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랜딜 공작의 고심
말토리오 산맥에 엘프들의 왕국을 건설한다는 계획은 착착 진행되어 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백만 인구를 지닌 국가를 건설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옵니다, 전하.”
에스테반 장로의 말에 그랜딜 공작은 한숨을 푹 내쉰 후 한참을 고심하다 입을 열었다.
“드워프들을 좀 더 쥐어짜면……?”
그러자 그랜딜의 좌측에 서 있던 팔로마 장로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조언했다.
“전하, 더 이상은 안 되옵니다. 지금도 한계까지 쥐어짜다 보니 드워프들의 불만이 극에 달해 있사옵니다. 이러다 자칫 더 이상은 못하겠다며 손을 놓을 위험이 너무 큽니다. 우리처럼 지혜로운 엘프가 아닌, 대가리에 든 게 근육뿐인 무식한 놈들인지라 눈이 뒤집히면 그분과의 면담을 요청해 따지겠다고 덤벼들 우려까지 있습니다.”
그렇다. 지금까지는 아르티어스의 명령이라며 드워프들의 등골을 쪽쪽 빨아먹고 있었는데, 혹시라도 자신들이 그분의 명령을 사칭하고 있었다는 걸 드워프들이 눈치라도 채게 된다면 역으로 이쪽이 당할 우려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천문학적인 비용이 소요되는 건국 자금을 충당할 길이 없는 것이다.
말토리오 산맥에 정착시킨 엘프보다 아직 크루마에 남아있는 엘프가 훨씬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유한 자금은 벌써 그 밑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어찌하면 좋을꼬? 드워프들의 물건이 아니라면 돈을 벌어들일 수 있는 뭔가가 우리에게는 없지 않은가?”
“있사옵니다.”
이미 생각해 둔 것이 있는지 에스테반 장로가 곧바로 답해왔지만, 그랜딜 공작은 회의적이었다. 그는 떨떠름한 어조로 말했다.
“혹, 마법도구를 생각하고 있다면 말을 꺼내지도 말게나. 그런 물품이 대량으로 풀린다면 알카사스에서 곧바로 조사에 나설 테니까.”
마법왕국인 알카사스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마법도구 시장의 동태를 면밀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그러니 고품질 마법도구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많은 수량이 시장에 풀리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포착하게 된다면, 그들은 곧바로 막대한 인력을 투입하여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할 게 뻔했다.
아직 자리조차 잡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들의 정체가 발각되게 된다면 엘프들의 왕국 건국이 제대로 진행될 수 있을 리가 없다. 특히 크루마 제국이 엘프들의 이탈을 가만히 놔둘 리 없을 것이다. 그걸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랜딜 공작은 마법도구 판매가 엄청난 수입을 가져다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엑스시온을 판매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엑스시온을?”
타이탄의 심장인 엑스시온이라면 한두 개만 팔아도 최고급 마법도구 수백, 수천 개를 판매한 만큼의 수입이 들어온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판매 가격 때문에 이건 개인이 구입할 수 있을만한 물건이 아닌 것이다. 국가 단위라면 혹 몰라도…….
옆에서 말을 듣고 있던 팔로마 장로가 불쑥 끼어들었다.
“팔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그걸 어디에다가 판매한단 말이오? 괜히 팔겠답시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자칫 우리들의 정체만 탄로 날 위험이 있지 않겠소.”
에스테반 장로는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팔로마 장로를 향해 입을 열었다.
“아르곤이 있지 않소. 신성제국 아르곤이라면 우리가 운만 살짝 띄어도 구입하겠다며 미친 듯 달려들 것이오. 게다가 돈이라면 넘치는 나라가 아르곤이니…….”
일리가 있었기에 그랜딜 공작은 고개를 주억거리다 의구심 어린 어조로 질문을 던졌다.
