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1화 (857/930)

소녀가 눈을 떴을 때는 마차는 흔들거리며 천천히 앞으로 가고 있었다.

따각, 따각…….

어렸을 때부터 오랜 시간 마차를 집삼아 살아온 그녀에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말발굽 소리는 자장가와도 같은 푸근함을 안겨줬다. 잠결에 그녀는 아빠의 등을 찾았다. 하지만 마부석에 앉아있는 건 아빠가 아니었다. 커다랗고 낯선 등판. 폭력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금속성의 갑옷. 그와 동시에 그녀의 뇌리에는 아빠가 살해당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꺄아아악!”

그 순간, 마차의 뒷면 휘장이 젖혀지며 낯선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어났냐?”

손에 잡히는 대로 뭔가를 붙잡아 상대에게 집어 던지려던 소녀의 손이 일순 멈칫거렸다. 기절하기 직전의 광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억이 옳다면, 저 사내는 절대로 건드려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아빠를 살해했던 덩치 큰 사내를 마치 잘 다져놓은 고깃덩이로 만들어 놓은 악마…….

“히익!! 딸꾹! 딸꾹! 딸꾹!”

새파랗게 질린 채 연신 딸꾹질을 해대고 있는 빨강머리 소녀를 향해 라이는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토록 겁에 질린 애를 어떻게 달래줘야 할까? 안 그래도 말주변이 없는데, 더군다나 여자애를 달래줘야 한다고 생각하니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라이는 빨강머리 소녀가 알아듣든지 말든지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다.

“네 아빠의 원수는 내가 갚았다. 그리고 너를 해칠 생각은 조금도 없으니 마음 푹 놓아도 괜찮아. 잠시…, 아주 잠시만 너를 구속할 거야. 네가 딴 데 가서 쓸데없는 소리라도 늘어놓으면 내가 해야 하는 일에 방해를 받게 되기에……. 어쩔 수가 없구나. 이해해다오.”

“…….”

상대의 대답을 원했던 것은 아니었기에 라이는 그 말을 끝으로 마차 밖으로 나갔다. 더 이상 할 얘기도 없었고. 하지만 라이는 빨강머리 소녀가 아빠를 잃은 슬픔에 연신 훌쩍거리면서도 마차 휘장 사이로 자신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그는 소녀 따위보다는 무장을 갖추고 있는 조장들의 행동에 더욱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그 후 2시간 정도를 이동하면서 일행 중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한동안 슬피 울던 소녀는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되자 휘장 틈 사이로 마차 뒤를 따라 걷고 있는 청년을 몰래 훔쳐봤다. 아직 스무 살도 되지 않은 듯한 앳된 외모였다. 그리고 그가 걸치고 있는 옷가지 또한 낡아빠진 싸구려들이다.

하지만 그의 겉모습만이 모든 게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듯, 청년의 뒤쪽에서 멀찍이 떨어져 따라오고 있는 중년사내 둘은 연신 청년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오랜 세월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상행위로 단련된 그녀의 감각은 저 중년사내들이 청년을 향해 무한한 공포를 느끼고 있음을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녀 자신처럼…….

소녀는 저 청년이 누구인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죽인 남자를 포함, 다른 남자들과 한패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보니 저들은 절대로 한패가 아니었다. 한패라면 저렇듯 경외와 공포를 담아 청년의 눈치를 살피고 있지 않을 테니까.

산적놈들을 깡그리 잡아주시길

이때, 마부석에 앉아 말을 몰던 사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전방에 기마 다섯 기 출현!”

시야가 좋은 마부석의 높은 위치에 앉아있었기에 그가 다만 몇 초라도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기마대를 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뒤쪽에서 따라오던 중년사내 둘이 황급히 달려와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순찰대냐?”

그러자 랜이라고 불린 사내가 동료들을 향해 빠른 어조로 대답했다.

“아니, 깃발을 들고 있지 않은 걸 보면 순찰대는 아닌 것 같아.”

“설마…, 우리와 같은 동종업계 놈들인가?”

