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7화 (833/930)

악연의 시작

정신이 든 라이는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몸으로부터 전해지는 감각이 너무나도 이상했던 탓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들이 자신의 몸을 간질이고 있는 것 같은 낯선 느낌.

“이…, 이게 뭐야?”

왜 내가 발가벗고 있지? 그리고 온몸에 묻어 있는 이 검붉은 것들은 또 뭐야?

손은 물론이고 자신의 몸까지 이리저리 살펴봤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본다고 해도 없는 옷이 갑자기 생겨날 리가 없었고, 몸에 묻어 있는 시뻘건 핏자국과 살점들이 사라질 리도 만무하다.

킁킁~.

온몸을 뒤덮고 있는 비릿한 혈향 안에는 몬스터 특유의 악취가 짙게 섞여 있었다.

“맞아!”

그제서야 자신을 향해 달려들던 시커먼 몬스터 떼가 떠올랐다. 광기에 번뜩이는 시뻘건 눈동자. 그리고 침을 질질 흘리는 주둥이 속에서 새하얗게 번쩍거리던 날카로운 송곳니들. 어떻게 그 몬스터들 속에서 살아나와 이곳에 쓰러져 있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던 라이의 얼굴이 갑자기 급격히 일그러졌다.

“이런 젠장! 결국 난 미끼가 되어 버려진 건가?”

대장의 명령에 따라 도끼를 들고 몬스터들을 막아섰을 때, 두려움에 잠깐 뒤를 돌아봤었다. 뒤를 받쳐 주겠다던 대장과 샘을 보며 기운을 내기 위해서였다. 그런 라이의 두 눈에 들어온 것은 열심히 도망가고 있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순간 라이의 머릿속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것은 짙은 절망감과 인간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대장이 웃으며 부드러운 말로 자신을 대해 주긴 했지만 눈치 빠른 라이가 모를 리가 없었다. 자신을 동료로서가 아닌, 뭔가 이용하기 위해 어르고 뺨을 치고 있다는 것을. 그래도 대장만큼은 믿고 싶었다.

집을 떠난 뒤로 오크에게 붙잡혔을 때도, 그리고 겨우 구출을 당해 도시로 들어갔다가 노예로 팔렸을 때도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만큼은 변하지 않았다. 그건 기사였던 아버지에게 오랜 시간 배워 왔던 교육의 힘이었다. 하지만 노예 검투사가 되었다가 다시 용병단으로 팔려갔을 때는 그 생각이 많이 흔들렸었다.

거짓된 혓바닥으로 타인을 농락해 자신의 이득을 취하기보다는 약자를 보호하며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게 뼛속까지 기사였던 아버지로부터 받은 교육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살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자신은 항상 이용만 당해 왔고, 결국은 쓰레기처럼 버림을 받아왔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부드러운 미소로 라이를 다독거려 주던 대장은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버리고 도망쳤다. 뒤를 받쳐 주겠다며 자신을 몬스터들을 막는 미끼로 던져 놓고 말이다.

대장의 얼굴이 떠오르자 또다시 느껴지는 짙은 배신감에 라이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언젠가 다시 보게 된다면 네놈의 목을 댕강 잘라 줄 테다. 이 빌어먹을 새끼!”

라이는 이제부터는 두 번 다시 어리숙하게 살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다. 받은 대로 돌려주리라. 아니, 할 수만 있다면 남이 자신을 이용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뒤통수를 치더라도 다시는 이런 개 같은 꼴을 당하지 않으리라. 라이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이를 으드득 갈며 나약했던 지난날들을 반성하던 라이는 일단 자신이 당면한 상황에 대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왜 지금 발가벗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옷은 물론이고, 무기와 식량을 넣어 둔 짐 보따리까지…, 아무것도 없었다.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니 이런 적이 몇 번 있긴 했다. 위기에 처할 때마다 정신을 잃은 것 같았고, 눈을 떠보면 알 수 없는 곳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이 정신을 잃는 것인지, 정신을 잃었을 때 뭘 했는지.

생각에 잠겨있던 라이는 서늘한 바람에 몸이 차가워지자 언뜻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정신을 잃었을 때 자신이 뭘 했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문제는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

옷은 물론이고, 식량이 들어있던 짐 보따리까지……. 허리에 차고 있던 물통에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목이 급격하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머릿속은 비관적인 생각으로 조금씩 채워지기 시작했다. 식량도 옷도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여기가 어딘지 전혀 모르겠고, 뱃가죽은 등가죽에 붙을 정도고, 목구멍은 물을 달라고 아우성이니 말이다.

