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8화 (834/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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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라도 된 듯 축 늘어져 있는 앤트러스. 월터에게 끌려가다 기회를 봐서 탈출하려다가 얼마 가지도 못하고 붙잡힌 후, 자살을 시도하다 들켜 이 꼴이 된 것이다. 월터는 앤트러스를 구출한 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과정에서 감을 잡아 버렸다. 이 자는 절대로 기사단 소속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월터는 기절시킨 앤트러스를 짊어지고 산맥을 타고 넘어 토리아 왕국에 도착했다. 그가 코린트에서 출발하여 알카사스 왕국으로 들어갔던 길을 거꾸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토리아 왕국 비밀 서부 거점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일단 본국으로 보고부터 올린 뒤 그동안 쌓인 피로를 풀고 있었다.

보고를 올린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본국에서 사람 하나가 급파되어 왔다. 거점과 본국 간에 공간이동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 덕분이었다.

“이쪽입니다, 마법사님.”

요원의 안내를 받으며 들어오는 앳된 얼굴의 미모의 여인. 그녀는 어려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농염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는데, 육감적인 몸매를 과감하게 드러내는 옷차림을 하고 있는 탓에 그녀를 안내해 들어온 요원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옆이 길게 트인 치마는 늘씬한 허벅지를 걸음을 옮길 때마다 살짝살짝 드러내고 있었고, 상의는 탐스러운 가슴골 윗부분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농염한 몸매와 앳된 얼굴이 섞여 뭔가 퇴폐적인 기운을 물씬 풍기는 여인이었다.

요원은 안내하면서도 은근슬쩍 그녀의 모습을 훔쳐보느라 정신이 없었지만, 그런 미모의 여인을 바라보는 월터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허엇, 서, 선배님이 어떻게 이곳에……?”

미모의 여인은 살짝 토라진 듯 대꾸했다.

“어머~, 표정이 왜 그래? 마치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나 충격받을 거 같아.”

“아, 아닙니다, 리카 선배님. 이번 임무가 너무 힘들다 보니 저도 모르게 피곤이 쌓인 모양입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월터는 긴 의자 위에 축 늘어져 있는 앤트러스를 가리키며 얼른 화제를 돌렸다. 리카라는 여인은 앳된 얼굴과는 달리 기사단장인 까미유 드 크로데인 공작과 함께 활동했었던 전대의 거물이었다. 그녀와 얽혀서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분위기에 휩쓸려 혹여 말실수라도 했다가는 뒷감당도 어렵고…….

“자기 말로는 콘돌 기사단 제32정찰조 소속 기사라고 했지만, 아무래도 기사단 쪽 사람이라기보다는 정보부 쪽 인물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 말이지요.”

“만나자마자 일 얘기부터 시작하는 거야? 자기, 너무 무~드 없다.”

“저…, 선배님. 일에 집중해 주십쇼.”

내심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힘겹게 참으며 월터는 웃는 얼굴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보내주려면 상대하기 편한 샤사를 보내 줄 것이지, 뭐 이런 퇴물을……. 월터는 그녀를 이리로 보낸 크로데인 공작을 저주했다. 물론 마음속으로만.

“흐응~, 아주 잘 생긴 오빠네에~.”

리카는 앙증맞은 손놀림으로 앤트러스의 얼굴을 툭툭 치며 깨웠다.

“이봐, 오빠. 일어나 봐, 응?”

“끄으응…….”

“어떻게 했기에 얘가 이렇게 정신을 못 차려?”

“어쩌긴 뭘 어쨌겠습니까? 급한 김에 이걸로…….”

말을 하며 주먹을 쥐어 보이는 월터를 보며 리카는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에휴~, 이렇게 힘 조절을 못 해서야. 여자를 다룰 때는 강약 조절을 잘해야 하는 걸 몰라? 이러니 여자가 없지.”

“아니, 이놈이 여잡니까? 그리고 이런 놈 잡아왔으면 칭찬을 해주셔야지, 뜬금없이 이러니 여자가 없다니요?”

“오호, 이젠 좀 컸다 이거지? 감히 선배의 말에 토를 달고 말이야.”

“아, 그…, 그게 아니라.”

월터는 아차 싶어 급히 말을 얼버무리며 은근슬쩍 리카의 시선을 피했다.

“호호, 우리 월터가 내 칭찬을 많이 듣고 싶었나 보네? 이리와, 내 엉덩이 토닥토닥 해줄게. 아니면 상으로 내 가슴을 만지게 해줄까?”

“아, 아니 괜찮습니다. 그딴 상 절대로 안 받을 겁니다.”

