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인 나오라고 해!
그날 자정, 사위가 짙은 어둠에 잠겨 희미한 달빛만이 겨우 비치고 있을 때 라이는 형제잡화점 앞에서 루크와 다시 만났다. 그는 낮에 봤을 때와는 달리 매우 강력해 보이는 석궁을 한 자루 등에 메고 있었다. 마을에는 석궁 같은 사냥도구를 지니고 다니는 사람을 흔히 볼 수 있었기에 그런 행색이 전혀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루크는 라이의 앞을 스치듯 지나가며 나직이 속삭였다.
“내 뒤로 멀찍이 떨어져서 따라와.”
그러고는 마치 모르는 사이라도 되는 듯 라이를 지나쳐 계속 걸음을 옮기는 루크. 라이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다가 서로간의 거리가 꽤나 벌어진 후에야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대낮이었다면 이곳 시장통은 수많은 인파로 북적였기에 이런 식의 미행이 불가능했겠지만, 지금은 비틀거리는 취객들만 몇 명 보일 뿐 인적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좀 더 걸어가자 주변의 경관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동부시장의 입구 쪽으로 가자 늦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화려하게 불을 밝힌 술집과 거기에 모인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여기저기서 호객 행위를 하는 여인들과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술집들을 기웃거리는 취객들로 인해 지금이 오밤중이라는 걸 착각할 정도다. 라이는 걸음을 빨리 해 앞서가고 있는 루크와의 거리를 좀 더 좁혔다. 그렇지 않으면 그를 시야에서 놓칠 우려가 있었다.
이곳 사람들이 이렇듯 흥청거리는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목숨을 걸고 몬스터들을 사냥하는 사냥꾼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술과 여자를 탐하며 흥청망청 써댔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에 마치 내일이 없다는 듯 살아가는 것이다. 그런 사냥꾼들에게 술과 여자를 제공하고 돈을 버는 뒷골목의 조직들. 라이가 보기에도 술집들은 호황을 누리고 있었고, 그만큼 막대한 이윤이 발생하리라.
유흥가를 반쯤 지나 내성의 높은 첨탑(尖塔)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을 무렵, 루크는 라이에게 슬쩍 눈짓을 보내 어둑한 골목길 그늘 쪽으로 이끌었다.
그리고는 길 반대편에 자리 잡은 커다란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게 바로 여왕벌의 둥지야. 건물 전체를 놈들이 관리하고 있지.”
변경의 요새 도시에 있다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로 크고 화려한 건물이었다. 든든한 뒷배가 있는 샐러맨더 파의 최대 자금줄이라고는 했지만 설마 저렇게 큰 건물을 통째로 쓸 줄은 몰랐다. 저 큰 술집 어디에 칼릭스라는 놈이 처박혀 있는지 찾아낸단 말인가. 뒤지는 것만으로도 최소 2~30분은 걸릴 것이고, 그 정도 시간이면 흩어져 있던 샐러맨더 파의 조직원들이 새까맣게 모여들기에 충분하고도 넘칠 시간이다.
“헉, 저길 나 혼자 들어가라고! 지금 농담해?”
라이의 황당하다는 반응에 루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칼릭스가 있는 곳의 위치 정도는 알려줄 테니까. 칼릭스는 저 건물의 지하에 있어. 녀석은 자신이 직접 접대해야 할 정도의 거물이 오지 않는 한, 대부분의 시간을 안전한 지하에서 생활하거든. 그러니까 넌 우선 심부름으로 주인에게 돈을 전달하기 위해 찾아왔다고 하면 안으로 들여보내 줄 거야…….”
루크의 설명을 들으면서, 라이는 문 앞에 서있는 경비원 둘을 자세히 살펴봤다. 한눈에 봐도 그들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은 겉모습만 화려한 것일 뿐,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니었다. 하기야 경비를 한답시고 부동자세로 오랫동안 서 있으려면 실전용의 무겁고 두꺼운 갑옷을 착용해서는 힘들어서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경비원은 저놈들 외에 몇 명이나 더 있지?”
“실내에 다섯 명.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겉모양만 멀쑥한 양아치들이야. 어제 상대했던 블러드 엑스의 호위 근처에도 못 따라갈 놈들이지. 실력 있는 녀석들이라면 용병질을 하거나 몬스터 사냥을 하지, 저런 데서 푼돈 받고 잡일이나 하고 있겠어? 저놈들을 여기서 쓰는 건, 키가 크고 잘생겼기 때문이야.”