“흠, 아르곤이라면 충분히 괜찮은 판매처지. 하지만 현재 우리 사정상 공식적으로 판매할 수가 없다는 게 문제 아닌가. 그렇다고 크루마의 이름을 팔아 엑스시온을 수출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크루마는 신성제국 아르곤을 잠재적국으로 보고 전략물자의 수출을 엄금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크루마의 이름을 사칭해 엑스시온을 팔겠다고 하면, 자칫 이것이 크루마 황실의 허가를 받고 행한 공식입장으로 오해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엑스시온 수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르곤에서 혹시라도 크루마 황실에 감사를 표하는 사신이라도 보낸다면 끝장인 것이다.
“게다가 비밀리에 어찌어찌 판매했다손 치더라도 그 대금은 어떻게 받아올 거요? 엑스시온 1개의 판매 대금이 한두 푼도 아니고……. 결국 이쪽의 정체를 밝히는 수밖에 도리가 없지 않겠소.”
팔로마 장로의 지적에 그랜딜 공작은 고개를 끄덕이며 찬성했다.
“장로의 말이 옳구려. 어쨌거나 이쪽의 정체를 밝히고 도움을 청하는 수밖에 없는데, 그게 잘 되겠소?”
“걱정 마시옵소서, 전하. 제가 예전에 엑스시온을 판매하며 안면을 터 둔 대신관이 한 명 있사옵니다. 그를 잘 설득할 수만 있다면…….”
에스테반 장로의 말에 그랜딜 공작은 어이가 없는 모양이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엑스시온을 판매했다고? 그럴 리가…, 크루마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들 중 하나가 신성제국 아르곤인데, 엑스시온 판매를 군부에서 묵인해 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 일은 그랜딜 공작이 아르티어스에게 끌려가 크루마에 없었을 때 일어난 일이었다.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 팔로마 장로가 급히 입을 열었다.
“에스테반 장로의 말이 맞사옵니다, 전하. 당시 엑스시온 판매를 적극 추진한 게 군부 쪽이었으니까요.”
엘프리안이 브로마네스에 의해 파괴된 후, 황궁을 또다시 건설해야 하는 처지에 놓인 미네르바는 그 재원 조달을 위해 150여 개에 달하는 엑스시온 판매를 추진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물량을 현금을 주고 구입할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신성 아르곤 제국밖에 없었다.
크루마는 엄청난 돈을 받고 엑스시온을 아르곤에 은밀히 판매한 뒤 그때부터 지금까지 암암리에 코린트와 크라레스를 움직여 알카사스가 아르곤에 엑스시온을 수출하지 못하도록 적극 방해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마도전쟁 이후 굉장히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불구하고, 아르곤 제국은 아직까지도 당시 잃어버린 전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아르곤에 엑스시온 판매를 하는 게 그리 어렵지만은 않겠구먼.”
“맞사옵니다, 전하. 그리고 이번 기회에 엑스시온 판매를 통해 아르곤을 우리의 우군으로 만드는 것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되옵니다.”
“흠, 우군이라……?”
에스테반 장로는 확신에 찬 어조로 강하게 대답했다.
“저희가 엘프 왕국 건립을 선포한다면 다른 강대국이야 모르겠지만 크루마는 반드시 적대적으로 반응할 것이 분명하옵니다. 크루마 마법 전력의 태반을 차지하고 있는 게 저희 엘프들이니까요.”
“그건 그렇지. 어쩌면 크루마뿐만이 아니라, 다른 강대국들도 적대적으로 대응할 확률이 농후하지. 그들로서는 기껏 안정되어 있는 현 대륙 정세가 우리로 인해 흐트러지는 걸 원치 않을 테니 말이야.”
“그렇기 때문에 우군으로 포섭할 수 있는 나라는 어떻게 해서든 저희 쪽으로 끌어들여야 하옵니다.”
그랜딜 공작은 에스테반 장로의 말에 충분히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생산할 수 있는 엑스시온이라고 해 봐야 몇 개 되지도 않는데 그것만으로 그들이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아마 받아들일 거라 생각되옵니다.”
“경이 그렇게 확언을 할 정도라면 충분한 복안이 있다는 말이겠지?”
