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7화 (843/930)

✻ ✻ ✻

라이는 자신이 어떻게 여관까지 돌아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자신의 방에 도착해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런 젠장…….”

꽤나 오랜 세월 용병생활을 했고, 실전경험이 전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그게 다 몬스터들을 상대로 한 것이었지만. 하지만 사람을 죽였다는 게 이렇게까지 정신적 충격을 안겨 줄 거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라이였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도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정도였다.

“쓰레기 같은 놈 몇 명 죽인 거 가지고 내가 왜 이러지?”

뱃속에 있는 걸 다 토하고 신물이 넘어올 정도인데 아직까지도 속이 메슥거렸다. 그런 나약한 마음을 다잡으려고 라이는 자신을 향해 열심히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어느새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쓰레기 같은 놈들을 몇이나 더 죽여야 할지 모르는데, 매번 이런 식이면 아주 곤란하잖아. 맞아, 당코가 그랬어. 죽이면 사람들이 좋아할 만큼 아주 악질적인 놈이었다고. 어쩌면 나를 노예로 팔아넘긴 그놈들처럼 인간말종일 게 분명해. 그런 놈들을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 그동안 인간형 몬스터들은 많이 죽여 봤잖아. 놈들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형 몬스터야. 인간형 몬스터!”

그건 첫 살인 후 겪게 되는 죄의식을 이기기 위한 발버둥이었다. 그런데 정신없이 이런저런 말을 하다 보니 자신을 노예로 팔았던 뒷골목의 깡패들과 용병대의 올란도 중대장, 얼마 전에 자신의 뒤통수를 거하게 쳤던 대장의 기억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으드득.

인간을 죽였다는 죄의식에 허덕거리던 그의 마음이 순간 차갑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들에 대한 원한이 가슴 깊숙한 곳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어쩌면 죄의식을 이기기 위해 그들에 대한 원한이 그만큼 깊은 것으로 착각하기를 바랬기에 그런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방법은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잠깐 동안이지만 죄의식에 사로잡힌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 쓰레기 같은 놈들은 누구라도 치워야 해. 그래야 나 같은 피해자가 또다시 안 나타나지.”

라이는 의식적으로 살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 시작은 몇 번이고 꿈속에 나타났던 여인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사실 블러드 엑스에게 찔러 넣은 단검이 뭔가에 막히기라도 한 듯 쇳소리와 함께 전혀 들어가지 않았을 때, 라이는 하마터면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옷 안에 가죽갑옷까지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 속에 사슬갑옷까지 걸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까. 거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주위에서 달려온 호위들에게 포위까지 당해 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했지만, 도무지 뚫고 나갈 수가 없었다.

절체절명이었던 그 순간,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꿈속에서 봤던 그 이국적인 여인이 검술을 펼치던 장면이었다. 자신의 실력으로는 방법이 전혀 없으니 그 여인의 환상적인 검술이라면 어떻게든 여기서 살아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녀가 구사했던 검술을 자신도 한번 따라 해 보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든 것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그런 꿈같은 일 외에는 더 이상 그 어떤 방법도 없었기에 행한 마지막 발버둥이었을지도 모른다. 반쯤은 자포자기한 마음으로 꿈속에서 보았었던 그녀의 검술을 따라 하는 순간, 라이는 놀라운 경험을 할 수가 있었다.

“내가 그때 어떻게 했던 거지?”

라이는 아직도 그때의 그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라이는 황급히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들었다. 동물 가죽을 벗기는 데나 쓰면 딱 좋을 만한 싸구려 단검이다. 이런 검이 마치 전설 속에 나오는 신검이나 되는 듯 블러드 엑스의 사슬갑옷을 진흙 베듯 썽둥 썰어 버렸다. 그뿐만이 아니라 녀석의 뼈와 살까지 함께 한 번에……. 당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경악에 차 부릅떠져 있던 녀석의 두 눈이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저 꿈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 꿈이 분명했는데 그게 사실일 줄이야……. 이럴 수도 있는 거야?”

