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이 깬 라이는 놀라서 화들짝 몸부터 일으켰다. 경계심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좁디좁은 방 안이다. 하지만 그게 오히려 그에게 안정감을 찾아 줬다.
“여기가 어디? 아 참, 여관에 투숙했었지. 낡아빠지고 냄새가 심한 여관…….”
창 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아직 밖은 환했다. 해가 지기 전까지는 다소 여유가 있는 듯했다.
‘이런, 깜빡 잠이 들었었던 모양이네.’
사람을 대상으로 실전을 치른 것이 처음이었던 탓일까? 아니면 사내들과 싸우던 장면을 떠올리며 잠이 들었던 탓일까. 라이는 오랜만에 예전에 꿨었던 이방여인의 꿈을 꿨다. 한낱 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모습과 행동은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선명하게 그의 뇌리에 남아 있었다.
꿈속에서 보았었던 놀랍기 짝이 없던 그녀의 검술. 처음 그녀의 꿈을 꿨을 때는 허무맹랑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왠지 자신도 약간은 흉내라도 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만큼 꿈은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던 라이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쯧, 이런 개꿈을 꾸고 그걸 따라 했다고 해서 고수가 될 수 있다면 세상천지 마스터가 아닌 놈이 없겠네. 헛된 생각에 휘둘리지 말고 현실에 충실하자, 라이!”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라이는 서둘러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푹 잔 덕분인지 허기가 몰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삐걱거리는 요란한 소음을 내는 계단 탓인지 채 1층 바닥을 밟기도 전에 점원 아이가 눈치채고 말을 걸어 왔다.
“외출하실 거예요, 아니면 식사하실 거예요?”
“지금 식사 준비해 줄 수 있니?”
“예. 저쪽에 앉으세요.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건물 자체가 작다 보니 1층 식당 또한 작고 옹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꽤나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기 위해 북적거리고 있었다. 그걸 본 라이의 마음에 기대 심리가 살짝 피어올랐다. 건물은 허름하지만 음식 맛은 괜찮을 거라는 사내의 말이 떠오른 탓이다. 게다가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이렇게 손님들이 많은 걸 보면, 제법 음식 맛이 괜찮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다.
라이는 일단 음식을 혼자 먹기 힘들 만큼 넉넉히 주문했다. 지금까지 겪은 경험으로 먹을 수 있을 때 최대한 배를 채워 두는 게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되었으니까. 더군다나 두목이 준 돈주머니에는 이 정도 음식 따위는 부담 없이 사 먹을 수 있는 돈이 있었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라이의 두 눈은 어느샌가 점원 아이의 뒤를 쫓고 있었다. 딱히 할 일도 없었고,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기도 했으니까. 그리고 그 소녀가 지루한 시간을 잊게 해 줄 정도로 제법 예쁘다는 것도 크게 한몫했다. 아니, 예쁘다는 것만으로 그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의 손님들이 단골들인 모양인지, 그들과 친밀하게 대화를 주고받으며 싱그럽게 웃는 얼굴이 참 보기 좋았다.
아무리 열두어 살 정도밖에 되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이런 뒷골목에서 성장하다 보면 어린아이의 순진무구함 따위야 빠르게 사라지고 변해 갈 수밖에 없다. 그런 걸 감안하면 꽤나 밝게 성장한 모양이다. 라이는 그게 부러웠다.
‘젠장, 내가 저 나이 때는 아버지한테 잡혀서 검술을 익힌다고 죽을 고생을 다 했었는데 말이야.’
더군다나 자신은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조차 받아 보지도 못했으니…….
이때, 라이가 자리 잡은 테이블 옆자리에 40대 중반쯤으로 보이는 사내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앉았다. 행색으로 보아 사냥꾼 같아 보였다. 별로 강력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휴대하기에 간편해 보이는 석궁으로 무장하고 있는 걸 보면, 잡기 손쉬운 사냥감들을 사냥하러 다니는 모양이다.
“어서 오세요, 아저씨들.”
“핫핫핫, 세라. 오늘도 역시 예쁘네.”
“헤헤, 감사합니다. 뭘 드실래요?”
식당 안은 사람들로 가득 차 무척 바빠 보임에도 사내들은 주문은 하지 않고 빙글거리며 잡담이나 건네고 있었다.
“오늘은 왠지 기분이 무척 좋아 보이는데, 뭐 좋은 일이라도 있어?”