“그렇사옵니다. 대신 예전에 실험을 하다 폐기한 듀얼 엑스시온 기법을 그들에게 알려줄까 하는데…, 괜찮겠사옵니까?”
그랜딜 공작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별 쓸모도 없는 건데, 그거 가지고 괜찮겠느냐?”
“그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좋아. 경에게 전권을 맡길 테니 알아서 잘해 보게나.”
“전하의 신뢰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나이다.”
“그래, 부탁하네.”
예를 갖춘 후, 물러나는 에스테반 장로의 뒷모습을 보던 그랜딜 공작은 문득 떠올랐다는 듯 팔로마 장로를 향해 물었다.
“참, 일전에 왔던 호비트는 어떻게 처리했는가?”
아르티어스가 무슨 짓을 한 건진 알 수가 없지만, 꽤 수준 높은 기사 한 명이 위대하신 분의 명을 받았다면서 찾아왔었다. 쓸 일이 있으면 부를 테니 그때까지는 여기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말을 위대하신 분으로부터 직접 들었다면서.
“아, 그 호비트 말씀이시군요. 일단 아래쪽 마을로 내려보냈사옵니다.”
그랜딜 공작은 걱정스럽다는 듯 턱수염을 신경질적으로 쓰다듬었다. 한낱 호비트 하나를 신경 쓸 정도로 한가한 그랜딜 공작이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자가 아르티어스가 보낸 호비트라는 점이다.
“여기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셨다는데, 마을에 내려보내도 괜찮을까……?”
“너무 근심하지 않으셔도 괜찮을 듯하옵니다. 만약 위대하신 분의 연락이 와도 마법으로 곧바로 데려올 수 있지 않사옵니까. 그리고 절대 마을 밖을 벗어나지 말라는 확답까지 받아놓았고, 혹시 몰라 감시자 몇 명을 붙여 두었사옵니다.”
“감시자를?”
“예. 위대하신 분의 명을 받았다고는 하나, 저희가 직접 들은 것도 아니지 않사옵니까.”
여기까지 말한 팔로마 장로는 혹 누가 들을세라 목소리를 낮춰 덧붙였다.
“그리고 혹 그분의 밀명을 받고 우리를 감시하기 위해 온 것인지도 의심되옵니다.”
팔로마 장로의 시원한 일 처리가 마음이 든 그랜딜 공작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잘 처리했군. 그래, 뭐 수상쩍은 부분은 없고?”
“그런 건 없었사옵니다. 다만…….”
팔로마 장로가 대답을 주저하며 말끝을 흐리자 그랜딜 공작은 호기심에 다급히 되물었다.
“다만?”
“저희 쪽의 방심을 유도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사오나 매일매일 주색잡기(酒色雜技)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하옵니다. 게다가 감시자로 붙여 놓은 여 엘프에게도 하룻밤 어떻게 안되겠냐면서 얼마나 치근거렸던지 남자 엘프로 교체해 달라는 불만까지 접수되어 있는 상태라…….”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말에 그랜딜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 그것참 이상하군…….”
아르티어스가 보내온 사람이다. 당연히 그자를 조사해 보지 않았을 리 없다. 뷰 마나포스만 해봐도 대제국의 근위기사급에 이르는 엄청난 수준의 그래듀에이트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런 자가 수련은 내팽개치고 주색잡기로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그래듀에이트가 되기 위해서는 재능만이 아닌, 일반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반복되는 고된 훈련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래듀에이트가 되었다는 소리는 그러한 훈련이 완전히 몸에 익어 하루라도 훈련을 하지 않으면 찝찝해 가만히 있지 못한다.
잠시 고심하던 그랜딜 공작이 단호한 표정으로 지시했다.
“감시 인력을 3배로 보강하여 밤낮을 가리지 말고 철저하게 감시하도록! 그리고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고 왕국을 위해 그 호비트를 꼬실 여 엘프가 있는지 알아보도록.”
“즉시 이행하겠나이다,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