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목의 계략
마를린은 괴한이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조심에 조심을 거듭하며 미행했다. 괴한은 막강하기 그지없던 키메라 부대를 혼자서 맨손으로 전멸시킨 놀라운 무위를 지닌 존재. 조심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마를린은 괴한을 은밀히 미행하며 이해하기 힘든 여러 의문점들을 찾아냈다. 처음 괴한을 미행할 때만 해도 그는 자신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을 떨쳐내기 위해 그토록 미친 듯 내달렸을 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갑자기 땅바닥에 벌렁 누웠다가 일어난 후, 모든 게 바뀌었다. 이상하게도 괴한은 자신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듯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대체 왜 그러는 것일까?
‘나를 안심하게 한 후, 기회를 노려 단숨에 죽여 없애려고 하는 건가? 아니면, 뭔가 이용해 먹을 구석이 있어서 이렇게 행동하는 건가? 도통 짐작이 안가네…….’
그녀로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괴한이 갑자기 기억상실이라는 병에 걸린 게 아니라면, 자신의 존재를 전혀 모르는 것처럼 이런 식으로 행동할 리가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마를린은 한동안 고민해야 했다. 이대로 계속 괴한을 감시할 것인가, 아니면 포기하고 연구소로 돌아갈 것인가. 아무리 고민을 해봐도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답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어떻게 되었건 괴한의 배후를 밝혀 공을 세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이대로 포기하고 연구소로 돌아간다면 경비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목이 날아갈 게 뻔했으니까. 자신이 그동안 보아 온 연구소장의 성격이라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죽어라 괴한의 뒤를 쫓을 수밖에.
그렇게 괴한의 뒤를 미행하던 도중에 미처 몰랐던 사실을 한 가지씩 알아내기 시작했다. 우선 강물에 몸을 깨끗하게 씻고 나온 괴한의 나이가 그녀의 예상보다 어려도 너무 어렸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게 보일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작은 마을 근처에서 다리에 앉아 쉬고 있던 여자에게 한두 마디 건넨 뒤 곧바로 주먹을 휘둘러 기절시킨 다음, 옷을 빼앗아 입을 때는 괴한의 흉폭함보다는 왠지 모를 변태스러움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한 가지 의아했던 것은 더 이상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고 그냥 가 버렸다는 점이다. 나중에 여자의 얼굴을 확인해 보니 꽤나 미인이었는데 말이다.
무엇보다 마를린을 혼란스럽게 했던 건 그 후 며칠 뒤의 일이었다. 또 다른 마을을 발견한 뒤 사내가 밤에 은밀히 성벽을 기어올랐다. 그런데 성벽을 넘는 모습이 너무나 허접했다. 그녀가 그를 미행하는 과정에서 그가 단숨에 절벽을 날아오르는 모습을 몇 번이나 목격했었지 않은가. 능력이 없다면 몰라도, 있으면서도 저렇게 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 후 마을로 잠입한 사내가 한 행동이라고는 마치 촌놈처럼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는 것뿐이었다. 마를린은 그 모습을 보고 터져 나오는 감탄사에 입을 다물기 힘들었다. 만약 자신이 지금까지 사내의 뒤를 쫓아오지 않았다면, 분명 여느 시골 마을의 평범한 청년으로 착각했을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러기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국가 단위의 거대 조직에서 키워지고 교육을 받은 사내라고. 그렇지 않다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 무지막지한 실력과 자연스럽게 마을에 녹아드는 그 연기력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감탄사를 터트리면서도 마를린은 감시의 눈길을 멈추지 않았다. 사내는 누군가 자신을 미행한다 해도 저런 어리숙한 모습으로 방심을 유도한 뒤, 연구소에 대한 정보를 전달할 누군가와 분명 접촉을 할 거라고 찰떡같이 믿고 있었으니까.
마을 안을 이리저리 빈둥거리며 돌아다니기를 거의 하루.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은 생각이 들 무렵, 갑자기 상황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사내가 웬 여자와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마을 안임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 다 빠른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그리고 두 사람은 골목길 안쪽 구석진 곳에 위치한 철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후, 또 다른 사내와 나온 괴한은 이번에는 뒷골목에 자리 잡은 낡은 여관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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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의 지시가 있었기에 루크는 라이를 시장통 구석진 곳에 자리 잡은 여관 근처까지 자신이 직접 안내했다.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저 여관에서 일단 대기하고 있어라. 참, 한동안은 내가 널 관리하게 될 거다. 내 이름은 당코라 한다.”
