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 걸렸다!
소년은 라이와 소녀를 시장 안의 허름해 보이는 여관으로 안내했다.
“여깁니다, 어르신.”
소녀는 지부장이라는 인물이 잭이라는 사내에게 얼마나 굽실거렸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제법 괜찮은 여관을 내심 기대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낡고 허름한 여관을 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라이는 전혀 불만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잘 지어진 깔끔한 건물보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울리는 낡은 건물을 선호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통해 누가 다가오는지 바깥의 동정을 살피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건물 1층은 식당이었고, 그 위로 2층부터 4층까지가 여관인 모양이다. 창밖에서 내부를 힐끗 들여다보니 식당 안은 꽤 많은 손님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요새도시 델카에서 라이가 묵었던 여관도 이런 모습이었다. 식당에 손님들이 많은 걸 보면 허름한 외관에 비해 음식 맛이 그리 나쁘지는 않아 보였다.
‘어차피 며칠 묵지도 않을 건데…….’
소년은 여관까지 안내해 준 후 곧바로 돌아가 버렸다. 요새도시에서 라이를 안내했었던 당코…, 아니 루크라는 놈이 라이의 숙박비를 모두 계산해 줬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대접이다. 이곳 지부장이 라이의 실력을 의심하고 있었기에 벌어진 일이었지만, 지금껏 이런 대우를 받으며 살아왔었던 라이였기에 전혀 부당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들어가자.”
라이는 소녀와 함께 1층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점원인 소녀가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두 분이신가요? 이쪽에 자리가 있어요. 이리로 앉으세요.”
점심 식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늦었고, 저녁 식사라고 하기에는 꽤나 이른 시간이었지만 놀랍게도 식당 안에는 꽤 많은 손님들이 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라이는 점원을 따라가 그녀가 권하는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뒤따라 온 소녀를 향해 손짓과 함께 자리를 권했다.
“뭐 하고 있어? 이리 와서 앉아.”
“예, 어르신.”
겁에 질린 눈빛으로 라이를 힐끔힐끔 훔쳐보며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는 소녀. 라이를 만난 후, 단둘이 되어본 것은 이게 처음이다.
“식사는 어떤 게 되지?”
“이거하고 이거, 그리고 이거 빼고는 다 돼요. 재료가 떨어져서…….”
라이는 배가 몹시 고팠기에 일단 이것저것 맛있을 만한 걸로 몇 가지를 시켰다. 점원이 주문을 받고 떠난 후, 라이는 소녀를 향해 물었다.
“지금까지 이름을 물어보지도 않았군. 이름이 뭐냐?”
“리…, 릴리라고 합니다. 어르신.”
“어르신은 무슨, 그냥 잭이라고 불러.”
라이의 말에 릴리는 난감한 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름을 부르기에는 어르신께 너무…, 실례되는 거 같아서…….”
“괜찮아. 내가 지금 이런 모습인데, 그런 나를 보고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겠어?”
‘이런 모습인데’라는 말에 릴리는 라이가 보기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사내고, 지금은 젊은 청년으로 변장하고 있는 것이라는 걸 확신했다. 물론 그전에도 중년사내들이 라이를 어르신이라고 부르는 걸로 봐서 뭔가 있다는 것쯤은 눈치채고 있었지만…….
“예, 알겠습니다.”
마침 점원이 빵하고 스튜를 먼저 내왔기에 둘은 대화를 중지하고 식사부터 하기 시작했다.
“숙박을 하려 하는데 방 두 개 있냐?”
“따로 묵으시려고요?”
“응.”
“마침 빈방이 있긴 한데…….”
“가격은 어떻게 되지?”
숙박비는 라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저렴했다. 그가 요새도시에서 묵었던 그 허름했던 여관보다도 가격이 쌌다.
‘손님이 별로 없는 모양이지?’
그건 라이의 생각이었고, 그가 점원과 주고받는 얘기를 엿들은 식당 손님들이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어보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그들 나름대로는 라이에게 들리지 않도록 나지막한 어조로 속삭인 것이었지만, 요즘 들어 내공수련에 매진하고 있던 라이의 귀에는 선명하게 들려왔다.
“저 사람들은 며칠이나 버틸까?”
“가격이 싸니까, 그래도 3일은 버티지 않을까?”
“글쎄…, 나는 하루도 버티지 못할 거 같은데…….”
그러더니 언제쯤 라이 일행이 나갈 것인지를 두고 내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라이로서는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점원이 꽤 친절하고, 인상도 좋아 보였는데 비딱한 시선으로 보니 그 친절함조차도 수상쩍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뭔가 사기를 당하는 듯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이 방하고 저 방이에요. 자요, 열쇠.”
