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5화 (851/930)

스팅이 루크를 데려오면 기습해 죽이려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기다리고 있을 때, 밖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부두목은 번개처럼 단검을 뽑아 쥐었다. 그런데 다음 순간 들려온 건 루크가 아닌 스팅의 목소리였다.

“부두목, 접니다.”

“뭐야?”

루크 녀석을 데리고 왔다면 이렇게 말할 리 없다. 부두목의 말투는 자신도 모르게 짜증이 잔뜩 담겨 있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던 스팅은 비릿한 피 냄새와 함께 두목이 탁자 위에 엎어져 있는 걸 보고는 찔끔했다. 그는 그제서야 부두목이 두목을 해치운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의 부두목에 대한 충성심은 변하지 않았다. 곧장 시선을 부두목에게로 옮기며 묻는다.

“녀석이 본부 밖으로 나갔다고 하는데, 찾아서 데려올까요?”

스팅의 보고에 부두목은 성질이 뻗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놈들을 부하랍시고 믿고 일을 해야만 하다니!

“그걸 말이라고 해! 빨리 가서 데리고 와!”

“옛, 두목.”

스팅은 자신도 모르게 부두목에게 두목이라고 한 후 밖으로 후다닥 달려나갔다. 인상을 찌푸리던 부두목은 의자에 거칠게 앉으며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권력 교체는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반발 없이 끝내는 게 최고다.

폭력조직이라는 것 자체가 워낙에 권력 교체가 잦은데다, 이미 두목은 죽어 버린 상황. 그리고 두목의 뒤를 이을 후계자도 없으니 조직적인 반발은 일어날 수 없다는 게 부두목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걸림돌 둘이 있었다. 첫째가 루크고, 둘째가 두목의 애인이었던 루산나였다. 둘 다 없애 버리기에는 아까운 인물들이었지만 어쩔 수 없다. 두목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순순히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고 복수를 하겠다며 샐러맨더 파 같은 거대조직에 투항해 밀고라도 하는 날에는 끝장이었으니까.

“후환은 남기지 않는 게 좋겠지…….”

씨익 미소 짓는 부두목의 얼굴에는 짙은 살기가 어려 있었다.

✻ ✻ ✻

“통성명이나 하지. 나는 달톤이라고 한다.”

주먹코 사내가 달톤, 가장 키 큰 사내가 랜, 짙은 수염이 얼굴 전체를 덮고 있는 털보가 해리슨, 뺨에 커다란 흉터가 있는 사내는 피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모두들 중간보스급 조장답게 커다란 덩치를 지니고 있는데다, 살인을 밥 먹듯 해온 자들 특유의 살기까지 은근히 풍기고 있다. 노련한 용병들에게서나 느껴지던 그런 기운. 그 때문에 라이는 자신이 그들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자꾸만 주눅이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잭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감히 자신들을 마주 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슬그머니 피하면서 인사를 하는 라이를 보며, 그들의 표정에 비웃음이 어린다.

“다란툼에는 무슨 일로 가는 거냐?”

그들은 뒷골목에서 잔뼈가 굵었기에 그런 곳에서 자란 애들은 한눈에 척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이 잭이라는 녀석은 아무리 봐도 뒷골목 출신 같지는 않아 보였고, 그렇다고 조직에 새로 입단한 애송이라고 단정 짓기도 이상했다. 아무런 재주도 없는 녀석을 부두목이 직접 자신들에게 명해 다란툼까지 데리고 가라고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제가 말하긴 그렇고…, 나중에 부두목께 직접 물어보시죠.”

라이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모두의 인상이 확 일그러진다.

“허어, 이것 봐라? 생긴 것 답지 않게 제법 맹랑한 놈일세…….”

어린놈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느꼈는지 달톤의 안색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상대를 향해 이죽거리며 시비를 거는 것도, 그러다 제 성질을 못 이겨 미친놈처럼 날뛰는 것도 이들 중 제일 빠른 게 달톤이었다.

당장 라이의 멱살을 움켜쥐려는 달톤을 피터가 재빨리 말렸다. 그 모습을 보며 라이는 의외라고 생각했다. 인상으로 봤을 때, 넷 중에 피터가 제일 험악하고 성질 급하게 생겼기 때문이다.

“야! 애새끼 하나 잡는 건 뭐라 하지 않는데, 하고 싶으면 요새를 벗어나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 해. 이러다 자칫 이 사실이 부두목한테 알려지면 씨발, 그 잔소리를 우리까지 들어야 하잖아.”

피터의 말에 달톤은 더욱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순순히 뒤로 물러선다.

