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2화 (838/930)

내 밑에서 일해 보는 건 어때?

골목 사이사이를 한참 돌아 안쪽의 으슥한 곳에 위치해 있는 건물의 작은 철문을 가리키며 루산나가 입을 열었다.

“저기가 조직에서 의뢰를 받는 곳이에요.”

철문 앞으로 가까이 다가선 루산나는 박자에 맞춰 철문을 통통 두들겼다. 문을 열어 달라는 조직원들 간의 신호인 듯했다.

똑똑…, 똑…, 똑똑…….

곧이어 철문 위쪽에 네모난 작은 구멍이 열리며 두 개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의심어린 말투의 사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뒤에 있는 사람은 누구지?”

“물건을 사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데리고 왔어.”

잠시 후, 빗장 푸는 소리가 들리더니 커다란 철문의 한쪽 귀퉁이가 끼기긱 거리는 소음과 함께 열렸다. 커다란 짐을 들일 때는 문 전체를 열겠지만, 평상시에는 귀퉁이의 작은 쪽문을 통해 드나드는 모양이다.

“따라와요.”

루산나가 앞장서서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철문이 워낙 작았기에 여자 치고는 제법 큰 키인 루산나조차도 고개를 살짝 숙이며 들어가야 했다. 그 뒤를 따라 들어가려던 라이는 뭔가 섬뜩한 느낌에 몸이 차갑게 식어 갔다. 그러고 보니 이것과 똑같은 느낌을 얼마 전에도 받은 적이 있었다는 게 뇌리에 떠올랐다. 눈앞의 저 여자가 송곳으로 자신을 몰래 찌르려고 했을 때, 그때 그 느낌이었다.

기분이 찝찝해진 라이는 잠시 망설였다. 안 좋은 느낌이 드는데도 괜히 따라 들어갔다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뭐해요? 빨리 들어와요.”

루산나의 채근하는 목소리가 어둑한 철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라이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이대로 마냥 시간만 끌고 있을 수만은 없었으니까. 오크 새끼를 얻으려면 오크 굴속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어차피 위조 신분증을 얻기 위해서는 한 번은 겪어야 할 일이었다.

마음을 굳힌 라이는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물론 그냥 들어간 것은 아니다. 손을 뻗으며 상체를 앞쪽으로 빙 돌려 한 바퀴 데구루루 구르며 뛰쳐 들어갔던 것이다.

예감을 믿고 미리 대비한 라이의 행동이 옳았다.

퍼퍽!

“이런 쥐새끼 같은 놈. 눈치가 보통이 아닌데.”

뒤쪽에서 짧은 파공성과 함께 바닥을 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리고 경악에 찬 사나운 외침소리도. 작은 철문을 이런 식으로 빠르게 굴러들어올 거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모양이다.

철문 뒤쪽에 매복하고 있던 자들이 휘두른 몽둥이는 애꿎은 바닥만을 두들긴 듯했다. 하지만 한 가지 라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게 있었다. 밝은 곳에서 어두운 곳으로 갑자기 들어오다 보니 일순간이기는 했지만, 눈이 미처 적응을 하지 못해 주위가 제대로 보이지가 않았던 것이다. 식은땀이 흐르는 순간이었다.

“이런 젠장…….”

위기감을 느낀 라이는 재빨리 몸을 일으켜 방어 자세부터 잡았다. 그 순간, 또다시 예의 그 서늘한 느낌이 느껴졌다. 왼쪽 상단!

라이가 재빨리 한걸음 뒤로 물러서자마자 파공성(破空聲)과 함께 약한 바람이 느껴졌다. 방금 전에 자신이 서있던 곳을 몽둥이가 세차게 훑고 지나간 것이다. 그 순간, 라이는 거의 본능적으로 앞으로 튀어 나갈 뻔했다. 지금껏 받아 온 훈련에 따라 저 정도로 바람이 일 정도로 강하게 몽둥이를 휘둘렀다면, 필히 빈틈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튀어 나가려는 본능을 애써 참으며 라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가 않는 상태에서 어설프게 움직였다가는 더 큰 위기에 처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희미하게나마 앞이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건 몽둥이를 들고 있는 사내 둘. 그리고 복도 안쪽에서 이쪽을 향해 다급히 뛰어오고 있는 발걸음 소리도 들린다. 최소한 세 명은 될 듯했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여기서 자칫 한 번만이라도 실수를 했다가는 살아서 나가기 힘들 것이다.

“이봐,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

하지만 사내들은 라이의 말을 들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자신들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상황인데, 무슨 대화가 필요하겠는가? 일단 몽둥이로 제압한 뒤 사지를 꽁꽁 묶어 놓고 대화를 시작하는 게 좋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는데 말이다.

사내들은 라이가 기가 죽어 꼬리를 말았다고 생각해서인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왔다. 물론 손에 움켜쥔 몽둥이를 가끔 허공에 휘둘러 위력 시위를 하면서.

그제서야 어둠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는지, 복도 안쪽에서 달려 나온 세 사람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두 명은 라이가 이미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골목길에서 기절해 자빠져 있는 동료들을 놔두고 허둥지둥 도망쳤던 바로 그 덩치가 컸던 놈과 자신을 송곳으로 찌르려고 했던 여자.

순간, 라이는 깨달았다. 자신이 완벽하게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덩치 큰 놈이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말은, 자신을 때려잡기 위한 만반의 태세가 갖춰져 있다고 봐야 했다.

꿀꺽!