사내의 말이 맞는지 세라는 귀찮아하는 기색 없이 활짝 웃으며 대꾸를 해 주었다.
“에이, 그런 거 없어요.”
“쯧, 우리들이 세라를 어디 하루 이틀 봤어? 척 봐도 기분 좋아 보이는 티가 확 나는구만. 어서 말해봐. 무슨 일인데 입꼬리가 귀에 걸릴 정도로 싱글벙글하는지 말이야.”
“헤헤, 뭐 특별한 건 아니고 오늘 엄마를 만나는 날이거든요.”
“아하, 부잣집에 들어가 가정부를 하고 계시다는? 이거이거 세라가 기분 좋아할 만하네. 오랜만에 엄마를 만나게 됐으니 말이야.”
남자들이라면 돈을 벌기 위해서 최악의 경우 용병이라도 하겠지만, 여자들은 할 수 있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은 세상이다. 육체적 능력이 떨어지는 만큼, 할 수 있는 일이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개중에는 모험가로서 사내 못지않게 이름을 떨치는 여자도 간혹 있긴 했지만, 그건 극히 희귀한 경우라고 봐야 했다.
만약 전쟁터로 끌려가거나 아니면 사고로 인해 집에 돈을 벌어올 남자가 없으면 여자들만으로는 일을 해서 먹고 살기 무척 힘들다. 당연히 그런 집의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돈을 벌기 위해 뭐라도 해야 한다. 눈앞의 세라처럼 식당에서 일하거나, 아니면 도둑질이나 소매치기를 하거나.
“지금 주문하지 않으실 거면 나중에 다시 올게요.”
그러기는 싫었는지 사내들은 저마다 먹고 싶은 것들을 불러주기 시작했다.
식사를 마치고 라이는 천천히 식당을 나섰다. 최소한 6개월 정도…, 어쩌면 그 이상 이 마을에 머물게 될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가 해야 하는 일은 폭력조직에 관련된 만큼, 아주 위험한 일일 가능성이 컸다. 이런 경우, 마을 내의 샛길들을 잘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뒷골목의 지형을 얼마나 잘 알고 있느냐에 따라 생과 사가 갈릴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머릿속으로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을의 규모가 조금만 커져도 어디가 어딘지 헷갈리기 시작한다는 게 문제였다. 작은 시골마을에서 성장한 탓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계속 왔다갔다 하다 보면 어느샌가는 머릿속에 굵게 새겨지지 않을까 하는 게 라이의 바램이었다.
그러면서 몇 번이고 마주친 대장간. 각종 농기구나 사냥도구가 파는 물품의 대부분이었다. 라이가 예전에 잠시 사용했었던 도렌 영지에서 제작된 초대형 활 같은 게 여기에서도 판매되고 있었다. 활만이 아니었다. 저런 무기를 들고 산속을 뛰어다닌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싶은 그런 것들도 꽤 많았다.
‘이 근처에 초대형 몬스터들이 꽤나 많은 모양이군. 그렇지 않다면 저런 무식한 무기들을 이렇게 팔고 있지는 않을 테니 말이야.’
라이는 시선을 잡아끄는 초대형 무기들로부터 눈을 돌려 자신이 구입하려고 한 무기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가 찾고 있는 건 단검이었다. 뒷골목 깡패 싸움에는 롱 소드 같이 기다란 무기보다는 휘두르기 편한 짤막한 단검이 훨씬 효과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아, 저기 있다.”
대장간에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다양한 종류의 단검들이 보기 좋게 판매대에 진열되어 있었다. 사냥물로부터 부산물을 잘라 내는 데 효과적일뿐더러, 여차하면 보조무기로도 써먹을 수 있는 그런 단검들이었다.
“이거 괜찮네.”
라이가 고른 건 50cm 정도 길이의 한쪽 면에만 예리하게 날이 서 있는 단도였다. 이 정도 크기면 몸속에 숨기기도 용이할뿐더러, 여차할 때 무기를 든 상대와 접전을 벌여도 그리 크게 밀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단도를 집어든 라이는 칼날부터 확인했다. 역시, 산골 마을 대장장이가 만든 딱 그 정도 수준의 물건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좋은 걸 사려면 그만큼의 돈을 더 지불해야만 할 테니까.
