전쟁에까지 참전한 역전의 용사로서 제국에 셋밖에 없다는 마스터들 중 하나다.

“핫핫, 그렇게나 사막에 가 보고 싶단 말이지?”

까미유 드 크로데인 공작은 자신이 언제 신경질을 냈냐는 듯 유쾌한 웃음을 터트리며 월터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래서 내가 자네를 좋아한다니까. 별 일 아니니까, 휴가 간다고 생각하고 한동안 푹 쉬다 오라구.”

그때를 생각하면 이빨마저 뽀드득 갈린다. 이게 푹 쉬고 오라는 휴가냐?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한 게 있었다.

“어떻게 내 정체를 파악한 거지?”

당연히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가 지금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는 아주 특별한 것이었으니까. 제2근위대원으로 임명될 때 황제 폐하로부터 직접 하사받은 물건들 중 하나였다. 반지의 겉모습은 평범했지만, 안쪽을 보면 수없이 많은 마법주문들이 깨알같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두 가지씩이나 되는 마법을 반지 안쪽에 새겨 넣다보니 굵기가 꽤나 두툼해져 버렸지만, 그 성능만큼은 확실했다. 하이드 마나 포스(Hide Mana Force)와 하이드 매직 포스(Hide Magic Force)를 통해 마법사로부터 자신의 기척을 완벽하게 숨길 수 있었으니까.

월터는 혹시 모를 위험에 대비하기 위해 산맥을 넘기도 전에 반지를 구동시켰었다. 그런데 어떻게 알카사스쪽에서 자신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알카사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정상적인 경로를 통해 입국하지 않고, 산맥을 넘는 수고까지 마다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정신을 집중해 보니 반지 쪽으로 상당량의 마나가 흘러들어가고 있는 게 느껴진다. 마법사들이 득실거리던 그 마을에서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 반지가 제대로 동작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리라.

반지에 문제가 없다면, 어디에서 잘못된 것일까? 크로데인 공작에게서 설명 받은 대로라면, 사막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별다른 문제가 없어야 했다.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첩보원들에 대한 호위일 뿐이었으니까.

최근 들어 사막부족 일부가 무척 수상쩍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했다. 그걸 조사하기 위해 다수의 첩자를 투입했지만 단 한 명도 살아서 돌아온 자가 없다고 했다. 그 때문에 그래듀에이트는 물론이고 오너 급도 몇 명 보냈었던 모양인데, 모두 연락이 두절되었다.

결국, 상부에서 꺼내들 수 있는 마지막 카드는 제2근위대의 투입이었다. 적기사(Red Knight)가 과연 사막에서도 쓸 만한지 테스트도 할 겸…….

그런데 사막부족이 있는 지점까지 곧바로 공간이동을 해서 가지 않고, 왜 산맥을 타고 넘어가며 이 고생을 하고 있을까? 그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10년 전쯤부터 알카사스 왕국을 통과하는 공간이동 마법을 쓰고 살아남은 사람이 단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알카사스가 마도왕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우수한 마법사들이 득시글거리는 나라인 만큼, 마법을 통해 뭔가 장난질을 쳐 놓은 게 아닌가 짐작하고 있을 뿐이다.

어쨌거나 그런 이유로 월터는 안내인들과 함께 산맥을 넘어 이곳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알카사스에 들어 온지 며칠 되지도 않아 기습을 당했다. 그것도 알카사스의 정규 기사단에게.

더군다나 그들은 잠자리에 든 그를 향해 경고조차 하지 않고, 다짜고짜 마법공격부터 퍼부었다. 생포하면 좋지만, 여의치 않다면 죽이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당연히 또 다른 의문이 싹튼다. 자신이 코린트의 근위기사라는 것을 알고도 그런 초강수를 동원했을까? 대체 뭘 믿고?

그가 산맥을 넘어 밀입국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것 외에는 불법적인 일은 아무것도 저지른 게 없다. 그리고 그가 앞으로 행할 임무도 알카사스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었다.

만약 이번 일로 외교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곤란한 쪽은 알카사스였다. 그렇다고 저들이 이쪽의 정체를 몰랐다고 하기에는 동원한 전력이 너무 엄청났다. 정체불명의 잡범 하나 잡겠다고 수십 명에 달하는 기사와 마법사를 동원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변명이었으니까.

물론 이 모든 것이 라이와 대장 일행 때문에 발생된 일로 인해 이렇게까지 꼬여 버린 것이었지만, 그걸 월터가 알 수 있을 리 없다.

“도대체가 이유를 알 수가 없네. 어쩌면 뭔가 협잡질에 걸려든 거 아냐?”

산맥을 넘어올 때 마법사 한 명을 지원해 달라고 했던 요청도 기각되었다. 현지에 가 보면 지원해 줄 마법사가 있다는 설명과 함께. 그리고 몰몬트 산맥을 통과시켜 준 길잡이들은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사막까지 안내할 새로운 길잡이들이 곧 올 거라며 그를 혼자 남겨 두고 사라져 버렸다.

요 근래 일어났던 일들을 차근차근 되짚어 생각해 보면 누군가가 파 놓은 함정에 제 발로 걸어들어가 풍덩 빠진 것이라고 월터가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젠장, 어떤 놈이 날 못 죽여서 안달이 난거지? 뭐 좋아. 돌아가서 확인해 보면 곧바로 알 수 있을 테니까.”

본국에 돌아가는 대로 그는 자신이 가진 모든 권한을 총동원해서 철저하게 조사해 볼 생각이었다. 물론 알카사스의 방비 상태가 어떤지 점검하는 게 임무였다고 하면 뭐라 따지기도 힘든 노릇이었지만. 문제는 그게 자신의 목숨을 가지고 찔러 본 거라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상대가 설혹 자신의 상관이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술 한 잔은 얻어먹고 넘어가야 한다는 게 소드 마스터를 상관으로 두어 소심할 수밖에 없었던 월터의 야무진 각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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