“그 정도는 나도 알아. 그건 그렇고, 지하로 들어가는 계단은 어디에 있지? 저 정문을 기준으로 설명해 봐.”
“들어가서 왼쪽에 있어. 일반인들이 내려갈 수 없도록 문으로 막아 놨는데 그 문 앞에는 경비원이 항시 지키고 있지.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을 거야.”
“비밀통로 같은 건? 내가 치고 들어갔을 때, 놈이 뒷구멍으로 살그머니 내빼 버리면 어떻게 해?”
순간 루크는 터져 나오려는 미소를 참기 힘들었다. 저 앞에 서 있는 경비 녀석들의 실력이야 허접한 건 맞다. 하지만 지하에 있는 샐러맨더 파의 정예들까지 그렇게 생각했다가는 큰코다친다. 특히 칼릭스가 다란툼 성에서 데리고 들어온 아홉 명의 직속 부하들 개개인의 실력은 거의 두목하고 맞먹을 정도였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건물 안에 들어감과 동시에 제압당하거나 살해당할 게 뻔하다고 봐야 했다. 그런 주제에 지부장이 도망칠 것을 걱정하는 꼴이라니. 기가 막혀 쓴웃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런 루크의 얼굴을 라이가 차가운 눈초리로 쳐다보고 있었다. 목숨이 달린 일이니 루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니 마치 비웃는 듯한 표정을 금방 알아챈 것이다.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자각한 루크가 얼른 표정을 바꾸며 대답을 해 주었다.
“비밀통로가 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걱정하지 마.”
루크는 등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의 3층을 슬쩍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우리 조직이 그 정도도 생각하지 못하는 어설픈 조직인 것 같나? 여기서는 보이지도 않겠지만, 저 건물을 빙 둘러서 블랙울프 최고의 사수(射手)들을 배치해 뒀지. 너를 피해서 녀석이 밖으로 기어 나오는 순간, 녀석은…….”
루크는 자신의 목을 손가락으로 쓱 긋는 시늉을 하며 키득거렸다.
“큭큭, 단번에 이렇게 되는 거지. 지하를 싹 쓸어버렸는데도 칼릭스를 찾아내지 못했다면 바로 밖으로 나와. 아마 그때쯤이라면 탈출하다가 우리가 쏜 화살에 맞고 뒈진 후일 테니까.”
물론 모두가 허풍이다. 라이가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벌집을 쑤셔 놓은 것처럼 난리가 날 텐데 괜히 근처에서 얼쩡거리다 걸리면 한 마디로 뭐 된다.
그럼에도 라이가 자신을 바라보는 싸늘한 눈빛에 변함이 없자, 루크는 짐짓 어깨를 으쓱거리며 자신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뿐만이 아니야. 저기 창문이 닫혀 있는 3층 방이 보이지? 그곳에서 나 역시 이걸 들고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그러면서 손에 들고 있던 석궁을 툭툭 쳐 보였다.
“내 임무는 네 녀석의 퇴로 확보야. 그러니 잡스러운 생각은 집어치우고 칼릭스를 해치우는 것에만 신경을 집중해.”
“좋아, 믿지. 참, 저기 책임자 이름이 뭔지는 알고 있겠지?”
“책임자?”
“그래. 설마 칼릭스가 모든 술 손님을 직접 상대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아, 그건 지배인이 하고 있지. 지배인의 이름은 제임스, 제임스 란드레프야. 그런데 그건 알아서 뭐하려고?”
“다 쓸데가 있어.”
“뭐,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있다가 내가 저 방에 올라가서 신호를 보내면 행동을 개시하도록 해. 알겠어?”
고개를 돌려 건물을 바라보던 라이의 입에서 스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 날 가지고 장난을 치는 거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명심해. 혹 내가 죽는다 해도 지옥 끝에서 살아나와 그 댓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주지.”
“다, 당연하지. 어쨌든 잘해 보라구. 그럼 행운을 빈다.”
루크는 더 이상 라이와 말을 섞는 것이 부담스러운지 후다닥 여관 3층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 모습을 뒤에서 쳐다보고 있던 라이는 불길한 예감이 드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건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번 믿어 본다. 하지만 혹시라도 내 뒤통수를 친 거라면 절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살인의 경험이 가져다 준 정신적 충격도 컸지만, 블러드 엑스를 죽일 때 발휘되었던 막강한 힘은 라이에게 엄청난 자신감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꾹 참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는 그만한 힘이 있으니까!
살인을 경험한 뒤 불과 몇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지만 라이의 내면은 빠른 속도로 변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