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48화 (844/930)

이번 일만 하면 계약을 끝내주겠다는 말은 좋았지만, 또다시 살인을 해야 한다는 조건은 너무 싫었다. 얼마 전에 블러드 엑스 패거리를 죽인 후에도 정신없이 토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또다시 그런 일을 겪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쯧, 이래서 애송이들이란 자기 생각만 한다니까. 그놈을 죽이는 건 우리 조직을 위한 것도 있지만, 너를 위한 것도 있어.”

“나랑 관련이 있다고?”

“그래. 지금 샐러맨더 파가 이 마을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는 이유가 뭐겠어? 원래 샐러맨더 파의 본거지는 다란툼 성인데 말이야.”

전혀 모르겠다는 듯 라이가 어깨만 으쓱하자 루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예전에도 내가 말해 줬었던 것 같은데? 샐러맨더 파를 여기 높으신 나리들이 밀어주고 있다고 말이야. 즉, 샐러맨더 쪽에서 이곳 요새 지휘관부터 시작해서 핵심 요직에 있는 자들을 몽땅 다 자기편으로 포섭하고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걸 가능하게 해 주는 통로가 바로 자네가 죽여야 하는 술집 주인 ‘칼릭스’라는 놈이고 말이야.”

“…….”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잭이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걸 본 루크는 짐짓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지만 이건 철저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잭이 깊은 내막을 알지 못하는 걸 아니 이렇게 사기를 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잭에게 미리 건네준 신분증도 지금 꺼낼 말을 하기 위해 급히 준비해서 가지고 온 것이었으니까.

“핵심 간부들 중 하나인 블러드 엑스가 비명횡사를 당했는데, 샐러맨더 놈들이 멍하니 손 놓고 가만히 있을 것 같아? 녀석들은 자신들의 조직원만으로 범인을 잡기 힘들다는 판단이 들자, 요새 고위 관리들에게 전폭적인 수색 협조를 요청하려 하고 있다고. 칼릭스를 빨리 해치우지 못한다면, 범인이 잡힐 때까지 국경부터 시작해 모든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가 틀어 막힐 거야. 자네에게 준 신분증이 꽤나 안전한 것이긴 하지만, 보다 강화된 검문검색까지 통과할 수 있을지는…….”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는 데 깜짝 놀란 잭이 황급히 신분증을 꺼내 살펴보는 것을 보며 루크는 미소를 감추기 힘들었다.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넘어가리라…….

“오늘 밤, 칼릭스가 요새 내의 고위층들을 자신의 술집에 초청했다는 극비 정보를 입수하고 곧바로 이리로 달려온 거야. 자네는 놈이 그들에게 영지 외부로 나가는 모든 통행로를 틀어막아 달라는 요청을 하지 못하게 막아야 해. 그 방법은…, 방금 전에도 말했지?”

“그래서…, 칼릭스를 죽여야 한다는 건가?”

“그래. 칼릭스만 죽이면, 자네는 이 마을을 떠나도 돼. 좀 더 도움을 받았으면 좋긴 하겠지만, 뭐 사실 그다음은 우리들의 힘으로도 어느 정도 해결이 가능하니까 말이야.”

라이는 하마터면 홀딱 넘어갈 뻔했다. 하지만 지금껏 이런 식으로 입에 발린 말에 넘어갔다가 뒤통수를 맞은 게 어디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수상쩍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야기가 자기한테 너무 좋은 쪽으로 흘렀다. 두목이 자기를 언제 봤다고 이렇게까지 호의를 베풀 리 없지 않겠는가.

“나한테 좋은 건 알겠고, 그렇게 했을 때 그쪽이 얻는 이득은 뭐지?”

홀딱 넘어갈 듯하던 잭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루크는 짜증이 확 치밀었다.

‘정말 깐깐한 놈이네. 자기 잇속만 챙기면 됐지, 남까지 신경 쓸건 또 뭐야?’

“물론 자네 혼자 좋으라고 이러는 건 아니야. 당연히 이쪽에도 이익이 있지. 무엇보다 칼릭스 그 녀석은 그야말로 우리 블랙울프 파에 있어 눈엣가시 같은 존재거든. 왜냐하면 녀석이 있음으로 인해 샐러맨더 파가 이곳 요새의 고관들을 포섭할 수가 있었으니까.”

“인맥이 무척 넓은 모양이군.”

“인맥이 넓다는 것보다 사람 다루는 수완이 좋다는 말이 더 정확하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요새의 고위 관료들을 구워삶으려면 일단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허긴…….”

“놈이 운영하는 ‘여왕벌의 둥지’는 여기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최고급 주점이지. 더군다나 요즘은 술과 계집장사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도박장까지 운영하면서 돈을 아주 긁어모으고 있는 중이야. 거기서 벌어들인 그 엄청난 돈으로 관리들에게 뇌물을 먹이고, 세력 확장을 하고…….”

라이는 더 이상 들을 것 없다는 듯 손을 저어 상대의 말을 끊어 버리며 말했다.

“그 부분은 됐고, 말을 듣다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하나 있는데…….”

“뭔데? 빨리 말해봐. 상세하게 설명해 줄 테니까.”

“그런 거물을 죽여 버리면, 녀석과 사이가 좋은 고관들이 가만히 있을까? 친구의 원수를 갚겠다고 들면서 검문검색을 강화한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제법 예리한 구석이 있단 말씀이야…, 하고 생각하며 루크는 머리를 굴려 변명했다.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자네는 그 전에 이미 이 마을을 벗어난 후일 텐데 뭐가 걱정이지? 두목께서 원하는 건 자네가 칼릭스를 죽인 후에도 이 마을에 계속 남아서 도와달라는 게 아니잖아. 자네는 칼릭스를 죽인 후, 검문검색이 강화되기 전에 빨리 이곳을 떠나 버리면 된다고.”