그러자 랜은 말도 안 된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이죽거렸다.

“어지간히 멍청한 놈들이 아니고서야 이런 대로에서 영업할 놈들이 어디에 있겠냐. 산맥 쪽에서 밀수업자들 터는 게 가장 쉽고, 벌이도 좋은데 말이지.”

“맞아. 이 도로는 병사들이 순찰도 자주 돌잖아.”

“그건 그렇지.”

소녀는 마차 앞쪽으로 살금살금 걸어가 랜이라 불린 사내의 뒤에 바짝 다가앉아 마부석 사이로 바깥의 동정을 살폈다. 두려움이 짙게 배 있는 눈동자. 청년의 뜻하지 않은 도움 덕분에 겨우 위기를 모면하는가 싶었는데, 또다시 미지의 공포가 다가오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녀의 두 눈에 절망감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청년이 보여줬던 그 놀라운 실력을 자신도 모르게 믿고 의지하고 있었기에.

조금 시간이 지나 서로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상대방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모두들 후드가 달린 두터운 로브로 몸을 감싸고 있는 탓에 겉으로 드러난 부분은 극히 드물었지만, 로브 밑으로 뻗어 나와 있는 가죽부츠라든지 철판갑옷이 상당히 고급품이라는 건 한눈에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안장에 매어져 있는 고풍스런 문양이 아로새겨져 있는 멋진 방패도 흔히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그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랜이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모험가들이 이런 시골구석에는 웬일이래?”

“모르지. 어쩌면 산맥을 넘어 국경을 몰래 통과하려고 하는 건지도…….”

두 사람이 수군거리고 있는 와중에도 서로의 거리는 급격히 좁혀졌다. 그런데 그냥 지나쳐서 가 버릴 줄 알았던 그들이 30여 미터쯤 거리가 되자 갑자기 속도를 줄이는 게 아닌가. 세 명은 그 자리에 멈춰 서서 지켜보고, 두 명만 가깝게 다가온다. 철판갑옷으로 중무장한 사내와 가죽갑옷을 입은 사내였다. 그리고 남아있는 세 명 중 하나가 등에서 활을 벗겨 들고는 화살을 장전하는 것도 보였다.

뒤에 화력지원 일행을 남겨둔 채 오는 걸 보면 결코 좋은 뜻이 있어서 다가오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곧바로 상대방의 의중을 눈치챈 중간보스들은 바짝 긴장했다.

“젠장! 이리로 다가오는데…, 어떻게 하지?”

말주변 좋은 달톤이라도 살아 있었다면 어떻게든지 둘러대 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쉽게도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사태가 아주 절망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저 멀리 뒤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모험가 세 명의 모습이 전투태세가 아닌, 그저 심드렁한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살도 장전만 하고 있을 뿐, 이쪽을 겨누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싸울 의사가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이쪽 따위는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조장들은 그 덕분에 최악의 상황까지는 가정하지 않고 있었다. 만약 저들이 방심하고 있다면, 잭 혼자서도 저들을 어떻게든 해치울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워워…….”

마차와 3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말을 멈추는 철판갑옷의 모험가. 후드가 드리운 짙은 그늘로 인해 얼굴 표정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적의를 지닌 것인지, 그렇지 않은 것인지……. 하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이쪽을 아주 얕잡아 보고 있다는 것. 그는 말에서 내리지도 않은 채 중간보스들을 내려다보며 말을 걸었다.

“다란툼으로 가는 행상인가?”

“그렇소.”

“당신들 넷뿐인가? 이런 시골길을 가기에는 숫자가 너무 적군.”

“흐흐, 떠돌이 오크 몇 마리쯤은 우리끼리도 간단히 없애버릴 수 있소. 그 정도도 못해서야 어떻게 변방을 떠돌며 행상을 할 수 있겠소.”

철판갑옷 사내가 말을 걸고 있는 사이, 가죽갑옷 사내는 말을 몰아 마차 주변을 한 바퀴 빙 돌며 살펴본다. 이제 확실했다. 저들은 뭔가 이유가 있어서 접근해 온 모양이다.

