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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저놈이야.”
손가락 끝으로 라이를 가리킨 것은 몇 시간 전에 라이에게서 도망친 바로 그 덩치 좋은 사내였다. 하지만 그가 라이를 가리키기도 전에 상대는 이미 라이를 향해 표독스런 시선을 날리며 째려보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상인을 통하지 않고 사냥꾼에게서 고급 가죽을 저렴한 가격에 구입하겠다는 생각으로 일행과 잠시 떨어져 있던 자신을 기절시킨 뒤 옷을 빼앗아 간 천하의 개망나니 같은 놈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현재 라이가 입고 있는 옷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애지중지하며 아껴 입고 있었던 바로 그 옷이었다.
“손가락질하지 마. 이미 찾았으니까.”
황급히 손을 내리는 사내를 향해 늘씬한 미녀는 이를 으드득 갈아붙이며 중얼거렸다.
“안 그래도 요 며칠 동안 얼마나 분하고 열이 받는지, 잠도 제대로 자질 못했다. 잘 만났다, 이 천하의 불한당 같은 놈.”
“생긴 건 저렇게 어리숙해 보여도 굉장한 실력을 가지고 있는 놈이야. 한순간에 내가 데리고 있던 애들 넷을 때려눕혔다니깐. 루산나, 그러니 일단 두목님께 말해서…….”
그러자 라이를 씹어 먹을 듯 노려보고 있던 루산나가 신경질적인 말투로 쏘아붙였다.
“입 다물고 가만히 있어. 내가 해치울 테니까. 겁이 난다면 넌 여기서 지켜보고만 있으라고.”
말을 마친 그녀는 북적거리는 인파를 헤치며 라이를 향해 조금씩 접근해 가기 시작했다. 서로 간의 거리가 지척으로 좁혀졌을 때, 그녀는 품속에 손을 넣어 자신의 비장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건 코르크 따개처럼 T자형으로 생긴 작은 송곳이었다.
엄지손가락 굵기의 손잡이는 꽉 쥐고 힘을 주기에 적합했고, 중지와 약지 사이로 빠져나와 있는 뾰족한 강철침은 가죽갑옷쯤은 손쉽게 꿰뚫고 들어간다. 판금 갑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다면 모를까, 가죽갑옷이나 사슬갑옷을 착용한 상대를 기습하는데 있어서는 비수나 단검보다도 훨씬 효용성이 좋았다. 게다가 강철침 끝에는 치명적인 독약까지 발려 있으니 일단 찔리기만 하면 끝인 것이다.
라이의 등 뒤로 다가서는 순간 루산나는 송곳으로 상대의 겨드랑이 아래쪽, 옆구리 부분을 푹 찔렀다. 그녀가 노린 곳은 가죽갑옷의 앞판과 뒤판이 가죽끈으로 연결되는 부위였다. 상대가 자신의 체구에 맞지도 않는 갑옷을 억지로 껴입으려면 그 틈이 훨씬 더 넓게 벌어져 있을 건 뻔한 이치. 두목이 선물한 아끼던 갑옷에는 아무런 흠집도 남기지 않고 놈을 없애버릴 수 있는 최고의 포인트였던 것이다.
폐에 구멍이 뚫리면 흉강(胸腔)으로 공기가 새 나간다. 호흡을 하기 위해 폐가 공기를 잔뜩 머금으려면 팽창할 만한 공간이 있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 공간이 폐에서 빠져나간 공기로 채워진 탓에 폐가 팽창하지 못하게 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질식사하게 된다는 게 정답이었다.
그런데 이때 루산나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그 순간 상대가 번개처럼 뒤로 몸을 돌리며 송곳을 쥔 그녀의 손을 턱 하고 잡아 왔던 것이다. 순간, 루산나의 얼굴이 두려움에 창백하게 질렸다.
“이, 이거 놔!”
뒤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느낌. 살기를 감지한 것이었지만, 지금껏 살기를 느껴 본 적이 없었던 라이는 잠시 혼란에 빠졌다. 왜 이런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까? 주변은 시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이 한가롭게 상인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혀 위험하지 않은 곳이다. 그런데 왜? 그냥 무시하고 걸어갈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계속 뒤통수가 간질거리는 듯한 느낌을 참지 못한 라이가 고개를 뒤로 돌려 힐끗 쳐다보는 순간이었다.