“바보, 그냥 준다고 해도 싫데.”

‘꼭 말을 해도…….’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는 월터. 사내에게 들었을 때는 썰렁한 농담이겠지만, 이게 저런 예쁜 여자에게 들었을 때는 얘기가 다른 것이다.

잠시 귀여운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거리던 리카는 다시 앤트러스를 깨웠다. 이번에는 방금 전과 달리 어깨를 잡고 과격하게 흔들어서 그런지 앤트러스는 신음성을 흘리며 깨어났다.

“끄으응…, 여, 여기는 어디지?”

“흐응, 오빠, 깨어났구나. 나야, 나 모르겠어?”

바로 그 순간 리카는 앤트러스가 자신을 동료로 생각하게 만드는 마법을 비롯하여 상대를 매료시키는 마법까지 세 가지 마법을 거의 동시에 걸어 버렸다. 한순간에 앤트러스의 얼굴에 마치 헤어진 애인이라도 만난 듯 화색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월터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아마도 크로데인 공작이 샤사를 보내지 않고 리카를 보낸 것도 다 그녀가 정신계 마법에 훨씬 정통해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어? 마리엔, 네가 어떻게 이곳에……?”

“오빠가 보고 싶어서 왔지. 그런데 오빠, 어떻게 된 거야?”

정신계 마법이라고 해도 만능은 아니다. 상대가 분위기에 젖어 술술 불도록 만들어야지, 의심을 하게 만들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화를 매끄럽게 이끌어가며 필요한 부분을 캐묻는 리카의 화술은 정말이지 놀라운 수준이었다.

대화를 통해 월터가 잡아온 사내의 이름이 ‘케빈 콜린스’가 아니라 앤트러스 에이크 후작이라는 것과 알카사스 왕실 직속 감찰부의 상당한 고위직에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흐응~, 뜻밖의 거물을 잡아왔네~. 단장님이 무척 좋아하시겠어.”

리카는 무척 좋아했지만, 그 옆에서 대화를 엿듣고 있던 월터는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그때 뭔가 찝찝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키메라들을 이끌고 가서 없애 버린 그자들도 감찰부 소속일 줄이야. 더군다나 그들은 감찰부를 배신하고 국외로 탈출하고 있던 중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야말로 포섭하기에 딱 좋은 최고의 인재들이었다. 정신계 마법을 통한 세뇌라는 위험천만한 모험을 할 필요도 없는…….

‘쩝, 아깝게 됐네. 이럴 줄 알았으면 도망치게 그냥 놔둘걸.’

“여기서 계속 심문하는 건 힘들겠고, 본부로 데려가 제대로 된 취조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런데 월터는 어떻게 할 거야? 이 누나하고 함께 돌아갈 거야?”

“아뇨, 말씀은 고맙습니다만 할 일이 있어서요.”

“그래? 아깝게 됐네. 그럼 나는 이만 가 볼게.”

앤트러스의 눈 앞쪽으로 손바닥을 쓱 움직이며 뭐라고 나지막하게 주문을 중얼거리는 리카. 곧이어 앤트러스의 몸이 축 늘어진다. 잠들어 버린 것이다.

가녀린 몸매에도 불구하고 리카는 앤트러스를 번쩍 들어 어깨에 들쳐 멨다.

“이런 힘든 일을 내가 직접 해야 하다니잉……. 월터, 정말 나 혼자 돌아가야 돼?”

마법을 쓰면 커다란 트롤조차도 번쩍번쩍 드는 여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월터였기에 그런 투정에 넘어갈 리가 없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저는 급히 할 일이 있어서요. 꼭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단장님께 직접 허가를 구해…….”

“흥, 됐어. 나 혼자 할께.”

리카는 토라진 듯 콧방귀를 뀌며 방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런 젠장! 엄청 늙은 할망구라는 걸 내가 뻔히 알고 있는데 귀여운 척은.”

월터는 방금 전까지 앤트러스가 늘어져 있었던 긴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그렇고, 이제 어떻게 한다?”

국경지대 경비가 강화되었던 건 배신자들 때문이었고, 자신이 거기에 재수 없게 걸려 그 고생을 했다는 것을 앤트러스를 통해 알 수 있었다. 배신자들은 물론이고 그들의 뒤를 쫓던 앤트러스 일행까지 몽땅 없어져 버렸으니, 강화되었던 경비는 조만간 풀릴 것이다.

“일단은 한동안 좀 쉬면서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단장의 지시를 기다리는 게 좋겠어. 한두 명 증원을 받을 수 있으면 더욱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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