“허긴…….”

“자자, 자네는 쓸데없는 걱정 할 필요 없어. 일이 끝난 후에 탈출로는 내가 직접 안내해 줄 테니까. 별문제야 없겠지만, 혹시 난리통에 서로 못 만날 수도 있으니 이 일대 거점이 기록되어 있는 지도를 주지.”

제대로 된 군사지도 같은 건 물론 아니다. 이곳 요새 일대를 대충 그려 놨고, 요새 내의 눈에 띄는 커다란 구조물들 몇 개를 그려 놓아 전체적인 축적을 가늠할 수 있도록 만들어 놨다. 그리고 여기저기에 그려진 작은 동그라미들에는 투박한 글씨로나마 상세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우리 조직에서 마련해 놓은 비밀 거점들을 기록해 놨어. 만약 무슨 일이 벌어진다면 그쪽으로 가서 도움을 청하면 될 거야. 자세히 써 놓긴 했지만, 도저히 못 알아보겠다고 생각되면 여관으로 돌아와서 기다리고 있어. 나중에 데리러 올 테니까.”

괜한 걱정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지만 라이는 대꾸하지 않았다. 폭력조직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치고는 꽤나 치밀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이의 생각과 달리 루크가 건네준 지도의 진실은 다른 데 있었다.

지도의 거점들은 블랙울프 파가 구축해 놓은 진짜가 맞았다. 라이가 샐러맨더 파를 급습하러 들어갔다가 생포되었을 때는 상관없겠지만, 죽었을 때는 문제가 심각해진다. 라이가 블랙울프 파의 조직원이라는 걸 샐러맨더 파에서 알 방법이 없으니까. 그 전에 블러드 엑스를 죽이라고 보냈을 때는 생포될 확률이 다분했기에 이런 걸 준비할 필요가 없었지만, 이번은 얘기가 다르다. 그곳에서 싸우다 죽어 버릴 가능성이 너무 큰 것이다.

그걸 위해서 만들어 온 게 바로 이 지도였다. 자신들이 지금껏 고생해서 파악해 놓은 블랙울프 파의 모든 것이 이 지도 안에 담겨 있었다. 비밀거점, 접선방법 등등……. 샐러맨더 파에서 조금만 조사해 보면, 이 지도의 주인이 블랙울프 파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을 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양쪽은 피에 피를 부르는 정면충돌을 할 수밖에 없게 되리라.

라이는 지도를 자세히 살펴본 후 조심스럽게 접어 품속에 갈무리했다. 탈출로가 담겨 있는 것인 만큼, 실수로라도 잃어버리면 곤란한 것이다. 절대적으로 정보가 부족한 라이였기에 루크의 말을 믿고 따르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이건 녀석의 초상화야.”

폭력조직에서 만들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아주 세밀하게 잘 그려져 있는 초상화였다. 세세하게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아래쪽에는 상대의 용모에 대한 특징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 그림으로 그리기 힘든 부분을 보완해 주고 있었다.

초상화에 그려져 있는 사내의 용모는 라이가 상상한 술집 주인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갸름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주 이지적인 인상의 사내였다. 섬세한 선을 지닌 여성적인 얼굴인 것에 반해 밑에 써져 있는 기록에 따르면, 아주 날카로운 눈빛의 소유자인 모양이다. 하기야 블랙울프 파가 눈엣가시처럼 여길 정도의 실력자가 평범한 사내일 리는 없겠지.

“기억할 수만 있다면 머릿속에 담아 두는 게 좋아. 그 초상화는 없애 버리고 말이야. 그 초상화를 그린 사람이 영지에서 제일 실력 있는 화가거든. 화가를 족쳐 추적하면 우리 파가 뒤에 있다는 걸 금방 알아낼 수 있게 된다고.”

루크의 말에 라이의 의구심은 싹 사라졌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정말로 상대를 없애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알았어. 걱정하지 마. 머릿속에 담아 넣은 후 태워서 없애 버리도록 하지.”

초상화 또한 소중히 접어서 지도와 함께 잘 갈무리해 두는 라이. 물론 나중에라도 태워 없앨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만일의 경우, 어딘가에 쓸데가 있을지도 모른다. 당코 녀석이 태워 없애 버리라고 하는 걸 보면,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겠지.

“자, 이건 갈아입을 옷. 고급 술집에 가는데 그런 허름한 옷을 입고 가면 되겠나. 게다가 온통 피범벅이고 말이야.”

루크는 손에 들고 있던 보따리를 라이에게로 툭 던졌다. 라이가 풀어 보니 제법 깔끔해 보이는 옷이 그 속에 들어 있었다.

“이곳에서 숨도 쉬지 말고 조용히 있어. 지금 모두들 네놈을 찾겠다고 온 마을을 헤집고 있는 중이니까. 자정이 되면 여관을 몰래 나와 시장 쪽으로 쭉 걸어가. 그러면 잡화점이 하나 있을 거야.”

골목길을 파악하기 위해 요 며칠 돌아다니다 본 기억이 떠올랐다.

“혹시…, 형제 잡화점?”

“그래, 거기서 보자고.”

말은 꺼내지 않았지만, 라이가 루크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건 블러드 엑스를 해치울 때, 얼떨결에 펼쳤었던 그 검법 때문이었다. 그 당시에는 자연스럽게 잘 펼쳐졌던 검법이 그 후로 아무리 노력해도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그래서 라이는 다시 한 번 더 자신을 생사의 간극 사이로 밀어 넣고, 그 검법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원했다.

만약 익힐 수만 있다면 자신의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기에 목숨을 건 모험을 하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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