이때, 마차 뒷면에 이른 가죽갑옷 사내가 갑자기 싸늘한 어조로 외쳤다.

“어! 이건 핏자국이잖아. 뒤쪽 휘장에 왜 이런 게 묻어 있는 거지?”

“핏자국이라고?”

철판갑옷 사내도 천천히 말을 몰아 마차 뒤쪽으로 갔다. 마차 뒷면 휘장에 나 있는 검붉은 핏자국. 그리고 그 핏자국은 휘장 아래로 흘러내려 마차 뒷면까지 흠뻑 적시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보면서도 그들이 연신 고개를 갸웃거린 이유는 어떻게 해서 저런 핏자국이 생긴 것인지 도무지 짐작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넓게 퍼져 있는 핏자국의 크기만 봐도 이건 한두 명 죽여서 피범벅을 해서는 절대 만들어질 수가 없는 면적이다. 한 명을 아주 곤죽을 만들어 피를 흩뿌렸다면 모를까.

“이 핏자국은 뭐요?”

철판갑옷 사내의 말투가 갑자기 싸늘해진 것으로 보아 대답 여하에 따라 칼부림이라도 불사하겠다는 듯 느껴진다. 서로의 눈치만 살피는 조장들. 아무도 나서려고 하지 않자 털보 해리슨이 마지못해 앞으로 나섰다.

“동료가 죽으면서 남긴 핏자국이오. 오크 다섯 마리가 한꺼번에 습격을 해왔었거든.”

오크에게 죽음을 당하는 건 산골을 다니는 작은 상인이라면 수시로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마차 뒷면에 저렇게 커다란 핏자국을 남기려면 어떤 방식으로 죽음을 당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범인으로 단정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이는 데 있어서 이런 형태의 핏자국을 남기는 상황에 대해서는 생각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동료가 저렇듯 처참한 흔적을 남기며 죽었을 정도로 치열한 격전을 치렀던 것 치고는 다른 사람들의 행색이 너무 멀쩡하다는 데 있었다. 흡사, 이들이 동료를 기습해서 죽여, 그 피를 마차 뒷면에 흩뿌리기라도 한 것처럼…….

“동료가 이렇게 처참하게 죽을 정도라면 다른 사람들도 비슷해야 정상일 텐데. 뭔가 수상쩍은데?”

중얼거리던 가죽갑옷 사내는 말을 마차 쪽으로 천천히 몰아 바짝 붙더니 휘장을 휙 들췄다. 마치 마차 안에 범죄의 흔적이라도 감춰져 있을 걸 내심 기대한 행동이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도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루한 소녀 하나가 작은 단검을 든 채 부들부들 떨며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적의를 드러내고 있는 대상은 분명했다.

“어?”

가죽갑옷의 사내는 김이 팍 샜다는 듯 기운 빠진 어조로 소녀에게 말했다.

“미안하구나, 얘야. 널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단다.”

그는 휘장을 내리며 철판갑옷 사내에게 소리쳤다.

“이 사람들은 상인들이 맞는 것 같아.”

만약 이들이 산적들이고, 소녀의 아버지를 살해한 뒤 마차를 강탈한 것이었다면 저 소녀를 묶어놓지도 않고 마차 뒤에 실어놨을 리가 없다. 그리고 그녀가 칼을 겨눈 채 적의를 가지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을 리도 없고. 그랬다면 자신을 보자마자 ‘사람 살려! 도와주세요!’ 하고 외쳐댔을 것이다.

“젠장, 척 보니 인상들이 산적 같아서 내심 기대했었는데…….”

투덜거리던 철판갑옷 사내는 해리슨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적의가 빠져나간 그의 말투는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최근 이 근방에 산적들이 많이 출몰한다고 해서 잠깐 살펴본 것뿐이니, 너무 불쾌하게 생각하진 말아 줬으면 좋겠소. 그런데 오크들의 습격은 어디에서 당했소?”

