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2화 (858/930)

다란툼은 영주가 기거하는 성답게 요새도시 델카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 규모가 컸다. 광대한 주거지역을 감싸고 있는 높지막한 성곽만 아니라면, 이곳이 몬스터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는 변방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활력이 넘쳤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요.”

조장들은 어느 순간 라이를 젊은 모습으로 변장하고 있는 경험 많은 실력자로 대접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 무지막지한 실력을 이해할 수 없었기에.

갑작스런 방문이긴 했지만, 동료 조장들의 모습을 본 다란툼 지부장은 무척 반가워했다. 말이 지부장이지 중간보스급 조장 정도의 지위였다. 그가 하는 일은 다란툼의 정보를 수집하다가, 그중에 쓸 만한 게 있으면 본거지로 보고하는 게 전부였다. 즉, 요새도시 델카에서 루크가 하던 일과 비슷한 역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어~, 오랜만이야. 기별도 없이 갑자기 어쩐 일이지? 그것도 자네들 셋이 함께 말이야.”

“부두목의 지시에 따라 중요한 손님을 모시고 왔어.”

“손님?”

조장들의 뒤편을 보니 솜털도 아직 벗겨지지 않은 것 같은 젊은 남녀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손님이라는 말에 지부장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허름한 젊은 남녀의 행색으로 봤을 때, 이곳 지부에 충원을 시켜 주려고 데려온 애송이들인 것 같은데, 그런데 왜 저들을 손님이라고 부른 것일까?

지부장은 의아하다는 듯 해리슨을 향해 살짝 눈짓을 하며 속삭였다.

“대체 저 애송이들이 누군데 손님이라 하는 거지?”

“여자애는 아니고, 젊게 보이는 분에게는 주둥아리 조심해라. 자칫 기분을 상하기라도 하면 네놈 모가지가 달아날 테니.”

그 말에 지부장은 라이를 조심스럽게 살펴봤지만 아무리 봐도 촌구석에서 막 도시로 나온 어설픈 애송이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흥, 오랜만에 만났다고 내게 장난을 치는 모양인데 안 속는다, 안속아. 그러니 빨리 말해봐. 대체 애송이들을 데리고 여긴 왜 온 거야?”

“씨불, 헛소리 그만하고, 어쩌면 두목이 초빙한 암살자일지도 몰라. 젊어 보이는 겉모습도 아마 변장한 것일 테지. 그러니까 말조심하란 말이야.”

겁에 질린 듯 라이를 훔쳐보며 여기까지 속삭인 해리슨은 라이를 손짓으로 가리키며 약간 큰 소리로 지부장에게 말했다.

“이분은 잭이라는 분이셔. 부두목께서 자네에게 최대한 빨리 안내하라고 명령하셨지.”

지부장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라이를 연신 훔쳐보았지만 일단 정중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곳 다란툼 지부를 맡고 있는 코비라고 합니다.”

라이는 말없이 품속을 뒤져 부두목에게서 받았던 편지를 지부장에게 건네줬다.

며칠 전까지의 라이 성격이었다면 지부장씩이나 되는 사람에게 이렇게 오만한 표정을 지었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곳까지 오면서 조장들 셋이 겁에 질린 눈빛으로 연신 굽실거리며 떠받들어 주다 보니 그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을 스스럼없이 해치는 깡패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자, 약간 경멸에 가까운 감정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고…….

“부두목은 자네가 최대한 협조해 줄 거라고 했는데.”

라이가 건넨 편지를 허겁지겁 읽은 지부장의 얼굴에는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의아함이 어려 있었다.

“샐러맨더 파의 수뇌부들이 있는 본거지로 잭님을 안내해 주면 된다니……. 이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던 지부장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라이에게 물었다.

“조직 간의 협상이라도 하시려고……?”

“협상이 아니라 최대한 빨리 놈들을 해치워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

샐러맨더 파의 수뇌부를 해치우겠다는 라이의 말에 모두들 경악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곧 세 명의 조장들은 여왕벌의 둥지에서 일어난 참혹한 사건을 떠올리며 그 범인이 잭일 거라는 심증을 굳힐 수 있었다. 이미 잭의 잔인하면서도 무시무시한 실력을 자신들이 똑똑히 봤기에 내릴 수 있는 결론이었다.

‘두목이 왜 저런 무서운 놈을 끌어들였나 했더니, 역시…….’

하지만 아직 앳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잭의 실력을 도저히 믿기 힘들었던 지부장은 어이가 없었다.

‘샐러맨더 파가 얼마나 막강한 조직인데……. 두목이 미쳤나? 아무리 조장들이 도와준다고 하지만, 저들만으로 샐러맨더 파 두목을 암살하라니…….’

“두, 두목님께서 말입니까?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흥! 두목의 명령에 불복하겠다는 건가? 자네도 달톤이라는 놈처럼 죽고 싶은 게로군.”

라이가 검을 뽑아들려는 순간, 해리슨이 허둥지둥 그 앞을 막아섰다.

“어르신! 잠시만…, 잠시만 참아주십쇼. 제가 말을 해보겠습니다.”

라이는 못 이기는 척 뒤로 슬쩍 물러섰다. 위협만 한 것이지, 실제로 그를 죽일 생각은 없었으니까.