“에잇 진짜, 성질 같아서는 그냥 모가지를 뽑아 버리고 싶구만. 이봐, 애송이. 내게 한 번만 더 버르장머리 없이 대꾸했다간 임무고 나발이고 묵사발을 낼 테니까 조심해! 알겠냐? 새꺄.”

“…….”

라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있었다. 물론 달톤의 위협에 겁을 먹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여왕벌의 둥지라는 아수라장을 헤쳐 나온 이후, 라이는 자신의 실력에 대해 어느 정도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그가 아무 말 않고 조용히 넘어가는 것은 달톤과 싸우는 게 두려워서가 아니라 이들에게 다란툼으로 가는 길을 안내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가급적이면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사고를 치고 싶지 않았다. 현재 라이로서는 힘 조절을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했으니까.

설마 눈치를 채고 튀었나?

요새 내에는 이미 경계령이 떨어졌는지 성문 경계가 한층 강화되어 있었다. 평상시의 3배에 달하는 병력이 배치되어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있다. 그리고 성벽 위에도 병사들이 배치되어 주변을 향해 날카로운 눈길을 던지고 있는 게 보였다.

평상시에는 요새도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에 대한 검문검색은 철저하게 해도,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반출하는 짐을 풀어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물론이고, 각자의 신분증을 꼼꼼히 살펴보고 조금만 수상쩍어도 잡아들이고 있었다.

그 탓에 밖으로 나가려는 사람이 밀리고 밀려 긴 줄을 형성하고 있는 중이다. 밖으로 나가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인데도 이 정도이니, 아침에는 이 줄이 얼마나 길었을 것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그나마 앞쪽에 서 있는 사람의 숫자가 20여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데 위안을 삼으며 라이 일행은 그들 뒤에 자리를 잡았다.

이때, 검문검색을 하던 경비병들 중 하나가 라이 일행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대부분 경비병들의 나이가 20대 초반 정도인 것을 감안한다면 꽤 나이가 들어 보이는 경비병이었다.

“오늘도 사냥 나가려고?”

자신들을 향해 말을 거는 경비병에게 달톤을 비롯한 4명은 얼른 고개를 숙이며 최대한 공손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워낙 험상궂게 생긴 얼굴이라 그게 더 어색해 보이긴 했지만, 누가 보더라도 경비병과 달톤 일행이 꽤나 친밀한 관계라는 건 금방 알 정도였다.

사실, 내막을 알고 있다면 조금만 생각해보면 뻔한 관계였다. 좋은 먹이가 포착되었을 때만 밖으로 나간다면 누구나 수상쩍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런 만큼 달톤 일행은 평소에도 몬스터 사냥을 한다는 명목으로 부지런히 들락거렸고, 나갈 때마다 성문 경비병들에게 적당한 뇌물을 주다 보니 이런 친밀한 관계가 형성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에휴~, 먹고 살려니 별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십부장님께서 밖에 나와 계십니까. 어디 높으신 분 저택에 도둑이라도 들었습니까?”

달톤의 너스레에 십부장은 인상을 잔뜩 찡그리며 투덜거렸다.

“젠장, 살인 사건이야. 어떤 미친놈이 여왕벌의 둥지를 아예 박살을 내놨다고 하더구만. 그 때문에 저 위쪽에서 엄청 쪼아대는 모양이야. 빨리 흉수를 잡아들이라고.”

“여왕벌의 둥지라면…, 샐러맨더 파라는 거대 조직이 뒤를 봐주고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보나마나 폭력배들 간의 세력 싸움이겠지. 그거 말고 뭐가 있겠어?”

“에휴, 그놈들 싸움에 엄한 우리들까지 피해를 입고 있는 거네요. 십부장님께서도 고생을 하시고.”

“내 말이. 덕분에 아침부터 범인을 색출한답시고 이 개고생 아닌가.”

그러자 달톤이 조심스럽게 십부장 얼굴 근처로 다가서며 소근거렸다.

“근데 범인은 누구랍니까? 이곳 델카에서 샐러맨더 파를 건드릴 간 큰 조직은 거의 없을 텐데…….”

“내 짐작이지만 샐러맨더 파와 사사건건 시비가 붙던 블랙울프 파의 소행이 아닌가 싶어.”

“그럼 그놈들을 조사해야지, 왜 성문을 막아놓고 이 난리랍니까?”

“쯧, 블랙울프를 옹호하는 간부들이 어디 한두 명인 줄 아나? 그러니 본거지를 조사해 보기는커녕 여기서 이러고 있지.”