“델카를 벗어난 후 한 시간쯤 이동했을 때였소.”

긴장감을 애써 억누른 해리슨은 식사를 준비하는 도중에 자신들이 어떻게 오크들의 습격을 받았는지에 대해서 설명했다. 음식 재료를 꺼내려 마차 뒤로 갔던 동료가 가장 먼저 죽임을 당했고, 그 과정에서 저런 핏자국이 생기게 된 것이라고 말이다.

당시 습격해 온 오크의 숫자는 모두 다섯. 오크들의 무기라고 해봐야 몽둥이 정도였기에, 완전무장을 갖춘 자신들이 해치우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이다.

“허, 동료분이 죽으신 거는 정말 안타깝게 생각하오. 그런데 도대체 오크들에게 어떻게 죽음을 당하셨기에 저런 참혹한 자국이 남은 것인지……?”

곧이곧대로 대답할 수도 없었기에 당황한 해리슨은 대충 둘러댔다.

“그건 우리들도 잘 모르겠소. 우리가 오크들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동료가 토막이 난 채 죽어있었고, 저런 핏자국이 나 있는 상태였으니 말이오.”

“토막이 나서 죽었다고?”

“그렇소. 어쩌면 가져가서 먹으려고 그랬던 건지도 모르지요. 산맥으로 들어가면 수십, 아니 수백이 넘는 오크 떼를 볼 수 있겠지만 이런 데서 만날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열을 넘기지 않소. 그리고 체력도 별로 좋지 못하지. 무리에서 쫓겨난 탓에 여기까지 밀려 들어온 떠돌이 오크들이거든.”

“흐음…, 그럴 수도 있겠군.”

얘기를 오래 해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아는 해리슨은 슬쩍 주제를 바꿨다.

“도적이나 산적 놈들을 잡으려면 이런 도로보다는 산맥 쪽을 뒤지는 게 좋을 거외다. 밀수꾼들을 털어먹으려는 자들로 득실거린다고 들었으니 말이오.”

“우리도 그렇게 들었소. 그 때문에 산맥 쪽으로 가고 있는 길이지요. 델카에 자리를 잡고, 본격적으로 산적 사냥을 해 보려고요.”

가죽갑옷의 사내는 ‘산적 사냥’이라는 단어에 일부러 힘을 주며 해리슨 일행의 안색을 은근슬쩍 살펴봤다. 이쪽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 일부러 그런 말을 꺼낸 게 뻔하다는 것을 산전수전 다 겪은 중간보스들이 모를 리 없다.

“이미 다 알아보고 오신 모양이군요. 하지만 지금 델카에 가 봐야 좋을 게 없을 텐데…….”

중얼거리는 듯 말끝을 끝내며 가죽갑옷 사내의 호기심을 동하게 한 뒤, 해리슨은 짐짓 걱정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혹시, 영주님이나 아니면 관청에서 발행한 통행 증명서 같은 거라도 가지고 계시오?”

해리슨의 말투에 뭔가 찝찝함을 느낀 듯 가죽갑옷의 사내가 황급히 반문해 왔다.

“그건 왜 묻소?”

“오늘 델카를 떠나올 때 검문검색이 장난이 아닐 정도로 철저했었소. 평상시에는 델카로 들어오는 사람들만 대충 하는 시늉만 했었는데, 오늘은 밖으로 나가는 사람들의 짐까지 샅샅이 뒤지며 검문하더군요. 뭔가 큰 사건이 터졌다는 거 아니겠소? 그래서 친하게 지내던 경비병에게 물으니 살인사건이 벌어졌다고 하더군요. 그것도 델카 내의 고관들과 친하게 지내던…….”

해리슨은 여왕벌의 둥지에서 벌어진 참극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면서 요새도시 델카를 장악하고 있는 폭력조직 샐러맨더 파가 지금 미친놈처럼 날뛰고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이런 상황에서 자칫 그놈들과 사소한 시비라도 붙게 된다면 절대 좋은 꼴을 못 볼 거라는 말까지. 너무 말이 길어지자 랜이 해리슨의 등을 쿡쿡 찌르며 더 이상 말을 하지 말라고 할 때까지 말이다.

