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3화 (849/930)

✻ ✻ ✻

방에서 쫓겨난 루크는 찜찜함을 금할 수가 없었다. 부두목이 잭과 얘기를 나누는 데 있어서 굳이 자신을 내쫓아야만 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뭔가가 있어…….’

두목은 소탈하고 대범해 보이는 겉모습과 달리 아주 의심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부하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이었다. 조직 내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 것 같은 낌새만 보여도 그 싹부터 철저하게 짓밟아 버렸다. 지금껏 두목과 부두목 간의 관계가 돈독할 수 있었던 것도 다 부두목이 자신만의 세력을 구축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껏 부두목은 야심도 없는, 두목만을 향한 충성심으로 가득한 인물이라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방금 전의 그건 뭐지?’

부두목의 세력은 거의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잭처럼 막강한 실력자가 부두목을 밀어준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놈은 혼자서 여왕벌의 둥지를 쓸어버렸을 정도로, 도저히 인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무력(武力)을 지닌 녀석이니까.

그런 녀석과 부두목이 밀담을 나눈다? 부두목이 왜 이곳에 왔는지는 루크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왜 부두목은 자신을 밖으로 나가라고 했을까? 왠지 수상쩍은 냄새가 물씬 풍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루크는 허겁지겁 본거지로 달려갔다.

“두목! 두목님! 큰일 났습니다!”

요란을 떠는 루크의 모습에 두목이 잔뜩 긴장했다.

“뭔데 그러냐? 설마…, 샐러맨더 파에서……?”

“아니, 그게 아니라, 부두목이 잭을 포섭해서 모반을 획책하는 것 같습니다.”

루크는 두목이 발끈해서 곧바로 부두목과 잭을 처치할 계획을 세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달리 두목은 콧방귀를 뀌며 손을 내저었을 뿐이었다.

“별소리를 다 듣겠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네 녀석 할 일이나 해.”

“하지만 두목,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니까요.”

“그래, 뭐가 이상했는데?”

“밀담을 나눌 게 있다면서 저보고 먼저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 녀석을 회유하러 간 건 저도 다 알고 있는데, 뭘 숨길 게 있다구요.”

두목은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잭과 좀 더 편안한 분위기에서 얘기를 나누려면 단둘이서 얘기하는 게 더 나았다고 판단한 모양이지. 네 녀석은 쓸데없는 데 머리 쓰지 말고 샐러맨더 쪽 동태나 좀 살펴봐. 그것들이 그냥 당하고 있을 리는 없으니까.”

“저…, 그래도…….”

“네가 신경 써 주는 건 갸륵하다만, 할 소리가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소리가 있는 거야. 알겠냐?”

“알겠습니다, 두목.”

두목의 부두목에 대한 신뢰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게 아니다. 그런 신뢰를 결정적인 증거도 없이 사소한 의심 하나만을 가지고 뒤흔든다는 건 역시 무리가 있었다. 루크는 자신의 말을 전혀 귀담아 주지 않는 두목에게 더 이상 말을 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느끼자 조용히 물러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병신, 나중에 내 말을 듣지 않은 걸 후회할 날이 올 거다.’

하지만 눈치 빠른 루크조차도 그날이 그렇게까지 빨리 올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 ✻

부두목은 잭을 데리고 곧바로 두목의 은신처로 갔다. 예전에 루산나의 안내를 받아 찾아갔던 바로 그곳이었다.

똑똑…, 똑…, 똑똑…….

곧이어 철문 위쪽에 네모난 작은 구멍이 열리며 두 개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빨리 문 열어!”

그러자 작은 쪽문이 열리는 대신, 커다란 대문이 크그그 하는 소리와 함께 활짝 열린다.

“다녀오셨습니까, 부두목님.”

부두목은 가볍게 답례하며 사내들을 향해 물었다.

“두목께서는 안에 계시냐?”

“예.”

건물 안으로 들어선 부두목은 라이를 곧장 두목의 방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야.”

똑똑!

문을 두드리자 방 안에서 두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부두목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두목이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게나. 그래 갔던 일은 잘…….”

그런데 부두목을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오는 잭을 보자 두목의 안색이 흠칫 굳는다. 방금 전에 루크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부두목이 배신하려 한다는…….

하지만 그는 지금도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어? 잭도 함께 왔군. 그래, 어서 오게.”

두목은 라이에게 자리를 권하며 말했다.

“내가 실수했네. 내 용서를 받아 주게.”

“두목, 우리가 이리로 온 건 두목을 없애기 위해섭니다.”

일순 두목의 눈이 경악으로 휘둥그레졌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두목과 잭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두목의 얼굴에 서서히 절망감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었기에 호위도 세워 놓지 않은 상황. 하기야 저 잭이라는 녀석의 실력을 생각한다면 완전무장한 호위 몇 명이 경호하고 있다고 해도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반항해 봐야 씨알도 안 먹힐 것을 잘 알기에 두목은 일단 인정에 호소하기로 했다. 저 능구렁이 같은 부두목 놈에게는 통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의 뒤에서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잭이라는 녀석의 마음을 어떻게든 흔들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네가 이런 식으로 나를 배신할 줄은 정말 몰랐다.”

“나도 두목과 이런 식으로 헤어지게 될 줄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소. 내 예상보다 10년쯤은 빠른 것 같소.”

“그렇게 두목 자리가 탐나던가?”

부두목은 씁쓸한 어조로 대답했다.

“두목 자리가 탐난 건 아니었소. 다만 마음 편히 살고 싶었을 뿐이오.”