말을 하며 루크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는 『돈벼락』이라는 간판이 무색할 정도의 엄청 낡은 여관 하나가 보였다. 3층 정도 되는 높이. 처음에 만들어졌을 때는 꽤 그럴듯한 곳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은 당장이라도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낡은 건물이었다.
라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여관을 바라보고 있자 루크는 난감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만약 진짜 신입 조직원이 이런 표정이었다면 벌써 쌍욕이 튀어나왔겠지만, 장정 서너 명을 홀로 묵사발을 내놓은 실력의 소유자가 아닌가. 당연히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가 없는 노릇이다.
“겉모양은 저렇게 낡아 보여도 보기보다 꽤 지낼 만한 곳이야. 무엇보다 안주인의 요리 실력이 좋아서 여기 음식 맛이 끝내주거든. 좀 더 사람의 왕래가 많은 곳에 세웠다면 저런 꼴은 되지 않았을 거야.”
루크는 라이가 혹 불만을 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그 말을 끝으로 볼일이 있다며 서둘러 돌아가 버렸다.
‘건물이 낡긴 했지만, 음식이 먹을 만하다니 그건 좋군.’
어차피 머리만 눕히면 어디서든 잠을 잘 수 있도록 단련이 되어 있는 라이였다. 오크 굴에서 몇 년이나 살았던가. 그곳에서 나온 후로도 안락한 잠자리와는 인연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음식만큼은 양보하기 싫었다. 얼마 전까지 쉬어빠진 육포로 배를 채워야 했고, 오크 떼와의 전투 이후 그조차도 없어 쫄쫄 굶다 물로 겨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음식만큼은 제발 맛있는 걸로 배부르게 먹고 싶다는 식탐이 무의식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여관 외관을 이리저리 훑어 보던 라이는 곧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가 어두워 자세히 보지는 않았지만, 생각보다 낡고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이때 들려 온 맑고 깨끗한 음성.
“어서 오세요, 손님. 여기는 처음이시죠? 저기에 앉으세요.”
곧이어 예쁜 소녀가 후다닥 튀어나왔다. 낡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는데도 드러나는 미모, 나중에 크면 상당한 미인이 될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층은 식당이었다. 4각형 식탁이 6개 놓여 있고, 그중 셋을 손님들이 차지하고 앉아 음식을 먹고 있는 중이다. 아직까지는 식사할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라이는 소녀에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밥 먹으러 온 게 아니라 투숙하러 온 거야. 빈방 있냐?”
소녀는 라이의 행색을 슬쩍 훑어본 뒤 얼른 대답했다.
“예, 있어요. 다인실은 5타라짜리 동전 한 닢이에요. 혹시 다른 집보다 조금 비싸다고 생각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우리 집은 아침 식사까지 제공하거든요.”
라이는 전혀 비싸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가격만큼은 꽤나 저렴한 것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낯선 사람들과 한방에 투숙해야 한다는 건 그다지 탐탁지 않았다.
“1인실은 없냐?”
“1인실은 10타라에요.”
라이는 품속에서 두목에게서 받았던 작은 가죽주머니를 꺼내 1실버짜리 은화 한 닢을 꺼내 소녀에게 건넸다.
“일단은 10일 동안 묵고 싶다.”
소녀는 은화를 받아 들고 안쪽으로 후다닥 뛰어들어갔다. 잠시 후, 안에서 50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뚱뚱한 아줌마 한 명이 걸어 나왔다.
“1인실에서 묵겠다는 장기투숙 손님은 정말 오랜만에 보네.”
아줌마는 방실방실 웃으며 라이에게 키를 건넸다. 은화가 손에 들어온 게 꽤나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열쇠는 여기 있수. 3층에 올라가서 끝방, 5호실이라우.”
아줌마에게서 열쇠를 받아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계단 하나를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음이 요란하게 울린다. 몸에 걸친 것도 거의 없는 상태인데도 이 정도인데, 중무장을 갖춘 상태라면 계단이 내려앉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다. 귀에 무척 거슬렸지만, 라이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누군가 몰래 자신을 습격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다고 해도, 걸을 때마다 울려 퍼지는 삐걱거리는 소음 때문에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거라고 말이다.