하지만 그런 해리슨의 말에 가죽갑옷의 사내는 그제서야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상인이라 보기에는 너무 완전무장을 하고 있어 내심 의심을 하고 있었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도 무장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테니까.

“좋은 정보 알려줘서 고맙소.”

“이렇게 모험가분들이 나섰으니, 조만간 이 일대도 마음 편하게 상행을 다닐 수 있겠군요. 정말이지 수고가 많으십니다.”

자신들과 같은 산적들을 잡겠다고 떠들어 대는 가죽갑옷 사내의 말에 다른 조장들은 난감함에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오로지 해리슨만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낼 뿐이었다. 그들의 대화를 뒤쪽에서 들으면서도 라이의 시선은 한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곧이어 저 철판갑옷이 꽤 눈에 익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가의 대량생산품이라면 몰라도 저런 고급품은 모두 주문 제작된 수작업품으로, 이 세상에 단 한 벌밖에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런데, 저런 갑옷을 어디에서 봤더라? 분명 오다가다 길거리에서 스쳐 가듯 본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까지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는 건…….

순간, 기억이 떠오른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예전에 용병대에 있을 때, 자신들이 식사하고 있는 식당에 우연히 함께 동석하게 된 모험가들이었다. 그때 라이의 시선을 빼앗았던 건 저 사내가 입고 있는 멋있는 철판갑옷과 아름다운 무녀였다.

마법사였던 여자도 엄청 아름다웠던 것 같았지만, 새침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그녀보다는 음흉스런 올란도의 수작을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주던 무녀가 더욱 아름답게 보였던 것은 뻔한 사실. 그 때문에 그때의 기억이 아직까지도 라이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고개를 돌려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세 명의 모험가들을 자세히 살펴보자 작고 아담한 체형을 지닌 사람이 둘 보였다. 모두들 후드가 달린 망토로 전신을 가리고 있었기에 드러나 있는 건 다리 정도밖에 없다. 저 두 명 중 한 명은 무녀고, 한 명은 마법사일 것이다. 하지만 이 거리에서는 누가 마법사고 누가 무녀인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이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계속 모험을 하고 있었구나.’

라이는 이들이 정말 부러웠다. 그가 어릴 때부터 간절히 바랐던 꿈이 모험가였으니까. 아버지가 섬기는 귀족과 함께 몰락의 길을 걷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며, 그는 절대로 주군 따위는 섬기지 않을 것을 속으로 맹세했었다. 그런 그가 가장 동경했던 직업은 바로 모험가, 특히 그중에서도 ‘용사’라는 직업이었다.

물론 용사라는 직업 자체가 따로 있는 건 아니었지만, 어렸을 때 들었던 옛날 얘기에서 막강한 동료들과 파티를 꾸려 마왕과 드래곤을 때려잡는 용사가 너무나도 멋있게 느껴졌던 것만은 사실이었다. 물론 지금은 세상물정을 어느 정도 알게 되었기에 어렸을 때의 그 꿈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 자신도 잘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의심이 모두 걷힌 가죽갑옷의 사내와 해리슨의 대화는 부드럽게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귀하들의 상행에 행운이 함께하길 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델카에서 다치지 마시고, 나쁜 산적 놈들을 깡그리 잡아주시길…….”

인사를 마치고 점차 멀어져 가는 모험가들의 뒷모습을 라이가 부러운 듯 바라보고 있을 때, 다른 조장들이 해리슨을 향해 질책 섞인 말을 토해냈다.

“야, 뭘 그런 것까지 꼬치꼬치 다 말해 주냐? 그리고 뭐? 나쁜 산적 놈들을 깡그리 잡아달라고? 난 잠시 네가 내가 알고 있던 해리슨이 아닌 줄 알았다.”

해리슨은 자신도 조금은 멋쩍었는지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대꾸했다.