그러자 달톤은 십부장에게 작은 주머니 하나를 슬쩍 건네며 말했다.

“에고, 우리 십부장님이 너무 고생이 많으셔서 어쩌나. 이걸로 고생하시는 부하분들과 저녁에 한잔하시죠.”

“뭘, 이런 걸 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십부장은 주머니를 곧바로 품속에 집어넣는다.

“괜찮은 놈이 잡히면, 돌아올 때 맛좋은 부위로 몇 덩이 잘라 드릴게요.”

“허허, 이거 말만이라도 고맙구먼.”

십부장은 그제서야 줄 제일 뒤쪽에 서 있는 라이를 발견했다. 낡은 가죽갑옷에 롱 소드를 허리에 차고 있긴 했지만, 혼자 나돌아다니기에는 너무 어려 보였다. 도대체 왜 여기에 서 있는 건지 이해를 하기 힘들었던 십부장은 달톤에게 슬쩍 묻는다.

“혹시, 이 친구도 자네 일행인가?”

“예. 이번에 새로 들어온 애송이입니다.”

“흠, 처음 보는 얼굴인 거 같은데?”

“얼마 전에 사냥을 하다 반병신이 된 저놈 애비가 굶어 죽게 생겼다면서 제발 사냥에 데리고 가 달라고 사정사정해서 말이죠. 어쩔 수 없이 받아주긴 했습니다만 에휴, 이러다 저놈까지 병신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입니다요.”

달톤의 넋두리에 십부장은 라이를 찬찬히 훑어봤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달톤의 심란해하는 마음이 이해가 된 것이다.

십부장이 볼 때, 몬스터 사냥을 하기에 라이는 덩치가 너무 왜소했다. 그나마 장비라도 괜찮았으면 좋았을 테지만, 저런 허름한 걸로는 턱도 없다. 더군다나 롱 소드라니. 얇고 가벼운 만큼 휘두르기는 좋지만, 몬스터가 휘두르는 몽둥이 한 방에 두 토막이 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 때문에 몬스터 사냥꾼들은 좀 더 묵직하고 튼튼한 무기를 선호했다. 중검 종류나 도끼, 창 같은 거 말이다.

하고 있는 행색만 봐도 어리숙한 초보티가 팍팍 나고 있다. 십부장은 딱하다는 듯 라이를 바라보다 다시금 시선을 달톤에게로 옮기며 말했다.

“매정하다는 말을 들어도 딱 잘라서 거절을 하지 그랬어. 몬스터 사냥이 어디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러다 자칫 사람 하나 잡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달톤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제 생각도 그런데 저놈 애비가 아들 새끼 죽어도 좋다며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데야 두 손 두 발 다 들었죠. 그래서 일단 짐꾼으로 한번 데리고 나가 보려고요.”

“젠장, 이 동네에서 그나마 돈벌이가 되는 건 사냥밖에 없으니 그 애비를 뭐라 하기도 그렇고. 그래 이번에는 얼마나 있을 예정인가?”

“일단은 일주일을 생각하고 나갑니다만, 쓸 만한 사냥감을 찾지 못하면 며칠 더 걸릴지도 모르겠네요.”

“따라오게.”

십부장은 달톤 일행을 데리고 곧장 요새도시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편의를 봐줬다. 십부장이 이들을 직접 인도해 갔기에 그 누구도 뭐라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

“십부장님 덕분에 성문을 빨리 통과할 수 있게 됐네요. 감사합니다.”

“뭘. 자네들하고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닌데……. 그럼 행운을 비네.”

“감사합니다, 십부장님.”

달톤 일행이 요새도시 밖으로 나오자 마차 두 대와 십여 명의 사람들이 성문 옆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자위능력이 떨어지는 일반인들의 경우, 일정 숫자가 모일 때까지 저렇게 문 앞에서 기다렸다가 일정 수 이상이 모이면 함께 출발하는 게 상식이었다.

중무장을 하고 있는 사내들이 다섯이나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자 모두의 시선이 쏠렸지만 곧이어 그들의 얼굴에 옅은 실망감이 어렸다. 달톤 일행이 착용하고 있는 갑옷의 형태와 무기를 통해 이들이 다란툼으로 가는 용병이 아니라, 산맥으로 올라가는 사냥꾼이라고 지레 짐작을 한 것이다.

몬스터 사냥꾼들이 애용하는 갑주는 둔기(鈍器) 공격에 대한 방어에 특화되어 있기에 약간의 지식만 있다면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갑주뿐만이 아니라 무기도 용병과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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