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7화 (823/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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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이동 마법으로 아르곤으로 간 에스테반 장로는 예전에 엑스시온 판매 건으로 인해 안면을 터 뒀었던 대신관을 은밀히 수소문하였다. 이 일은 극비를 요하는 것이었기에 아르곤의 타이탄 생산에 있어서 강력한 권한을 행사하는 위치에 있는 그를 찾아가 직접 담판을 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 사이에 아르곤 제국 내에 20명밖에 없다는 주교(主敎)가 되어 있었고, 타이탄 생산과 구매의 최고 책임자가 되어 있었다.

정말이지 엘프들을 보호해 주시는 신께서 가호를 베풀어 주고 있다고밖에는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주교와의 면담은 즉시 받아들여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르곤에서는 아직까지도 에스테반 장로가 크루마의 엑스시온 판매 책임자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엑스시온이 절실했던 아르곤으로서는 당연히 에스테반 장로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

“저쪽입니다.”

주교의 집무실 문 앞에는 중무장한 기사 둘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값비싸 보이는 화려한 갑옷만 봐도 일반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한 에스테반은 그들의 허리춤으로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는 그의 예상대로 금박을 입힌 신성문자들이 빽빽이 아로새겨진 20센티미터 길이의 짧은 막대기가 하나씩 달려 있었다. 성기사(聖騎士)의 상징인 오러 소드(aura sword)였다. 아르곤 제국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존재들인 주교에 대한 경호원인 만큼 상당한 실력자들일 것이 뻔했다.

주교실 안으로 안내받아 들어가니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던 노인이 그를 반갑게 맞이해 줬다. 에스테반 장로가 주교와 마지막으로 만났던 게 20여 년쯤 전이다. 수백 년의 수명을 지닌 엘프에게 있어서 20년은 그리 긴 세월이 아니었지만, 인간인 주교는 그 사이에 몰라볼 만큼 노쇠해 있었다. 하기야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아무리 신성력으로 노화를 억누르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의 나이는 이미 90세에 이르러 있는 상태였으니까.

그런데 반갑게 인사를 나누던 에스테반 장로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주교의 뒤에도 성기사 2명이 서 있는 걸 봤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주교와 나눌 대화 내용은 극비를 요하는 것이었기에 성기사들의 존재가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에스테반 장로는 자신의 그런 속내가 드러나지 않도록 세심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아무리 엑스시온을 판매하며 안면을 익혔다고는 하나 그 후로 벌써 20여 년이 지난 후에 갑자기 불쑥 나타나 면회 신청을 했으니 주교로서도 무척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경호를 서고 있는 성기사를 물려달라고 요청한다면 의심부터 할 게 뻔했다.

주교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전혀 변함없는 모습을 지니고 있는 에스테반 장로를 한눈에 알아보고는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서로 간에 인사가 오간 후, 주교가 먼저 서두를 꺼냈다. 지위가 지위인 만큼, 에스테반과 언제까지나 한담만 나누고 있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 여기는 어쩐 일인가? 혹, 판매 허가가 떨어지기라도 한 것인가?”

크루마에서 엑스시온을 아르곤에 마지막으로 판매한 것이 20년쯤 전이다. 그 이후, 더 이상의 추가 물량이 없자 아르곤에서는 몇 번이고 은밀히 사신을 보내 엑스시온을 판매해 달라는 요청을 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 크루마는 이런저런 변명만을 늘어놓을 뿐, 지금까지 단 1기의 엑스시온도 추가 판매하지 않았다.

에스테반 장로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경호를 서고 있던 성기사들을 향해 계속 시선을 돌리자 주교는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걱정 말게. 신앙심이 독실한 기사일 뿐만 아니라 내 허락 없이는 입조차 뻥끗하지 않을 믿을 수 있는 아이들이니 말일세.”

“예, 그럼 일단 주교님께 한 가지 먼저 양해를 구하고 싶은 사안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우리 쪽에서 엑스시온을 판매했다는 걸 아무도 모르게 처리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핫핫, 그건 걱정하지 말게. 어차피 비공식적으로 구입하는 게 우리로서도 이익이니까 말이야.”

에스테반 장로는 주교가 자신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판단한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거래가 크루마와 아르곤의 국가 간의 거래가 아니라 저와 주교님과의 개인적인 거래가 되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거래 대금 역시 크루마가 아니라 저에게 주셔야 하는 거지요. 그리고 이 거래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주교님 이하 극소수로 해 주셔야만 합니다.”

그 말에 주교는 곤혹스럽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흐음, 뭔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군. 좀 더 자세히 말해 줄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주교님.”

“흐음, 자세한 속사정도 모른 체 그렇게 해 줄 수는 없다네. 아무리 내가 책임자이긴 하지만 그건 내 권한을 벗어나는 일이야. 자네도 알다시피 그것의 가격이 어디 한두 푼 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비밀을 유지해 주실 수만 있으시다면 지금껏 주교님께서 단 한 번도 취급하지 못하셨던 최상급품을 제공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물론 수량은 그리 많지 않겠지만…….”

주교의 눈이 번쩍하고 빛났다.

“최상급품이라고?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

신성 아르곤 제국의 성립이 선포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당시 최강국들이라 할 수 있던 코린트, 크라레스, 크루마, 알카사스는 협정을 맺어 1.25 이상급의 엑스시온을 아르곤에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그리고 그 이하급조차도 가급적이면 아르곤으로 흘러들어 가지 못하도록 틀어막았다. 광신도 국가인 아르곤의 군사력이 증대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가능하기에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주교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만약 최상급품을 우리가 아르곤에 제공했다는 것이 밖으로 새어 나가기라도 한다면 코린트나 다른 나라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것은 중대한 협정 위반이 된다. 최악의 경우, 제3차 제국전쟁으로 발전할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만큼, 이렇게까지 비밀 엄수를 요구하는 것도 결코 무리가 아닌 것이다.

“최상급품이라고만 하지 말고…, 정확히 어느 정도의 출력을 낼 수 있는 걸 제공해 줄 수 있는지 알려줄 수는 없겠는가? 그래야 내가 다른 주교들을 설득할 수 있지 않겠나.”

에스테반 장로는 상체를 앞으로 뻗어 최대한 주교와 가깝게 한 후, 속삭이듯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해 줬다. 성기사들이 엿듣지 못하도록.

“1.5를 드릴 수 있습니다.”

“헉!”

지금껏 산전수전 다 겪으며 살아온 노회하기 짝이 없는 주교였지만, 이번만큼은 놀라움을 감추기가 힘들었다. 과거, 아르곤에서 교황 전용의 고성능 타이탄을 제작하고자 했을 때, 거기에 들어가는 최고급품의 엑스시온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했던가. 엑스시온 가격보다 코린트나 다른 나라들에 수입허가를 받기 위해 로비하는 데 들어간 돈이 몇 배는 더 많았었다. 그런데 그런 엄청난 물건을 공급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 그 정도라면 주교원에 얘기를 넣어 볼 수 있겠구먼.”

“언제쯤 결과를 알 수 있겠습니까? 제가 그리 오랫동안 머물 수는 없는 처지라서…….”

“물량은 어느 정도나 공급해 줄 수 있겠는가?”

“송구스럽습니다만 비밀유지에 대한 확답을 받기 전에는 공개할 수 없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주교님.”

“내일…, 내일 알려주도록 하겠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주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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