“델카에 들어가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인데 뭐. 그리고 우리 조직원들 말고 다른 파의 조직원들을 저놈들이 깡그리 잡아주면 우리야 좋지, 안 그래?”

“허기야…, 어설프게 거짓말을 해 봐야 괜한 의심만 샀겠지. 우리가 델카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면 몰라도, 나중에 재수 없게 길에서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난감하긴 하겠네.”

“그나저나 이런 사실을 두목한테는 전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이 상황에서 어떻게 연락을 해?”

그들은 다란툼에 도착하는 대로 두목에게 모험가들에 대한 정보를 전령을 통해 보내기로 하고 길을 재촉했다. 그들은 출발한 이후에야 잭이라는 사내가 아직까지도 모험가들이 사라진 쪽을 망연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서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왜 저러고 서 있는 걸까? 하지만 아무도 잭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았다.

“너희들이 가봐. 나는 마차를 몰아야 해서…….”

해리슨이 마차 탓을 하며 슬쩍 빠졌고, 이제 남은 건 랜과 피터뿐이었다. 과묵하기 짝이 없는 랜이 저승사자에게 말을 걸 리 없다는 것을 잘 아는 피터는 은근슬쩍 해리슨을 부추겼다.

“야, 아까 보니 혓바닥에 기름칠을 했는지 정말 매끄럽게 말 하드만. 난 네가 그렇게 주둥아리를 잘 놀릴 줄 몰랐다. 그러니 이번에도 네가 좀 말해봐라. 우리는 이게 안 되잖냐.”

그러면서 피터는 엄지와 검지를 부딪치며 말하는 시늉을 해보였다.

“젠장, 달톤 녀석이 토막 나서 죽는 거 못 봤어? 나보고 그렇게 죽으러 가라고?”

“에이, 달톤이야 엄한 짓 하다 뒈진 거고. 너야 열심히 마차를 몰기만 했는데 설마 죽이겠냐?”

“싫어. 나는 마부석에서 꼼짝하지 않을 테니 너희들이 알아서 해.”

결국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피터가 등에 메고 있던 전투도끼를 벗겨 들었다. 그러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랜 역시 해리슨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좋게 말할 때 들어라. 잭 손에 죽기 전에, 우리들 손에 죽고 싶지 않다면…….”

잭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랜과 피터가 살기까지 드러내며 으르렁거리자 해리슨은 두 손 들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달톤이 상인을 죽이고 빨강머리 소녀를 겁탈하려다 죽은 것이었기에 어쩌면 자신은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해리슨은 마부석에서 내려오며 투덜거렸다.

“이런 개새끼들, 나중에 두고 보자.”

“다란툼에 가면 내 한잔 거하게 살게. 핫핫, 그러니 마음 풀라고.”

“건투를 비마.”

“쩝, 이런 것들도 친구라고…….”

동료들에게는 인상을 왈칵 일그러트리며 째려본 뒤 잭 쪽으로 발길을 옮기기 시작한 해리슨이었지만, 점차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그의 심장의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산적질을 하며 숱한 적들과 칼을 주고받을 때도 이렇게까지 긴장한 적은 없었다.

분명 라이의 기분 여하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할 텐데, 문제는 라이가 왜 저러고 서있는 지 그 이유조차 모른다는 것.

잭 옆으로 슬그머니 다가선 해리슨은 일부러 헛기침을 크게 했다.

“크흠!! 험!!”

멍하니 모험가들이 사라진 도로 저편을 바라보고 있던 잭의 시선이 그제야 해리슨 쪽으로 움직였다. 잭이 자신을 바라본다고 느끼자마자 해리슨이 재빨리 말을 걸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최대한 정중하게…….

“저…, 뭐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혹시 저 모험가들이 뭔가 눈치라도 챈 게 아닐까 생각하시는 건 아니신지……?”

그제서야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라이는 표정을 급히 수습하며 대꾸했다.

“뭐…, 뭐라고?”

“정체가 탄로 나지 않도록 잘 말해서 보냈으니 너무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하여튼 빨리 다란툼으로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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