꿈속에서 본 검술을 따라 했더니 그게 진짜 되더라는 얘기는 동네 코흘리개 꼬맹이들조차 믿지 않을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다. 하지만 그게 진짜 현실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는가. 더군다나 그 덕분에 목숨까지 건졌으니…….

라이는 일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방금 전에 자신이 블러드 엑스 패거리들을 해치우기 위해 사용했던 검술을 떠올리려 애썼다. 사고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돌리자 몸의 떨림은 서서히 잦아들어 갔다.

물론, 이건 그가 무의식적으로 익히고 있던 태허무령심법 덕분이었지만, 라이는 그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애를 쓴 보람이 있었는지 검술을 떠올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마음을 어느 정도 차분히 안정시킬 수는 있었다. 마음이 안정되자 자연스럽게 이번 임무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었다. 그제서야 라이는 자신이 얼마나 멍청한 짓거리를 저질렀는지에 대한 자각을 할 수 있었다.

블러드 엑스 패거리를 해치운 후, 당황한 나머지 이곳까지 정신없이 도망치면서 수많은 흔적들을 그대로 남겨 두고 온 것이다. 자신이 살인하는 장면을 봤을 증인들도 부지기수일 터이고.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자신이 현재 머무르고 있는 여관까지 헐레벌떡 곧바로 내달려 왔다는 점이다.

라이는 당혹스런 표정으로 방구석에 아무렇게나 던져 놨던 자신의 로브를 바라봤다. 로브는 이미 검붉은 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을 최대한 활용해 도망치기는 한 것 같은데 자신의 허둥대는 모습을 괴이하게 바라본 사람이 한둘은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로브에 묻은 핏자국을 본 자도 있을지도.

‘참, 여관으로 들어올 때 나를 본 사람이 있었나?’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는 너무 당황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런 젠장!”

라이는 후다닥 창가 쪽으로 달려가서 바깥부터 살폈다. 혹시 누군가 수상쩍은 사람이라도 있나 싶어서…….

✻ ✻ ✻

임무를 성공시키면 안전한 은신처와 도주로를 제공하겠다던 당코라는 사내를 라이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당코가 달려왔다. 그는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창문 쪽으로 달려가 혹시 누군가 자신의 뒤를 쫓아온 자가 있는지 철저하게 살펴본 후에야 라이에게 말을 걸었다.

“고생했어. 역시 실력이 대단한걸. 네 일 처리 솜씨가 마음에 드신다며 두목님께서도 크게 기뻐하고 계신다.”

사실은 기뻐했다기보다 당황해 했다는 게 맞았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잭은 블러드 엑스를 습격해서 죽이는 데까지는 성공하지만, 그 후 호위들에게 붙잡혀 끌려가 갖은 고문을 당하다 자신의 배후가 블랙울프라는 걸 실토했어야만 했다.

그래야 샐러맨더 파와 블랙울프 파가 정면으로 격돌하게 될 테니까. 자신들은 그저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싸움 구경이나 하면서 전쟁이 더 확대될 수 있도록 이간질이나 살살하면 만사 OK였다. 더군다나 그 과정에서 자신의 애인인 루산나를 욕보인 잭이라는 놈에 대한 복수까지 완성할 수 있으니, 그야말로 일석이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두목의 예상과는 달리 잭이 블러드 엑스는 물론이고, 그의 호위들까지 몽땅 다 죽여 버리는 괴력을 발휘해 버렸다. 덕분에 지금 마을은 발칵 뒤집혀져 있는 상태였다. 독이 바짝 오른 샐러맨더 파의 전 조직원들이 개떼처럼 몰려나와 마을 곳곳을 샅샅이 뒤지며 작은 단서라도 확보하려 하고 있는 중이다.

전혀 예상치도 못한 최악의 상황!