그 순간 볼 수 있었다. 자신을 향해 뭔가를 들고 찌르려고 하는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웬 미녀의 모습을.
라이는 한순간에 벌어진 이 상황에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뭔가를 찌르려는 여자를 본 순간 어느새 몸이 움직여 여자의 손을 붙잡고 있는 게 아닌가. 뭘 어떻게 해야겠다고 전혀 의식조차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내 몸놀림이 이렇게 재빨랐던가? 나도 모르게 몸이 제멋대로 움직인 듯한 기분까지 들 정도니.’
“이거 !”
새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몸부림을 치는 여자의 손에서 라이는 일단 그녀가 쥐고 있던 무기부터 빼앗았다. 상당히 특이한 형태의 무기였다. 길쭉한 송곳처럼 생긴 이런 걸로 사람을 찌른다고 죽겠나 싶을 정도다. 하지만 뾰족한 강철침 끝 부분이 퍼렇게 물들어 있는 걸로 봐서 어쩌면 독이 발라져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라이가 무기를 뺏고, 또 그걸 살펴보느라 잠시 신경이 분산되어 있는 틈을 노려 여자는 붙잡혀 있던 손을 뿌리치고 도망치기 시작했다. 라이는 일단 무기부터 다른 사람들이 줍지 못하게 근처 지붕 위쪽으로 던져 버렸다. 독이 발라져 있을지도 모를 흉기를 품속에 넣고 다니는 건 너무 위험했기 때문이다.
‘누군데 날 다짜고짜 저런 송곳으로 공격하려 했던 거지?’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 낯이 꽤 익숙하다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라이는 곧바로 그 느낌을 무시했다. 난생처음 와본 이 마을에 자신이 아는 여자가 있을 턱이 없었으니까. 그것도 저렇듯 눈에 확 띄는 미녀가.
이때, 그의 뇌리에 몇 시간 전에 자신을 털어먹으려고 달려들던 깡패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돈푼 꽤나 있는 집의 자식으로 오해했는지 골목길로 몰아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이어진 난투. 처음에 무기까지 빼앗겨 맨손이었던 라이는 검까지 들고 설쳐대는 녀석들을 아주 손쉽게 때려잡았다. 그것도 네 놈이나.
‘아까 그 깡패들과 연관된 여자인가?’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을 안에서 다짜고짜 자신을 살해하려고 하는 여자를 만난 것이다. 짚이는 거라고는 얼마 전에 깡패 넷을 박살 낸 것 외에는 없다. 어젯밤에 몰래 성벽을 넘어들어온 이래 그와 충돌을 일으킨 건 그들밖에 없었으니까.
어찌 되었든 그냥 넘기기에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신이 뭘 잘못했기에 독이 발린 것 같은 송곳으로 몰래 찌르려 한단 말인가. 게다가 아주 날카로웠던 강철침으로 미뤄 봤을 때 만약 찔렸다면 절대 가벼운 상처로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받은 대로 돌려주겠다고 결심한 것도 바로 얼마 전이다. 이를 으드득 갈아붙인 라이는 여자를 붙잡아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겠다는 마음으로 그녀의 뒤를 쫓아 달려가기 시작했다.
루산나는 마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염집 아가씨처럼 단출하게 차려입고 있었다. 그에 비해 그녀의 뒤를 쫓고 있는 라이는 발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을 정도로 꽉 끼는 가죽바지, 묵직한 가죽갑옷, 더군다나 그 위에 두툼한 망토까지 걸치고 있는 상황이다.
어릴 때부터 뒷골목에서 성장한 루산나였기에 탄탄한 근육질의 몸매를 지닌 데다, 주변 골목길의 지리까지 훤하게 꿰뚫고 있었다. 더군다나 자신의 등 뒤로 미친 듯 뒤쫓는 사내까지 있다 보니 자신이 이렇게 빠르게 달릴 수가 있었을까 의심이 들 정도로 놀라운 속도로 재빠르게 도망치고 있었다. 하지만…….
“거기 안 서! 이 망할 년아!”
“헉헉!!”
심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죽어라 도망치고는 있었지만, 저 흉악한 놈은 절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쫓아올 것만 같았다. 아무 원한 관계도 없었는데 처음 본 자신을 때려눕히고 옷을 벗겨 간 게 바로 저놈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신이 공격하려는 걸 놈이 눈치채고 무기까지 빼앗기지 않았는가.
