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4화 (830/930)

이용하고, 버리고

“이야~, 당신들을 만나지 못했다면 큰일 날 뻔했습니다. 길은 잃어버렸지…, 먹을 건 하나도 없지…….”

짐짓 너스레를 떨고 있는 월터.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상대방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해 은밀하게 눈빛을 번뜩이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깊은 산골짜기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생각하기에는 실력들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식량을 얻어먹는 와중에 이들이 꽤나 오랜 시간 산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그들이 지니고 있는 건 말라비틀어지고 냄새나는 건조 식량뿐이었으니까.

‘트레저 헌터(Treasure hunter)들인가? 아니면 밀수꾼?’

자신들의 정체에 대해 저렇게까지 연막을 치는 것으로 보아 그것 외에는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무엇보다 월터의 마음에 걸리는 게 한 가지 있었다. 그건 라이라는 소년에 대한 의문이었다.

대장이라 불린 중년 사내와 샘은 라이가 지니고 있는 진면목을 모르고 있는 것 같았지만, 월터는 느끼고 있었다. 은근히 흘러나오고 있는 마나의 기운을……. 그리고 그 기운이 월터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아카데미의 상급반 수련생 정도의 수준밖에 안 되는 기운이긴 했지만, 문제는 수련생이라고 하기에는 기운의 크기가 너무 일정하다는 데 있었다. 훨씬 더 강한 기운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을 때에나 저런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을 월터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소년의 나이가 너무 어리지 않은가.

의뭉을 떨며 일행의 정체에 대해 고심을 하던 월터의 상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뭔가 음습한 기운이 엄청난 속도로 접근해 오는 것을 느꼈던 것이다. 월터가 홱 고개를 돌려 어딘가를 뚫어져라 바라봤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가 왜 그런지 몰라 고개만 갸웃하며 서 있을 뿐이다.

“갑자기 왜 그렇게 긴장한 표정을 짓는 거요?”

미심쩍은 듯 숲을 노려보고 있던 월터가 다급히 대답했다. 급속도로 접근해 오는 수십이 넘는 기척들. 몬스터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기운의 형태가 너무 이질적이었기 때문이다.

“저쪽에 뭔가가…….”

이때, 저 멀리 울창한 수풀을 헤치며 공포에 질린 사내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 나오는 게 보였다. 여기저기 찢어진데다가 풀잎이나 흙이 잔뜩 묻은 옷은 엉망이었다. 게다가 험한 수풀을 헤치면서도 앞에 신경을 집중하지 못하고 뒤를 힐끔거리던 탓에 나뒹굴기까지 하고 있었다. 사내에게 저렇게까지 공포를 안겨 준 게 도대체 뭘까?

순간, 대장과 샘, 그리고 라이의 얼굴에 긴장감이 떠오른다. 키메라 오크 떼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키메라 오크가 그리 흔한 것도 아니고, 또 어쩌면 말이 씨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곧이어 또 다른 사내가 한 명 더 수풀을 뚫고 달려 나왔고, 그 뒤를 쫓아 시커먼 형체 하나가 숲에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두세 마리가 더 튀어나와 가장 뒤처져 달리고 있던 사내를 향해 달려들었다.

바짝 긴장한 채 숲 쪽을 바라보던 샘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듯 중얼거렸다.

“휴우∼, 난 또 뭐라고. 코볼트잖아.”

코볼트는 놀과 비슷하게 생긴 유인원형 몬스터다. 놀에 비해 덩치가 좀 더 크긴 했지만 위험성 면에서는 그리 큰 차이가 없었다. 물론 비무장 상태인 민간인에게는 큰 위협을 안겨줄 수도 있겠지만, 잘 훈련을 받은 병사나 갑주를 단단하게 챙겨 입은 모험가들에게는 그리 큰 위협을 줄 수 없는 몬스터다.

몬스터가 코볼트임을 확인한 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왜 도망치고 있는 거지?”

