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8화 (82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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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약속시간에 맞춰 에스테반 장로는 주교에게로 안내되었다. 문 앞을 지키고 있는 성기사들의 존재는 변함이 없었지만, 주교실 안에 배치되어 있던 성기사들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두 사람이 나눌 대화가 중요하다는 걸 주교가 알아차린 것이다.

집무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교는 활짝 웃는 얼굴로 에스테반 장로를 맞이했다. 그의 표정만 봐도 주교원의 허락이 떨어졌음을 에스테반 장로는 직감할 수 있었다.

“주교원의 허락이 떨어졌다네. 이번 거래는 철저하게 비밀리에 진행될 테니 조금도 걱정하지 말게. 그래, 물량은 어느 정도 공급해 줄 수 있나? 주교원에서는 그걸 가장 궁금하게 여기고 있다네.”

“쌓여 있는 재고를 판매하는 게 아니니 수량을 속단할 수는 없습니다만, 현 상황이라면 1개월에 1개 정도는 공급할 수 있을 듯합니다.”

1개월에 1개라도 결코 적은 게 아니다. 왜냐하면 하급 출력의 엑스시온이 아닌, 1.5급의 최상급품 엑스시온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교의 얼굴에서는 짙은 실망감이 피어올랐다. 그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을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과거 크루마에서 엑스시온이 대량으로 수입되었을 때, 성능은 비록 1.0급이었다고 하지만 단 1년 동안에 무려 150개의 엑스시온이 쏟아져 들어왔었다. 그런 엄청난 생산력을 지닌 크루마를 주교원에서 얼마나 질투하고, 또 한편으로는 두려워했었는지……. 당시 수입을 총괄했던 주교는 그 공을 인정받아 이 자리까지 승진할 수 있었다.

“쯧, 아무리 1.5급이라지만, 기대한 것에 비해 물량이 너무 적구먼. 귀국은 그만한 능력이 있으니 좀 더 많이 판매해 줄 수는 없겠는가? 물품 대금은 넉넉히 책정해 주도록 하겠네.”

주교의 말에 에스테반 장로는 이제 자신들의 입장을 밝힐 때가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저 노회하기 짝이 없는 주교가 뭔가 수상쩍다는 것을 느낄 테니까.

“제가 처음부터 극비밀리에 이번 거래를 요청하게 된 건 사정이 있어서였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지금 저는 크루마를 대표하여 이곳에 와 있는 게 아닙니다.”

“허, 역시 그랬었구먼……. 그렇다면 지금 자네는 누구를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겐가?”

에스테반 장로는 자신이 엘프 왕국을 대표하여 왔음을 밝혔다. 그리고 현재 엘프 왕국이 처한 상황에 대해서도 대략적으로 설명을 했다. 그런 그의 말을 조용히 들으며 주교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제야 에스테반 장로를 만나며 느꼈던 의문이 이해가 되었으니까.

그동안 아르곤으로의 엑스시온 판매를 철저히 틀어막고 있던 크루마에서 갑자기 1.5급 고성능 엑스시온을 판매해 주겠다고 제안을 해왔기에 주교는 내심 수상쩍게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늙은 여우는 그걸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단 1개라도 수입을 할 수 있다면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게 바로 1.5급의 엑스시온이었으니까.

그건 그만한 가치를 지닌 물건이었다.

“자네가 왜 그렇게까지 비밀 유지에 집착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가는구먼. 좋아,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내 최선을 다하도록 할 테니 안심해도 좋을 걸세.”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주교님.”

“무슨 말을. 그렇게 해야 이쪽도 물건을 계속 공급받을 수 있으니 말이야. 그런데 양을 더 늘릴 수는 없겠는가? 한 달에 겨우 1개라면 우리들이 기대했던 것에 비해 너무 적은 양이야.”

“저희도 좀 더 많이 판매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만, 현 상황에서는 그 정도가 한계입니다.”

“흠, 혹시 엑스시온을 생산할 수 있는 시설 때문에 그러는 것이라면 이쪽에서 모든 걸 제공할 용의가 있네. 그래, 그게 좋겠군. 그쪽에서는 엑스시온을 가동시킬 수 있는 능력 있는 마법사들만 보내주면 되네. 나머지는 이쪽에서 모두 다 제공하도록 하지. 우리 아르곤 제국에 대규모 엑스시온 생산시설을 만드는 거야. 어떤가?”

“그, 그건 좀…….”

에스테반이 가정하고 있던 최악의 순간이 도래했다. 이쪽의 정체를 밝히게 되면 상대가 이런 제안을 해 올 것이 당연하다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가장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거절해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대는 아르곤을 이끄는 절대자들 중의 한 명이었으니까.

“물론 날로 먹을 생각은 전혀 없다네. 엑스시온이 한 개 한 개 생산될 때마다,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충분히 지불하도록 하겠네.”

하지만 그건 절대 승낙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여기에 대량의 마법사들을 투입했다가, 아르곤에서 그들을 덜컥 억류해 버리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물론 저 주교는 바깥세상과 오랜 세월 교류를 해온 비교적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인물이었기에 신뢰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의 나이 90이 넘은 상황. 그가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 것이다. 그의 후임자도 엘프들에게 잘해 줄 거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

“그건…, 힘들겠습니다.”

“자네가 뭘 걱정하는지 잘 알고 있다네. 걱정 말게. 이곳에 오는 엘프들의 안전은 내가 책임질 테니 말일세.”

포기하지 않고 계속 설득하려는 주교를 향해 마냥 반대만 할 수 없었던 에스테반은 화제를 슬쩍 다른 쪽으로 돌렸다.

“굳이 그러지 않으셔도 1.0에서 1.2 정도의 엑스시온이라면 알카사스에서 얼마든지 구하실 수 있지 않습니까?”