라이는 며칠 지나지 않아 두목으로부터 뭔가 지시가 내려올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꽤 오랜 시간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무렵, 갑자기 사람이 찾아왔다. 자신을 이곳으로 안내해 줬던 ‘당코’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내였다.
“잘 지냈나?”
가벼운 인사를 주고받으며 당코는 창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창문을 조금만 열고 밖을 살피며 입을 여는 당코. 꽤나 조심성이 많은 사내였다.
“자네가 해 줄 일이 하나 생겼다.”
상대가 먼저 반말로 나왔기에 라이도 태연하게 반말로 대꾸했다. 얕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자신보다 분명 훨씬 나이가 많아 보이는 당코였지만 이런 사소한 것조차도 기싸움으로 인식한 라이였다. 게다가 싸운다면 충분히 이길 만한 상대였기에 이런 태도에 부담이 없었다.
“오랜만이네. 그래, 무슨 일이야?”
아직 어린놈의 새끼가 반말로 대꾸하자 당코, 아니 루크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그런데 며칠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라이의 표정과 말투가 많이 변해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이리저리 눈치를 살피며 어설프게 말을 했던 놈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지금은 이런 바닥에서 몇 년은 구른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다. 만약 며칠 전의 어리숙한 모습을 보지 않았었다면 믿기 힘들 만큼의 변화였다.
이 바닥에서 살아남으려면 실력도 실력이지만 눈치가 빨라야 한다. 루크는 눈치도 빨랐지만 그에 따른 처세술도 뛰어났기에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깜짝 놀랄 만큼 변해 버린 라이를 보며 뒷골목에서 닳고 닳은 루크는 빠르게 놀랐던 가슴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고는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어린놈의 새끼가 건방지든, 변화가 있든 무슨 상관이랴.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뒈질 놈인데.
“이곳 시장통에 꽤나 골치 아픈 녀석이 하나 있거든. 그 녀석을 해치우라는 두목의 명령이야. 네 실력을 감안한다면 아마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순간 자신의 얼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진 걸 느낀 라이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상대에게 그게 꽤나 어설픈 미소로 보인다는 것도 모른 채.
“해치우라면…, 놈을 죽이라는 말인가?”
“당연하지. 설마 우리가 소꿉장난이나 하자고 조직을 운영하고 있겠어?”
6개월 동안 조직과의 세력 다툼에 끼어 패싸움 정도는 생각했지만 갑자기 살인이라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잠시 고민하던 라이가 잠시 후 겨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몇 명이나 이 일에 투입되는 거지? 설마 나 혼자 그 일을 하라는 건 아니겠지?”
“맞아, 너 혼자 해야 해.”
그 말에 당혹스런 표정으로 라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루크는 음흉스런 미소를 지으며 계속 입을 열었다.
“요즘 우리가 장악하고 있는 동부시장 구역 안으로 샐러맨더 파 녀석들이 슬금슬금 기어들어오고 있어. 아, 혹시 샐러맨더 파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있나?”
라이가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젓자 루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웃었다.
“폭력조직치고는 뒷배가 꽤나 튼튼한 놈들이야. 구역 싸움이 일어나 그 자리에 있던 조직원들이 몽땅 다 경비대에 체포되더라도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풀려났고, 이쪽은 돈을 처발라 봐도 반쯤 병신이 되어야 풀어주니 이거 원 더러워서…….”
루크는 창밖으로 침을 탁 뱉은 후 말을 이었다.
“그 덕분에 알토란같은 우리 구역 몇 군데를 녀석들에게 뺏겼고, 그 빌어먹을 새끼들은 급격히 세력을 불리며 거들먹거리고 있는 중이지.”
루크가 하고 있는 말은 형편에 끼워 맞춘 거짓말들이었지만 그걸 라이가 알 리가 없다. 워낙에 능청스럽게 말하는 통에 라이로서는 상대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형씨 말은 결국 이곳에 연고가 없는 나보고 해결사 노릇을 해 달라는 소린가?”
“그래, 바로 그거야. 잭, 네가 우리 조직원이 된 걸 아직 아무도 모르니 일을 벌인다 해도 걸릴 일이 없지.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너 혼자 이 일을 맡아야 하는 거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살인까지는 생각해 보지 않았던 라이였기에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했다. 루크는 라이가 고민을 할수록 절대 좋은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오랜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기에 얼른 호탕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핫핫, 아주 악질적인 쓰레기 같은 새끼라 놈을 죽이면 꽤나 많은 시장 사람들이 좋아할 거야. 마음 같아서는 내가 직접 놈을 해치우고 싶지만, 그랬다간 우리 조직으로 경비대 놈들이 개떼처럼 몰려올 테니 그러지도 못하고.”