‘어떻게 보면 자유를 되찾았다고 좋아해야 할 수도 있는 상황이잖아. 현 상황이 암울하긴 해도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좋은 결과가 어디 있어?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이보다 어려웠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냐. 최소한 오크 굴에 갇혔을 때보다는 낫잖아. 빌어먹을! 아직 힘이 남아 있을 때 살길을 찾아보자.’

마음을 다잡은 라이는 힘을 내어 몸을 일으켰다. 자유를 되찾았지만, 터벅터벅 내딛는 그의 발걸음은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라이로서는 다행히도 3시간 정도밖에 걷지 않았는데, 산속에서 흘러내려 오는 것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수량이 많은 하천을 발견할 수 있었다. 허겁지겁 달려가 배가 터지도록 벌컥벌컥 들이켰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을 갑자기 잔뜩 마신 탓에 뒷골이 아파 왔지만, 그의 입에서는 만족스러운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물이라도 잔뜩 마시고 나니 살 만했던 것이다.

배가 어느 정도 채워지자 라이는 물속으로 조심조심 걸어 들어갔다. 엄청난 한기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 왔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온몸에 묻은 피와 땀, 그리고 코를 찌를 것만 같은 악취……. 이 찝찝한 느낌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씻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물뿐이긴 했지만, 뱃속이 든든해지니 비관적이었던 생각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희망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하천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다 보면 작은 개척마을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산길을 헤매는 것에 비한다면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커지는 셈이다.

희망을 품고 라이는 하천을 따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열심히 걸음을 옮기고 있자니 찬물로 인해 젖었던 몸도 점차 말라갔고, 싸늘하게 식었던 몸이 조금씩 따뜻해졌다. 누군가 사람을 만나 약간의 도움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이 암울한 지옥에서 벗어나 생명을 건질 수 있으리라.

운 좋게도 그의 바램은 상상 이상으로 빨리 이루어졌다. 해가 지기도 전에, 그는 숲 저 멀리 높게 솟아올라 있는 작은 망루를 하나 발견했던 것이다. 경계를 서고 있는 병사의 모습도 어렴풋이 보였다.

“살았다!”

이 절대적인 행운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마을이 하천 건너편에 있다는 사실. 얼음처럼 차가운 물에 또다시 들어가야만 한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온몸이 부르르 떨리는 라이였다. 온몸에 덕지덕지 묻어 있던 피와 땀을 씻어 낸답시고 이미 한차례 들어가 봤기에 물속이 얼마나 차가운지 그의 몸이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류로 올라가면 하천의 폭이 좁은 데가 있지 않을까?’

하지만 어느 세월에 상류로 올라가 하천 폭이 좁은 데를 찾는다는 말인가. 그러기에는 라이는 너무나 지쳐 있었고, 굶주려 있었다. 마을이 있으니 어쩌면 하천을 건널 수 있는 다리나 배가 있을 수도 있다. 자신의 짐작이 틀려 도저히 방법이 없으면 헤엄쳐서 건너갈 생각으로 라이는 하천을 따라 부지런히 내려갔다.

얼마 내려가지 않아 라이는 자신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느끼며 환호성을 내질렀다. 하천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가 하나 건설되어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다리가 점차 가까워지자 라이는 과연 저 다리를 통해 건너편으로 건너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다리가 너무나도 허접스러웠기 때문이다. 통나무를 이용하여 대충 얼기설기 얽은 뼈대. 그 위에 통나무를 반 토막 내어 납작한 부분이 위쪽으로 가도록 쭉 연결해 놨다. 게다가 폭은 사람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는 빈약한 다리였다.

‘이것도 다리라고 만들어 놨나……?’

이때, 라이는 두 눈이 휘둥그레진 상태로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하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 신경을 다리에 집중하고 있다 보니 그 사람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적갈색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상당히 매혹적인 미녀였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이리저리 훑어보고 있었지만 라이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사람을 만났다는 것 그 자체가 너무나도 반가웠으니까.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지금 홀딱 벗고 있다는 것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반갑습니다. 이런 곳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라이가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다가서자 여인은 후다닥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망토 자락을 옆으로 확 젖혔다. 그러자 허리에 차고 있는 60cm 정도 길이의 단검(Shot sword)이 보였다. 언제든지 단검을 뽑아 공격하겠다는 무언의 경고인 셈이다. 망토 안에는 상당히 공을 들여 만든 것처럼 보이는 멋진 가죽갑옷을 입고 있다. 그녀는 싸늘한 음성으로 소리쳤다.

“넌 뭐냐? 왜 홀딱 벗고 다니는 거지?”