“마음 편히 살고 싶었다고?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야! 내가 너에게 얼마나 잘해 줬는데…….”

“큭큭. 두목처럼 자기밖에 모르고, 의심 많은 사람과 함께한다는 게 어디 쉬운 일인 줄 아십니까? 뭘 하려면 우선 이걸 두목이 어떻게 받아들일까, 혹시 나를 의심하지는 않을까 걱정부터 해야 했습니다.”

“흥! 그렇게 쥐새끼처럼 숨죽이고 살다가 잭이 조직에 들어오니 생각이 바뀌었다?”

“잭은 내 계획을 앞당겨 주었…….”

지루한 말싸움이 계속되고 있었기에 라이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게 두목의 말에 반박하는 부두목 쪽으로 이동하는 일이 잦아지고 있었다. 이번에도 그가 반론을 제기하는 부두목 쪽으로 시선을 옮긴 그때였다. 예의 그 싸늘한 느낌이 두목 쪽에서 쏘아져 들어왔다.

라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 기운은 살기(殺氣)! 두목이 부두목과 말싸움을 하는 척하면서 책상 밑으로 은밀히 준비했다가 던진 회심의 일격이었다. 워낙에 서로 간의 거리도 가까웠던 데다, 감정이 서서히 고조되고 있던 부두목이 막 대답하는 그 순간을 노려 던진 것이었기에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두목이 노린 것은 부두목이었다. 부두목과 대화해 본 결과, 두목은 부두목만 죽이면 이 모든 사태가 진정될 것을 확신했다. 잭은 그저 부두목의 꼬임에 빠져 따라온 것일 뿐, 자신을 죽일 생각까지는 없는 듯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두목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사태가 벌어졌다.

챙!

부두목의 뒤쪽에 서 있던 잭이 한걸음 성큼 앞으로 내디디며 발검과 동시에 휘둘러 부두목을 향해 날아가던 비도를 쳐서 날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 다음 순간, 부두목이 발검하여 공격 직후 거의 무방비 상태나 다름없는 두목의 이마를 장검으로 꿰뚫어 버렸다. 두목의 머리를 관통하여 뒤통수를 뚫고 삐죽이 솟아나와 있는 피 묻은 칼끝. 멍한 얼굴로 앉아 있던 두목의 상체가 서서히 무너진다.

정말이지 순식간에 시작되고, 또 끝나 버린 공방전이었다.

두목을 해치우고 나서 부두목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 쉽게 성공하다 보니, 두목의 시체를 보며 승리의 기쁨보다는 허망함을 먼저 느낀 것이다. 부하가 행여 배신이라도 할까 눈에 불을 켰던 두목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손쉽게 목이 날아가는 걸 보면, 두목이라는 자리가 얼마나 위태로운 것인가. 그런 자리를 위해 이렇게 커다란 위험을 감수하고 있다니…….

이때 들려온 잭의 목소리가 그로 하여금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해 줬다.

“이런 망할 새끼! 끝까지 치졸한 수를 부리고 있어!”

‘두목은 과연 치졸했던 것일까? 하기야…, 부하들의 배신이 두려워서 몸을 사린다면, 나 또한 두목과 똑같은 최후를 맞게 되겠지. 나는 절대 당신 같은 삶을 살지는 않을 거요. 나에게는 꿈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때 잭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댁의 말대로 두목을 죽이긴 했는데, 그다음은 어떻게 해야 되는 거요?”

설마 조직원들을 모두 다 죽이면서 여기를 탈출해야 하는 그런 개 같은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니겠지? 하고 묻는 것이리라.

부두목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다 생각해 둔 게 있으니까…….”

“어찌 되었건 나도 현재는 당신과 연관이 있다 보니 알고 싶군요.”

“이쪽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자네는 샐러맨더 파의 수뇌부를 처치해 줘. 할 수 없다고는 하지 마. 여왕벌의 둥지에서 살아서 나온 것만 봐도 이 일을 수행하기에 실력은 충분하고 넘치는 게 확실하니까.”

“여왕벌의 둥지보다 훨씬 더 많다면 아무리 나라도…….”

“아,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 이곳의 지부가 괴멸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지원세력을 출발시켰을 테니까. 이곳 사정을 정확히 모르는 한 샐러맨더 파의 두목이 직접 오지는 않을 거야. 너무 위험하거든. 잘돼 봐야 부두목 정도가 부하들을 이끌고 달려오겠지.”

“흐음…….”

얼마 전에 루크에게 속았던 소리와 뭔가 비슷하다고 느끼며 라이가 찝찝함을 감추고 있자, 부두목이 급히 말을 이었다.

“자네로서는 이 일을 수행할 수밖에 없어. 두목의 지시대로 행한 것밖에 없긴 했지만, 자네가 샐러맨더 파와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어 버린 것은 사실이니까. 만약 여기서 자네가 손을 털고 싶다고 해도 샐러맨더 파에서 자네를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을걸.”

“한번 발을 담았으면 빠져나갈 수 없다는 말인가……?”

“뭐…, 그런 셈이지.”

“어쩔 수 없지.”

검술을 익힌 이래 라이는 심적으로 많이 강해졌다. 예전이었다면 참고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른 것이다. 절대적인 자신이 있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라이가 방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부두목이 급히 불러 세웠다.

“이봐, 이봐. 지금 어디로 가려는 겐가?”

“결자해지(結者解之)를 하라면서?”

『<묵향> 35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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