루크는 대놓고 해치워야 할 상대가 쓰레기 같은 놈이니 부담 가질 필요 없다는 것과 실력이 그다지 뛰어나지 않다는 점을 강조하며 설득했다. 그래도 라이가 쉽게 승낙을 하지 않자 다시금 입을 열었다.
“당연히 잭, 너는 홀가분한 상태니까 걱정할 것 없어. 지금 자네가 여기에 묵고 있다는 건, 조직 내에서도 나하고 두목님 정도밖에 아는 사람이 없어. 그런데 샐러맨더 그 개자식들이 네 행방을 어떻게 찾아내겠느냐고. 안 그래?”
“…….”
말은 안 했지만, 라이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루크는 더욱 은근한 어조로 꼬드겼다.
“그 빌어먹을 새끼들 때문에 요즘 우리 조직이 좀 쪼그라들긴 했지만, 자네 한 명 지켜 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걱정할 것 없어. 여차하면 요새 밖으로 내빼 산골 마을로 숨어 들어가면 끝이니까 말이야. 아, 참! 두목께서 그러더군. 만약 이 일만 훌륭히 해낸다면 계약 기간을 삼 개월로 확 줄여 주시겠다고 말이야.”
루크의 마지막 말은 라이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삼 개월! 삼 개월만 참으면 이 마을을 떠날 수 있다. 물론, 이곳 마을을 벗어난다고 해서 곧바로 고향에 도착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계약 기간이 절반으로 줄어든다는 건 너무나도 달콤한 유혹이었다.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크크, 잘 생각했어. 우리 조직은 다른 건 몰라도 의리만큼은 확실히 지키니 너무 걱정하지 마. 참,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어 경비대에 붙잡히게 되더라도 절대 우리 조직에 대한 말은 단 한마디도 해서는 안 돼. 우리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꼭 구출해 줄 테니 말이야.”
루크는 라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기분이 좋은지 비릿한 웃음을 연이어 흘렸다.
“알겠으니, 내가 해치워야 할 놈이 누군지 말이나 해.”
“블러드 엑스(Blood Ax)라는 놈이야.”
커다란 덩치에 빡빡 민 대머리를 하고 있는 야만적인 인상의 사내라고 했다. 더군다나 이마 한가운데에 붉은 도마뱀 문신까지 새겨놓은 탓에 그의 인상은 더욱 흉악해 보인다고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녀석을 알아보기는 아주 쉬울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놈은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그 별명에 어울리게 커다란 전투도끼를 사용하지만, 평소에는 작은 손도끼 두 개를 양쪽 허리춤에 차고 다닌다고 했다.
“아, 그러고 이거 받아.”
이런저런 설명을 마친 루크는 품속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 라이에게 건넸다.
“이게 뭐지?”
“독약이야. 그놈은 워낙에 덩치가 크고 튼튼해서 웬만한 상처로는 잘 죽지도 않는 괴물이야. 이런 게 없다면 어떻게 놈을 죽일 수가 있겠어? 검 끝에 조금만 발라 둬도 충분해.”
루크는 라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자, 이것만 봐도 우리가 자네를 죽이러 보내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겠지? 자네는 그걸로 놈에게 작은 상처만 안겨 주면 되는 거야. 그러면 곧바로 게거품을 흘리며 뻗어 버리겠지.”
라이는 찝찝한 기색 없이 흔쾌히 독약이 담긴 병을 받아들었다. 자신이 살기 위해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지만 아직까지도 썩 내키지 않은 상태다. 그런데 직접 목숨을 끊는 게 아닌, 적당히 상처만 내면 알아서 죽는다고 하니 그편이 훨씬 마음이 가벼웠기 때문이다.
“식사 후에 이곳 유흥가로 온다는 정보니까, 아마도 해 질 무렵쯤이 될 거야. 물론 그보다 조금 빨라질 수도, 늦어질 수도 있겠지. 어쨌거나 주위가 어둑해질 때니 습격을 한 뒤 튀기에는 꽤나 괜찮은 상황이야. 절호의 기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