가장 좋은 건 간부급들 몇몇과 잠수를 타는 건데, 오히려 그건 이쪽이 했다고 자백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이대로 모르는 척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샐러맨더 파의 조직원은 물론이고, 경비대원들까지 몰려나와 살인자를 찾아 탐문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조만간 잭에 대한 단서를 찾아낼 거라고 두목은 우려하고 있었다.

부두목과 머리를 맞대고 이런저런 잔머리를 굴리던 두목은 결국 잭을 다시 한 번 더 써먹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버릴 패였다. 그렇다면 아예 혼란을 더 키워 놈들의 시선을 잭에게로 집중시켜 버리는 게 최선의 방책인 것이다.

그래서 급하게 루크가 달려온 것이다. 잭이 발각되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써먹기 위해. 루크는 품속에서 제법 묵직해 보이는 돈주머니 하나를 꺼내 라이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건 이번 임무를 훌륭하게 성공시킨 것에 대한 두목님의 만족의 표시야.”

돈주머니를 끌러보자 금화 몇 개와 신분증 하나가 보였다. 급히 꺼내 보니 라디에르란 이름이 보인다. 신분증에 기록된 그의 신체적인 특징은 라이의 그것과 매우 유사했다. 이 정도라면 국경 경비대도 별 의심 없이 통과시켜 줄 거라고 생각되었다.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하지 않았었나?”

“운이 좋았지. 너하고 비슷한 나이와 체형을 지닌 사람을 찾아낸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알아?”

“…….”

“아주 깨끗한 거야. 절대로 발각될 염려도 없어. 그 신분증은 슬쩍 소매치기해서 훔친 게 아니라 소유자를 깨끗하게 해치워 버린 뒤 얻은 거거든. 시체야 땅속 깊이 파묻어 버렸으니, 도난신고가 접수될 리도 없고 말이지.”

그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창고 구석에 수북이 쌓여있던 신분증들 중에서 잭이라는 녀석과 비슷한 용모를 지닌 것으로 대충 골라서 가져온 것일 뿐, 저걸 사용할 수 있느냐는 차후의 문제다. 요는 지금 이 순간, 잭이라는 녀석을 안심시켜 줄 수만 있으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라디에르…, 라디에르라…….”

“왜? 라디에르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라이는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그건 아니야.”

라이의 시선이 이번에는 금화 쪽으로 돌아갔다. 얼핏 봐도 10개가 넘어 보였다. 예상보다 커다란 금액에 라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두목께선 다른 건 몰라도 약속하신 건 언제나 확실하게 지키시는 분이지. 그 금화는 여비로 쓰라고 넣어 두신 거야. 그건 그렇고, 네가 해 줘야 할 일이 마지막으로 하나 더 있어.”

물론 두목에게서 받은 금화는 훨씬 더 많았지만 이미 루크의 품속으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어차피 죽을 놈인데 뭐하려고 그렇게 큰돈을 준다는 말인가. 요는 놈을 안심시켜, 다음 함정으로 인도하면 되는 것뿐인데 말이다.

“마지막 일이라고?”

“상황이 우리 예상과는 다르게 너무 급박하게 돌아가다 보니 두목께서 네게 제안을 하나 하셨다. 술집 주인 하나를 더 죽여 준다면 네가 계약의 조건을 모두 이행한 것으로 쳐주시겠다고 말이야.”

라이는 마치 꿈이라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방금 전에 들은 게 사실일까?

“그게 정말이야? 이 마을을 떠나도 된다고?”

“물론이지. 그 증거로 네가 원한 신분증과 여비까지 이미 받았잖아. 두목께서 그러시더군. 자신도 어렸을 때 갖은 개고생을 해서인지 네놈을 봤을 때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그래서 이 정도로 계약을 완수한 걸로 해 주시겠다는 거지.”

“그럼 그냥 놔주면 되는 거 아냐. 그런데 또다시 누군가를 죽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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