순간, 라이는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찾아 들어가고 싶었다. 그제서야 자신이 지금 홀딱 벗고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으니까. 너무나도 쪽팔렸다. 하천을 따라 내려올 때 대충 나뭇잎이라도 따서 아랫도리를 가릴 걸 하는 후회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미 이런 꼴을 보인 거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지금 이 근처에는 저 여자 혼자뿐이었으니까. 라이는 슬그머니 한 손으로 아랫도리를 가리며 여인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재수가 없다 보니 산적을 만나 몽땅 털렸습니다. 혹시, 이 근처에 마을이 있습니까?”

“강을 건너 저쪽으로 20분 정도 걸어가면 마을이 있긴 하지. 물론 대낮에 홀딱 벗고 다니는 너같이 수상쩍은 인간을 받아들여 줄 것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말이야.”

비비 꼬인 말투. 눈살을 찌푸리며 퉁명스럽게 대꾸하는 여인의 모습에 지금 자신을 비웃고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 순간 반가움에 살가운 표정을 짓던 라이의 얼굴이 싸늘하게 바뀌었다.

“그건 네가 판단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

“뭐라고? 이게 죽으려고 환장을 했나? 너같이 허접한 놈들은 내 말 한마디면 당장 목이 잘린 시체가 되어 어디 깊은 산 속에 묻어 버릴 수도 있어!”

표독스런 말투에 라이가 잠시 대꾸를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여자가 또다시 소리쳤다.

“아이, 짜증나. 가죽 좀 저렴한 가격에 사겠다고 이리로 왔다가 저런 미친놈을 만나게 될 줄이야.”

신경질적으로 몸을 흔들며 소리치던 그녀는 갑자기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라이를 째려봤다.

“아니아니, 그냥 죽이는 것보다 내 기분을 상하게 한 죄로 잡아서 노예로 팔아 버릴까?”

일부러 거칠게 말해 라이의 기를 죽이려는 의도였겠지만, 오히려 노예라는 단어에 라이의 두 눈에 짙은 살기를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뭐라고? 날 노예로 팔아? 이런 망할 년이!”

대장의 배신 이후 다시는 나약하게 살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을 하긴 했지만 지닌 성격이 쉽게 바뀌는 건 아니다. 그랬기에 여인의 조롱하는 듯한 말투에도 성질이 나긴 했어도 애써 화를 참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눈에 띌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아니던가. 미녀를 보호하는 건 기사의 로망이요, 사명과도 같았다. 하지만 그런 세뇌와도 같은 생각이 뒤흔들릴 만큼 노예라는 단어가 주는 충격이 컸다.

노예로 잡혀 겪어야 했던 처참했던 지난날들이 떠오르자 라이의 가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흉폭성이 대가리를 꿈틀거리며 기어 나왔다.

“네년의 그 잔망스런 주둥아리를 쫙 찢어주마. 이 망할 년!”

살심을 품은 라이가 여인을 향해 달려들었다. 여인은 라이가 자신의 멱살을 틀어쥐는 그 순간까지도 설마 맨 몸뿐인 상대가 선제공격을 가해올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듯했다.

“뭐하는 짓…, 꺅!”

여인이 허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채 뽑기도 전에 라이가 다리를 걸면서 뒤로 밀어 버렸다.

쿵.

뒤로 나자빠진 여인은 넘어질 때 머리가 어딘가에 부딪혔는지 잠시 꿈틀거리는 듯하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한주먹거리도 안되는 게 왜 사람 성질을 자꾸 건드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하지?”

기절한 여인을 쳐다보던 라이는 자신을 조롱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여인을 죽이긴 싫었고, 그렇다고 치밀어 오른 화를 참기도 힘들었다. 그만큼 노예라는 말은 라이에게 있어서는 역린과도 같은 단어였던 것이다.

잠시 눈살을 찌푸리며 여인을 쳐다보던 라이는 현재 자신이 벌거벗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여인이 두른 후드가 달린 두툼한 망토가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어차피 이대로 발가벗은 채 마을로 들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고, 이 정도로 여인을 용서하고 그냥 가기에는 끓어오르는 분노가 너무 컸다. 그렇다면 자신의 화가 풀릴 정도의 적당한 대가가 있으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라이는 일단 여인이 두른 망토를 벗겨 몸에 걸쳐 보았다. 약간 작긴 했지만 망토의 특성상 벌거벗은 몸을 가리기에는 충분했다. 그런 라이의 눈에 여인의 허리춤에 걸려있는 작은 돈주머니가 들어왔다. 어차피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할 터다. 잠시 망설이던 라이였지만 마음을 독하게 먹고 돈주머니를 끌러 손에 쥐었다. 하나를 빼앗나 둘을 빼앗나 어차피 빼앗은 건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결국,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쨌거나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인 셈이다.