코볼트 서너 마리에게 쫓기는 사내들은 멀리서 봐도 꽤나 단단하게 무장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대장의 의문에 샘이 비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대꾸했다.

“떼거리한테 공격받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대비도 안 하고 야영하고 있다가 습격당한 거겠죠. 아니면 저런 놈들조차 처리 못 할 정도로 허접한 놈들이거나.”

“흠, 그럴지도…….”

이때, 숲 속에서 코볼트 몇 마리가 더 달려 나왔다. 녀석들은 맹렬한 속도로 달려가 뒤처져 있던 사내를 덮쳐 버렸다. 사내는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내고 덮쳐드는 코볼트의 목을 붙잡아 뒤로 밀어내려 했지만, 안타깝게도 코볼트는 그 한 마리만이 아니었다. 다른 녀석들이 양옆에서 달려들며 마구 씹어댔다. 잘 다듬어 놓은 가죽갑옷을 입고 있긴 했지만, 삽시간에 걸레쪽이 되어 버렸고 시뻘건 핏물이 솟구쳤다.

이때, 또 다른 한 명이 숲 속에서 달려 나오더니 쓰러진 사내의 몸을 게걸스럽게 물어뜯고 있던 코볼트들을 향해 칼을 휘둘렀다. 그 사내는 먼저 튀어나온 두 사내에 비해 월등한 실력을 지니고 있는 듯했다. 단 한 번의 칼질에 코볼트 세 마리의 목이 베어져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그 사내가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부축하려 할 때, 숲 속에서 코볼트 수십 마리가 더 달려 나왔다. 마치 시체를 노리는 까마귀들처럼 사내들을 덮치는 코볼트들로 인해 그 일대가 시커멓게 변해 버렸다. 마지막으로 달려 나온 사내의 실력이 놀랍기는 했지만, 안타깝게도 동료를 죽음에서 구해 낼 수는 없었다. 그가 몇 마리의 코볼트를 베고 있는 동안, 그의 동료는 뒤쪽으로 돌아 공격해 온 코볼트들에 의해 피범벅이 되어 쓰러져 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빤히 보고 있으면서도 누구 하나 도와주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저런 유인원형 몬스터들은 군집을 이뤄 살아간다. 아무리 약한 몬스터라도 수십, 수백 마리가 달려들면 당할 도리가 없다.

지금 보이는 코볼트가 20여 마리도 채 되지 않았지만, 저 숲 속에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가 없는 상황. 사내들에게는 안됐지만, 코볼트들이 저들을 공격한다고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에 안전한 곳을 찾아 도망치는 게 현명한 선택이었다.

“대장, 아직 몇 마리 되지 않을 때 구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요? 우리가 힘을 합한다면 충분히 저들을 구할 수 있잖아요?”

무시무시한 대장의 검술 실력을 잘 알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런 라이의 말에 샘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헛소리하지 마! 그보다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어지간한 위급 상황에서도 표정 변화가 거의 없던 샘의 얼굴이 일그러진 것을 본 대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래? 겨우 코볼트 몇십 마리 정도 가지고…….”

“코볼트가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에 대장은 눈을 살짝 가늘게 뜨며 코볼트 떼를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코볼트가 맞는데……?”

“빌어먹을…, 저건 놀입니다.”

코볼트와 놀이 비슷하게 생긴 건 사실이었지만, 그 둘을 헷갈려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냐하면, 놀은 코볼트의 반 토막이라고 할 정도로 체구가 작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잘 훈련된 병사라면 놀 서너 마리는 혼자서도 충분히 상대할 정도로 약한 몬스터였다.

“놀이라고? 저렇게 덩치가 커다란 놀이 어디 있어?”

아무리 숲과 몬스터의 습성을 꿰고 있다는 레인저인 샘의 말이었지만 대장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여우와 늑대만큼이나 코볼트와 놀의 차이는 컸다.