너무 긴장한 나머지 하마터면 허리에 차고 있는 단검부터 뽑아들 뻔했다. 하지만 잠시 고민하던 라이는 단검 손잡이에서 천천히 손을 뗐다. 여기서 피를 보게 되면 저들과의 협상은 영원히 불가능하게 된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일단 대화는 시도해 봐야 할 게 아니겠는가.

라이는 자신을 이곳으로 유인해 온 여인을 째려보며 욕지거리 몇 마디를 내뱉은 후, 사내를 향해 말했다.

“이봐, 할 말이 있다. 내가 이곳에 온 건 싸우자고 온 게 아냐.”

그때 라이의 말을 더 이상 듣기 싫다는 듯 앞으로 튀어나온 건 도망쳤었던 덩치가 큰 놈이었다. 전과 달리 이번에는 다섯 명이 한꺼번에 포위하고 공격할 수 있는 아주 유리한 상황. 그때의 치욕을 만회하려는 것인지 덩치 큰 사내는 더욱 험악한 인상으로 소리쳤다.

“시끄러우니 주둥아리 닥쳐. 얘들아, 저 새끼 조져버렷!”

라이는 본능적으로 재빨리 벽 쪽으로 움직여 등을 벽에 붙였다. 일단 등 뒤에 적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안정감이 찾아왔다. 비록 주위를 둘러싼 놈들이 다섯이나 되었지만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눈이 어느 정도 어둠에 적응을 해 앞이 보이기 시작하자 사내들이 그다지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얼마 전에 골목길에서의 싸움으로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이 붙었던 것이다. 그리고 라이의 자신감을 북돋아 준 것에는 사내들의 실력이 워낙 형편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사실 라이가 몰라서 그렇지, 5급 용병패까지 받은 실력이라면 이런 변방의 깡패 따위 서너 명이야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라이의 경우 어렸을 때부터 기사인 아버지에게서 체계적으로 검술 교육을 받았고, 용병대에서 실전을 겪으며 경험을 쌓았기에 같은 5급 용병패를 가진 용병들과는 그 수준이 다른 것이다. 거기에다가 집을 떠난 후 목숨이 위험할 정도의 상황을 몇 번이고 겪다 보니 그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라이는 침착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먼저 문 옆에 서 있던 사내를 향해 몸을 날렸다. 둘 간의 거리가 자신이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빨리, 순간적으로 가까워지자 당황한 사내는 황급히 몽둥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라이는 슬쩍 몸을 옆으로 틀며 몽둥이를 피한 뒤 사내의 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퍽!

“크윽!”

단 한 방에 사내가 철푸덕 주저앉아 버렸다. 쓰러진 사내가 떨어뜨린 몽둥이를 집어든 라이의 얼굴에는 조금 전과 달리 여유가 넘쳤다. 이제는 확실히 자신의 실력에 대한 믿음이 갔던 것이다. 그러자 덩치 큰 사내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간다. 골목길에서 부하들이 지금처럼 어, 어 하다 묵사발이 났던 기억이 떠오른 모양이다.

“날 데리고 온 저 여자가 그러더군. 이곳에서 위조 신분증을 구할 수 있다고 말이야. 그렇다면 난 손님인 셈인데, 다짜고짜 몽둥이부터 휘두르면 안 되지.”

이런 상황에서도 너무 여유로운 라이의 모습에 사내들은 기가 죽었는지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기에 포위되어 있음에도 저렇게 여유를 보이는 게 아니겠는가. 사내들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자기들끼리 눈짓을 통해 뭔가를 얘기하는 듯하더니, 복도 안쪽에서 튀어나온 사내 중 하나가 앞으로 나서며 입을 열었다.

“손님으로 온 거라면 두목님께 안내해 주겠다.”

“내가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이제라도 대화가 통해서 좋군.”

그 말에 덩치 큰 놈이 사내 옆으로 재빨리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저놈을 진짜 두목님께로 데리고 가려는 겁니까?”

그러자 사내는 어깨를 으쓱하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손님으로 왔다면 어쩔 수 없잖아. 게다가 우리가 감당할 만한 사람도 아닌 것 같고.”

덩치 큰 놈보다 사내가 조직에서의 신분이 더 높은 모양이다. 사내의 말에 아무 소리 못 하고 조용히 뒤로 물러선 것을 보면 말이다.

두목에게 안내하겠다며 사내가 라이를 데려간 곳은 복도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어느 방 앞이었다. 사내는 문 앞에 서서 조심스럽게 노크를 했다. 그러자 방 안쪽에서 거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접니다, 두목. 손님이 찾아와서요.”

“들어와.”

방 안에는 사내 두 명이 앉아 있었다. 30대 후반 정도로, 둘의 나이는 거의 비슷해 보였다. 그중 상석(上席)에 앉아있는 사내의 인상이 훨씬 좋아 보였다. 눈매는 다른 사내들처럼 날카롭기 짝이 없었지만, 덥수룩한 구레나룻과 턱수염이 그의 날카로운 인상을 어느 정도 덮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목은 라이를 턱짓으로 가리키며 불쾌하다는 듯한 어조로 사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누구냐는 질문이 아니라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은 건, 예정대로라면 몽둥이에 맞아 기절한 놈을 꽁꽁 묶어서 끌고 와야 했는데 왜 저렇게 멀쩡한 상태냐는 뜻이었다.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올 수 있는 입구의 쪽문. 아주 간단한 함정이었지만, 부하들의 몽둥이를 피한 놈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설마…, 함정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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