처음이 힘들지 두 번째부터는 순조로웠다. 돈주머니까지 손에 든 라이의 두 눈이 여인의 온몸을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늘씬한 체형에 여자치고는 키가 무척이나 컸다. 가만히 보니 옷이나 가죽갑옷도 잘하면 입을 수 있을 듯했다. 꽉 끼는 옷이었다면 라이가 뺏어 입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겠지만, 다행히도 활동적인 걸 좋아해서인지 품이 넉넉하게 입고 있었다.

“꽉 끼긴 하지만 뭐, 못 입을 정도는 아니네.”

가슴 부위는 유방 덕분인지 품이 넓어 꽉 끼긴 해도 그럭저럭 입을 만했는데, 옆구리 부분은 도저히 들어가지를 않았다. 그래서 옆구리 부분을 단검으로 쭉 찢어버린 후 입었다. 여자 옷을 입는 게 쪽팔리는 노릇이긴 했지만, 그래도 벌거벗고 다니는 것보다는 백배 낫지 않겠는가.

그리고 갑옷의 경우는 각 가죽 판을 연결하는 가죽끈 부분을 느슨하게 풀어주는 것으로 간신히 해결했다. 모양은 좀 웃길지 몰라도 망토를 둘러 가리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리라.

문제는 가죽 바지였다. 그가 입기에는 너무 작았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꽉 끼는 부분은 단검으로 쭉쭉 찢어 간신히 착용하는 데 성공했다. 엉덩이 부분이 들어갈 수 있기에 악착같이 시도했지, 그게 아니었다면 시도도 하지 않고 포기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속옷만 빼고, 가죽갑옷까지 몽땅 다 착용하는 데 성공했다. 무기도 반가웠지만, 제법 두둑한 액수가 채워져 있는 돈주머니가 제일 반가웠다. 가죽을 사러 이 마을로 왔다는 그녀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덕분에 벌거벗고 다니지 않게 되어 좋군. 그건 그렇고 이 년을 어떻게 해야 하나……?”

물론 죽여 버리는 게 가장 깔끔한 뒤처리이긴 했지만 자신에게 조롱의 말 몇 마디 했다고 그러긴 싫었다. 사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살인이라는 걸 해보지 않은 탓에 살인에 대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었지만, 라이는 애써 자신에게 변명했다. 자신에게 많은 걸 베풀어준(?) 여자를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있겠는가 하고…….

“앞으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려서는 안 된다는 걸 이번 기회에 잘 배웠겠지. 네가 내게 준 건 그런 교훈을 준 댓가라고 생각하라고.”

널브러져 있는 여인에게서 시선을 뗀 라이는 마을 쪽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작은 마을이다. 저 여자가 이 마을에 가죽을 사러 왔다고 하는 걸 보면, 그녀의 옷차림을 기억하고 있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또, 저 여자가 깨어나면 가장 먼저 뒤질 게 저 마을일 것은 뻔한 이치. 차라리 계속 하천을 따라 내려가다 또 다른 마을을 찾는 게 현명하리라.

게다가 여인에게서 뺏은 무기도 있는 만큼, 그걸로 작은 동물이라도 사냥할 수 있으면 식량 걱정도 어느 정도는 해결될 테고.

“마을에서 식량을 좀 구입하고 가는 게 좋긴 하지만, 그러다 이 년이 강도를 당했다고 지랄발광을 하면 위험해 지겠지. 에이, 어쩔 수 없지. 안전한 게 최고니까.”

마음을 굳힌 라이는 하천을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또 다른 마을이 나타나길 희망하면서…….

라이가 사라지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절해 있는 여인 옆에 누군가가 다가왔다. 마를린이었다. 마를린은 속옷만 입어 거의 반나체나 다름없는 상태로 널브러져 있는 여인을 착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세상에 아무리 입고 있는 옷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여자 옷을 빼앗아 입을 생각을 하다니. 이런 양아치와 같은 짓으로 미뤄 보아 사내는 절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기사는 아닌 것으로 판단되었다.

만약 기사였다면 아무리 힘든 상황일지라도 절대 연약한 여성을 대상으로 이런 짓거리는 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라면 여자에게 강간당한 흔적이 없다는 것 정도…….

‘여색은 별로 밝히지 않는 모양이지?’

앞으로도 계속 사내의 뒤를 따라다니며 그 정체를 밝혀야 할 마를린이었기에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아직까지는 따가운 햇볕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 여인을 마법으로 들어 올려 그늘이 진 쪽으로 옮겨 줬다. 안 그러면 저 여자가 깨어날 때쯤이면 따가운 햇볕에 반쯤 익어 버릴 테니까.

“어쨌거나 지금보다 더 조심해야겠어. 저런 꼴이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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