조장들은 행여 자신들의 말이 라이에게 들릴세라 구석진 곳으로 지부장을 끌고 가더니 속닥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이 뭐라고 속닥거렸는지는 알 수가 없었지만, 잠시 후 라이에게로 다가온 지부장의 태도만 봐도 대충 짐작할 수는 있었다. 그의 태도는 조금 전까지와는 달리 상당히 공손하게 바뀌어 있었던 것이다.

“미처 몰라 뵙고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부디 용서해 주시길…….”

하지만 공손한 태도와는 달리 아직 의심이 가득한 그의 눈빛으로 봤을 때, 완전히 라이의 실력을 믿는 것 같지는 않았다.

“모르고 저지른 일까지 질책할 정도로 옹졸한 사람은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다.”

일부러 거드름을 피우며 말하고는 있었지만, 라이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 이런 식으로 말한다는 데 있어서 속이 거북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저들은 폭력이 일상화되어 있는 환경에서 성장해 온 사람들이다. 이쪽이 겸손하게 존대를 해 주면 힘이 없어서 그런 줄 알고 오히려 얕잡아 보는 그런 인간들인 것이다. 이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인간들을 상대하는 법을 조금씩 터득해 나가고 있었다.

라이의 속마음도 모르고 지부장은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해 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일단 안내는 해드리겠습니다만, 조심하셔야 할 겁니다. 이곳의 고위관료들은 물론이고, 영주조차도 샐러맨더 파를 은근히 밀어주고 있는 형편이니까요.”

“그야말로 기가 찰 일이로군. 깡패조직의 뒤를 봐주는 영주라니……. 영지를 아예 말아먹고 싶은 모양이지?”

“꼭 그렇게만 볼 수도 없는 게 영주가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하기 힘든 더러운 일들을 조직에서 은밀히 처리해 주니 서로 공생관계라고 하는 게 맞는 말이겠지요.”

라이의 퉁명스런 말투에 지부장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두목의 의뢰를 받고 온 주제에 조직 자체를 얕보는 듯한 말을 하니 기분이 살짝 언짢았던 것이다. 그리고 지부장의 그런 변화를 라이는 재빨리 눈치챘다.

“흐음…, 뭐 나야 두목이 부탁한 임무만 수행하면 되니 구태여 이러쿵저러쿵할 필요는 없겠지.”

지부장이 말한 더러운 일이라면 대충 짐작은 갔다. 납치, 암살, 인신매매 등등. 기분은 더러웠지만 가짜 신분증을 손에 넣기 위해서 지금은 겉으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중간보스들의 말을 슬쩍 엿들어 보니 자신을 연륜 있는 암살자로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라이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일부러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쨌거나 놈들의 두목이 있는 곳으로 언제 날 안내해 줄 수 있겠나?”

“저…, 그게 최소한 일주일은 주셔야…….”

“삼일 내로 끝내. 알겠나?”

“예…? 예. 최대한 노력해 보겠습니다…, 어르신.”

지부장은 마지못한 듯 작은 목소리로 어르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동안 나는 여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내가 묵을 만한 괜찮은 여관은 있나?”

“이 근처에서 최고급 여관으로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어르신.”

“아니, 그렇게 좋은 곳은 필요 없어. 이런 허름한 옷차림으로 고급 여관에 들락거리면 오히려 사람들 눈에 띄기 쉬우니까. 내가 원하는 건, 적당히 녹아들 수 있는 장소야. 더불어 음식 맛이 좋다면 더 바랄 게 없고 말이지.”

잠시 생각하던 지부장은 손가락을 딱 튕기며 말했다.

“괜찮은 곳이 있습니다. 딴 건 몰라도 음식 맛은 아주 마음에 드실 겁니다.”

잠시 후, 지부장이 붙여준 소년을 따라 밖으로 나가려던 라이의 눈에 난처한 듯한 얼굴을 하고 서 있는 소녀가 보였다. 아주 잠깐 바라본 것뿐이었는데, 눈치 빠른 해리슨이 즉시 반응했다.

“저 아이에 대해서는 어르신께서 심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어떻게 할 건가?”

“일이 끝나실 때까지 이곳 지하실에 가둬두도록 하겠습니다.”

자신을 지하실에 가둬두겠다는 말에 소녀의 안색이 일순 창백하게 질린다. 하지만 입을 꽉 다물고만 있을 뿐, 감히 항의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그저 서 있기만 했다.

“그럴 필요 없다. 내가 데리고 가지.”

“예?”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녀와 라이를 번갈아 바라보던 피터는 곧바로 감 잡았다는 듯 음흉스런 미소를 지었다. 그는 라이가 저 소녀를 데리고 가서 잠자리를 함께하려고 할 속셈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암살자들 중에는 긴장을 풀기 위해 여색을 탐하는 자들도 많다고 들었으니까. 아니, 그건 비단 암살자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그들 역시 여색을 밝히는 데 있어서는 절대 뒤지지 않았으니까.

“저 애 하나만으로 괜찮겠습니까? 제가 잘 아는 포주가 있는데, 그 할망구에게 말하면 어르신 취향에 맞는 애를 얼마든지…….”

라이는 짐짓 짜증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손을 내저은 후 퉁명스레 대꾸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자네들은 자네들이 맡은 일이나 빨리 처리하도록 해.”

“예, 어르신. 염려 놓으십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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