‘여기로군.’
열쇠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상대로 냄새가 풀풀 나는 정말 작은 방이었다. 가구라고는 벽 한쪽에 놓여 있는 침대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나마 작은 창문이 있어 답답하지 않은 건 마음에 들었다.
라이는 먼저 창문을 활짝 열고 환기부터 시키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창문 아래쪽으로 옆집 지붕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유사시에 창문을 통해 옆집 지붕으로 도망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한 라이는 한층 마음이 놓였다.
방 안 벽에는 나무못 몇 개가 박혀 있어 옷을 걸어 놓을 수도 있었지만 라이는 본 척도 하지 않고 침대 위에 벌렁 드러누웠다. 신발도 벗지 않고.
‘윽! 이게 뭐야……?’
황급히 천을 들어 침대 바닥을 보자 거무죽죽한 색깔의 깔판이 보인다. 슬쩍 코를 대보니 불쾌한 냄새의 근원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설마…, 짚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갈지 않은 건 아니겠지?’
잠시 투덜거리던 라이는 다시 침대 위로 편안한 모습으로 벌렁 드러누웠다. 냄새나는 침대면 어떤가. 이렇게 제대로 된 잠자리에 누워 보는 것도 정말 오랜만인데 말이다. 루산나라고 했던 그 여자에게서 꽤나 많은 돈을 뺏은 덕에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을 때도 하수구가 흐르는 으슥한 다리 밑에서 밤을 지새웠으면 지새웠지, 여관에 들어가서 잘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다. 갑자기 불심검문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그대로 잡혀가 교수형에 처해질 거라는 두려움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가만히 누워 있자니 긴장이 풀리며 오늘 겪었던 상황들이 하나씩 머리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떠오른 건 골목길에서의 싸움이었다.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 게다가 4명이나 됐음에도 그렇게 쉽게 제압할 수 있을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그가 대련일망정 검을 맞대 봤던 인물들 중에서 만만했던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약한 건 아닌가 보네. 아니, 어쩌면 내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한 건지도?’
그 뒤로 루산나라는 여인의 기습을 왠지 모를 나쁜 예감에 자신도 모르게 움직이며 반응했던 일. 상념은 계속 이어져서 철문에서의 함정을 예감만을 믿고 과감히 대처하며 돌파했던 것까지. 한편으로는 이전까지의 나약했던 모습이 아닌, 꽤나 강한 자신의 실력에 자신감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과정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제대로 된 준비 없이 즉흥적으로 좌충우돌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라이는 그동안 자신의 어리숙함이 어떤 결과로 되돌아왔는지를 기억해 내며 이를 갈았다. 단 한 번의 실수가 노예로 이어졌고, 그 뒤로 겪어야 했던 일들은 기억하기 싫을 만큼 참혹하지 않았던가. 웃으며 접근해 와 태연하게 자신의 뒤통수를 치는 연놈들로 인해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겨야 했다.
어쩌면 자신의 문제는 무력보다 아직 어린아이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 더 클지도 모른다. 만약 루산나가 본부로 안내를 해 주겠다고 했을 때 자신이 좀 더 교활했더라면, 좀 더 정보를 모으고 대비 태세를 갖추고 찾아갔더라면 지금 이런 상황으로까지 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지난 일이기에 후회로 밤을 새우긴 싫었지만, 똑같은 실수를 계속 저질러서는 안 되리라. 라이는 마음을 다잡고자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마치 스스로 자신에게 세뇌를 시킬 것처럼.
“모든 것을 의심하자. 만약 적의를 보인다면 주저하지 말고 먼저 검을 휘두르자. 이용당하기보다 먼저 뒤통수를 치자. 만약 이렇게까지 마음을 먹었는데도 또다시 뒤통수를 맞는다면 난 죽어도 마땅한 병신 새끼다.”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중얼거리던 라이는 언제 잠에 떨어졌는지도 모르게 스르륵 정신을 잃어버렸다. 그동안 팽팽히 당겨진 끈처럼 긴장감에 휩싸여 살아왔던 라이였기에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에 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분명 정신을 잃을 정도로 잠에 빠져든 것처럼 보이는 라이였지만 손은 검의 손잡이를 꼭 붙잡은 채 떨어질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