만약 붙잡힌다면 어떤 꼴을 당하게 될지 모를 일이다. 어쩌면 몇 대 맞고 끝나는 게 아니라 목이 잘린 시체가 될지도……. 그런 생각에 공포에 질린 그녀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며 자신을 도와줄 만한 사람을 찾아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자신을 이리로 데리고 온 한스 녀석은 벌써 눈치를 채고 튄 모양이다. 덩치는 곰만 한 게 겁은 왜 그렇게도 많은지. 이 위기만 벗어나게 되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나저나 한스 녀석이 두목에게 이 상황을 전해 준다면 정말 좋을 텐데.
몇 분간 전력으로 벌어진 추격전은 뒤를 쫓던 라이가 루산나의 머리카락을 낚아채면서 끝이 났다. 바람 따라 눈앞에서 나부끼고 있는 긴 적갈색 머리카락은 커다란 유혹이었고, 그걸 마다할 라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꺄악!!”
“이게, 서라고 하면 설 것이지!”
머리털이 몽땅 뽑힐 것 같은 고통도 고통이었지만, 이젠 죽었구나 하는 생각에 공포에 질려 숨을 헐떡거리며 털썩 주저앉아 버리는 루산나. 그러면서 그녀는 자신에게 날아올 주먹에 대비해 온몸을 최대한 웅크리며 사내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사내는 주먹질부터 하는 게 아닌, 자신을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눈치를 살피던 루산나는 자신과 그렇게 격렬한 추격전을 벌였음에도 사내가 땀방울은 고사하고, 숨소리조차 흐트러지지 않고 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 자신이 입고 있었던 가죽갑옷은 모험가들이 입는 실전용으로 제작된 것이기에 그 무게가 상당했다. 그런 갑옷을 입고 몇 분간 전력질주를 했음에도 전혀 호흡이 거칠어지지 않을 수 있다니, 그제서야 루산나는 자신이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을 건드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이 망할 년, 다짜고짜 흉기를 휘두른 주제에 뭘 잘했다고 째려봐!”
받은 대로 돌려주겠다며 마음을 먹긴 했지만 겁에 질린 여자를 때리기도 그렇고, 그냥 없던 일로 하자니 조금 전에 봤던 흉기가 떠올라 화를 참기 힘들었다. 자연히 라이의 얼굴이 일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정제되지 않은 흉폭한 살기가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전쟁터에서 구르고 키메라 오크들과의 치열했던 전투를 벌이며 생긴 거친 살기는 조직생활을 한다지만 여자인 루산나로서는 견디기 힘들 만큼 극심한 공포를 안겨 주기에 충분했다.
두려움에 질린 루산나는 부들부들 떨면서도 힘겹게 입을 놀렸다. 이대로 있다가는 죽을 것만 같았기에 어떻게든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었다.
“나, 나를 해치면 우리 두목이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나는 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블랙울프(Black Wolf) 파의 조직원이란 말이에요. 살아서 이 마을을 떠나고 싶다면 나를 그냥 놔주는 게 신상에 좋을 거예요.”
사실, 루산나는 블랙울프 파에 속해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마을 뒷골목의 태반을 지배하고 있는 거대 조직이 블랙울프 파였기에 그렇게 둘러댄 것이다. 혹시라도 사내가 블랙울프 파의 악명을 안다면 자신에게 손을 대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하지만 루산나는 몰랐다. 급하게 돌린 얄팍한 잔머리 때문에 자신의 발목이 잡히게 될 줄은.
위조 신분증을 만들기 위해 조직을 찾고 있었던 라이로서는 뜻밖의 아주 반가운 소리였다.
“호오, 그거 아주 좋은 일이군. 이봐, 네가 소속된 조직이라는 곳으로 나를 안내 좀 해 줘야겠어.”
“거, 거기는 왜……?”
겁먹으라고 블랙울프 파의 이름을 사칭했는데 상대가 오히려 반갑다는 듯 환히 웃으며 좋아라 하자 루산나는 어안이 벙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귀가 먹었냐? 너희 조직이 있는 곳으로 날 안내하란 말이야. 그곳에 의뢰할 일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