“허, 거참. 말도 말게나.”

엑스시온 수입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일단 말을 꺼내기 시작하자 주교는 멈출 수가 없는 모양이다. 그만큼 평소에 쌓인 것이 많았던 것이리라. 그렇다고 그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이 터놓고 하소연을 할 수 있는데도 없었을 것이고. 때마침 자신의 고충을 이해해 줄 수 있는 상대를 만나지 않았는가. 더군다나 그 상대가 자신의 고충을 해결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1.0 이상급의 효율 높은 엑스시온을 생산할 수 있는 나라는 몇 나라 되지 않는다네. 문제는 그들 중에서 본국에 엑스시온을 판매해 줄 만한 나라는 알카사스 정도밖에 없다는 사실이지.”

“그렇다면 약간 성능이 떨어지더라도 0.8 정도를 구해서 사용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 정도 등급이라면 생산할 수 있는 나라가 꽤 될 텐데요.”

“마도대전을 거치며 타이탄 전력에 가장 막심한 피해를 입은 국가가 바로 본국일세. 그 이유는 명확했지. 정규급 출력도 내지 못하는 저급 타이탄은 아무리 많이 만들어서 가지고 있어 봐야 쓸모가 없다네. 오히려 인명피해만 가중시킬 뿐이지.”

이런 주교의 반응을, 사실 에스테반 장로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준비해온 카드를 꺼낼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주교가 이곳에 엑스시온 생산 공장을 만들겠다는 억지를 부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이걸 준비해 왔던 거니까.

“주교님께서는 혹시 타이탄 안에 엑스시온을 두 개 집어넣는 기법에 대해서 들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1기의 타이탄 안에 말인가?”

“그렇습니다.”

주교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대답했다.

“그게 가능한 얘긴가?”

“물론 가능합니다. 과거 본국에서 코린트의 흑기사를 대적하기 위한 고성능 타이탄을 제작하기 위해서 연구했었던 테마들 중의 하나였으니까요.”

“내 아직까지 그런 타이탄이 있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네. 그렇다는 소리는 그 실험은 실패했을 확률이 높겠구만.”

“유감스럽게도 그렇습니다.”

에스테반의 대답에 주교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다시금 물었다.

“실패한 실험에 대한 얘기를 내게 하는 이유가 뭔가?”

에스테반 장로는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실험 자체는 실패가 아니었습니다. 단지 문제가 좀 많아서 실전배치를 하지 않았던 것뿐이지요.”

“어떤 문제인데……?”

“타이탄마다 자아(Ego)가 있고, 그 자아는 엑스시온에서 나온다는 걸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한 몸뚱이에 자아가 두 개 존재하니 어떤 일이 벌어지겠습니까?”

딱히 상대의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라는 듯 에스테반 장로는 계속 말을 이었다.

“고성능의 엑스시온일수록 자아가 강해지는데, 저희들이 연구한 것은 초고성능을 추구한 타이탄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말 안 듣는 타이탄의 자아가 둘씩이나 되다 보니 도저히 통제 불능이라서 생산해 봐야 도저히 쓸 수가 없었던 겁니다.”

그런 이유로 크라레스 최강의 타이탄인 청기사보다도 더욱 막강한 성능을 지녔던 그 실험용 타이탄은 해체되는 것으로 그 짧은 생을 끝마쳐버렸다. 기념비적인 존재로 황궁에 전시해 두기에는 재룟값이 너무 아까웠던 것이다.

“듣고 보니 이해가 가는구먼.”

“하지만 주교님께서 원하시는 건 이 정도의 고성능 타이탄이 아니지 않습니까. 0.8 내외의 저급 엑스시온은 자아도 약합니다.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는 얘기지요.”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는 말에 주교의 관심도가 급격히 높아진다.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아있던 그는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허~, 그래? 그럼 0.8 엑스시온 둘을 넣는다면 출력을 어느 정도 낼 수 있나? 한 1.0 정도는 낼 수 있는가?”

“두 엑스시온 간의 상호 간섭으로 인해 출력이 안정적이지 못하고 출렁거리는 게 좀 탈이긴 합니다만, 1.0에서 1.4 정도까지는 충분히 낼 수 있습니다. 문제는 고급 엑스시온에 비해 저급 엑스시온들의 경우 증폭효율이 떨어지는 만큼, 마나 소모가 크다는 게 탈이지요. 하지만 그것도 탑승하는 기사가 미리 알고 대처한다면 별문제 없이 넘어갈 수 있는 일입니다.”

1.0에서 1.4 정도의 출력을 낼 수 있다는 말에 주교는 군침을 꿀떡 삼키며 자신도 모르게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만큼 그 말이 준 충격이 강했던 탓이다.

만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처럼 주변 강대국들의 눈치를 보며 엑스시온을 팔아 달라며 애걸복걸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실험을 통해 충분히 통제가 가능하다고 하지 않는가.

“허, 그게 사실이라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로군. 이런 말 하면 염치없지만, 제조법을 좀 알려줄 수 없겠는가. 댓가는 후하게 지불하도록 하겠네.”

저자세로 부탁해 오는 주교의 모습에 에스테반 장로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신성 아르곤 제국과 장차 탄생할 엘프 왕국 간의 우정을 위한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허허, 정말 감사한 일이로군. 내 교황 성하께 엘프 왕국의 이런 기특한 마음을 그대로 전하겠네.”

어찌 되었건 이번 협상으로 인해 아르곤 제국과 엘프 왕국 둘 다 서로 간에 필요한 것을 충분히 챙길 수 있었다. 그 후 좀 더 구체적인 협상을 통해 개당 가격과 인도 방법 등을 논의한 뒤, 에스테반 장로는 기분 좋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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