“얼마 전에 우리도 경험했지 않습니까? 덩치가 트롤에 필적할 정도로 컸던, 그 빌어먹을 오크들 말입니다.”

샘의 말에 대장은 경악했다.

“허걱! 그렇다면 설마 저것들도 키메라라는 말이야?”

“예, 틀림없습니다.”

“젠장,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군.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자.”

대장 일행이 당황한 표정으로 몬스터와 반대 방향으로 재빨리 도망치는 것을 보면서도 월터는 그들을 따라가지 않았다. 그는 그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예의 소유자였으니까.

오히려 월터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저게 놀이라고? 게다가 키메라?”

코볼트만 한 덩치를 지닌 놀이라니……. 마법을 잘 알지 못하는 월터였지만 저 몬스터가 정말로 놀이라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상식의 근본이 뒤집어진다고 봐야 했다. 키메라 제작이라는 게 각 생명체의 가장 우월한 부분만을 잘라내어 짜깁기한 후, 마법을 통해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그는 알고 있었다.

즉, 코끼리의 몸통에 사자의 머리통을 가져다 붙이는 것은 가능할지 몰라도, 사자를 코끼리만 하게 덩치를 불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키메라들은 그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 들리지 않도록 쑥덕거리던 사내들의 말이 맞다는 전제하에서.

“흐흐흣, 이 근처에 외지인이 들어오기만 해도 알카사스 놈들이 경기를 일으킨 이유가 바로 저것 때문이었군.”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자신 하나를 잡겠다고 대규모의 병력이 동원되어, 기습공격을 가해 오지 않았던가. 방심하고 있던 월터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인 황당스런 사건이었지만, 왜 자신이 그런 일을 당했던 것인지 이제야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즉, 외지인에 대해 철통 같은 경계망이 펼쳐져 있는 곳에 그가 발을 집어넣은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여행자처럼 꾸미긴 했지만 별다른 일도 없이 여관에서 며칠 동안 빈둥거리며 놀기까지 했으니, 충분히 첩자라는 오해를 살 수 있는 상황이다.

물론 첩자는 맞긴 했다. 이곳이 아닌, 사막에 대한 정보 수집 임무를 지닌 첩자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건 일단 저들을 구하는 게 우선이다. 저들이 코린트의 정보부 소속 병사이거나, 아니라고 해도 상관이 없다. 증거와 증인이 있어야 정보로서의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 게다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보니 절대 평범한 모험가들은 아니다.

마음을 먹은 월터는 도주하고 있는 사내들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

“이봐! 이쪽이야. 이쪽으로 오라고!”

놀에게 쫓겨 필사적으로 도망치던 사내들은 월터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방향을 바꿔 그를 향해 미친 듯 달려왔다. 그리고 그 소리는 황급히 도망치고 있던 대장 일행에게까지 들렸다.

“저런 미친 새끼! 그렇게 죽고 싶으면 혼자 죽을 것이지, 왜 저런 쓰잘데기 없는 짓거리를 해!”

투덜거리는 샘을 향해 대장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닥치고 전방이나 신경 써! 저놈들이 키메라들을 막아 주는 동안 우리는 이곳에서 최대한 멀리 벗어나야 한다. 그게 우리들이 살 길이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대장은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상황을 정확히 알아야 그것에 맞게 적절한 대처를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그는 볼 수 있었다. 100여 마리가 넘는 유인원형 몬스터들이 숲 속에서 새까맣게 달려 나오고 있는 것을.

‘제기랄! 당최 편하게 넘어가는 날이 단 하루도 없군. 키메라에 쫓기질 않나, 저런 미친놈을 만나질 않나. 이러다 코린트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나 모르겠군.’

대장은 사람들을 구한답시고 소리를 지른 월터를 원망했지만, 사실 이 모든 사단을 만든 원흉은 그 자신이었다. 그가 비밀연구소를 들쑤셔 놓지 않았다면 이런 사달이 벌어졌을 리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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