도대체 어떤 방이기에 모두들 수군거렸던 것인지 찜찜함과 함께 궁금증이 치솟았다. 싼 만큼 방이 형편없는 건가? 릴리와는 저녁식사 때 다시 만나기로 하고, 우선은 각자 방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상한 것보다 너무 괜찮았다. 최악을 가정하고 있었던 탓에 더욱 좋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침구도 깨끗했고, 매트리스의 짚은 새로 넣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였다. 막 교체해 향긋한 풀냄새까지 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는 폭신한 탄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이상하네? 이 정도면 꽤 괜찮은데, 왜 그런 소리를 한 거지? 설마…, 유령이라도 나오는 방인가?”
사악한 기운이 모이는 특별한 장소라면 언데드 몬스터가 나오기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이런 도심지 한가운데서 그런 게 나온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설혹, 우연이 겹쳐서 그런 게 나온다고 하더라도 이런 곳은 언데드 몬스터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신관들도 자주 왕래하는 도심인 만큼,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토벌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유령 같은 것에도 내 검이 먹힐까? 뭐…, 그건 해 봐야 알 수 있겠지.’
라이는 침상 위에 정자세로 앉아 검술 수련을 시작했다. 그가 하는 건 꿈속에서 본 검술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검의 움직임과 함께 몸속 무형의 기운을 어떻게 함께 동조시켜 움직여가야 하느냐 하는 것에 대한 심상수련(心象修練)이었다. 실제로 검을 뽑아들고 휘두르는 게 가장 좋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검을 뽑아들고 휘두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랬다가는 어떤 사태가 벌어질지 불을 보듯 뻔했으니까.
그래서 라이가 선택한 수련방법이 바로 이 심상수련이었다.
몸 안의 내공의 움직임을 머릿속 깊이 각인시키는 데 있어서 오히려 이 방법이 더 뛰어난 수련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건 소 뒷걸음질에 쥐를 밟은 것과 같은 행운이었다. 육체적인 수련에는 한계라는 게 존재했지만, 마음이라는 건 한계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근래에 검술을 발현했던 것을 머릿속에서 수십, 수백 번 떠올리면서 자신이 실수했던 부분을 찾아내는 것도 매우 유익한 방법이었다.
검을 처음 익히는 초보에게는 이런 수련법이 전혀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라이의 몸속에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엄청난 수준의 내공이 이미 갈무리되어 있는 상황이다. 그것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게 그에게는 급선무였는데, 라이는 자신도 모르게 자신에게 가장 효과적인 수련법을 찾아서 행하고 있던 셈이었다.
정자세를 튼 라이의 의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저 깊은 세계로 빠져 들어갔다.
문득 제정신으로 돌아온 라이. 창문을 보니 환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라이는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다고 착각했지만, 사실은 그가 이 방에 들어온 후 벌써 하루가 지나 있었다.
‘아직 해가 지려면 먼 것 같긴 한데……. 지금 밥 먹자고 하면 싫다고 하지 않으려나?’
꼬박 날밤을 새운 라이는 뱃가죽이 등에 붙을 정도로 극심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뭐, 아무려면 어때. 정 안되면 나 혼자서 내려가서 먹으면 되지.’
똑똑…….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는데,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좀 더 세게 두드렸다.
똑똑! 똑똑!
그래도 기척이 없었기에 돌아서려고 하는데, 문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라이는 괜히 릴리를 깨웠다고 생각했다. 피곤해서 잠시 잠이 든 모양인데…….
삐그덕 하고 문을 여는 릴리. 방금 전에 헤어진 것 같았는데, 그동안 릴리의 얼굴은 꽤나 많이 변해 있었다. 피곤에 찌들어 있는 퀭한 눈동자…….
“미안, 자고 있는데 괜히 깨웠네. 나는 같이 저녁이나 먹으러 가려 했는데…….”
“저…, 저녁이요?”
멍한 듯 중얼거리는 릴리. 잠시 고개를 돌려 창밖을 힐끗 쳐다보더니, 도저히 못 참겠는지 창문 쪽으로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고개를 밖으로 꺼내 해가 떠 있는 방향을 살핀다. 자신의 기억이 맞다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릴리는 재빨리 라이 앞으로 돌아왔다. 아직 점심때도 되지 않은 게 확실했다. 하지만 그걸 눈앞의 무시무시한 사내에게 말할 담력은 없었다. 안 그래도 시장하던 참이니 잘 되긴 했다.
“마침 배가 고프던 참이었습니다, 어르신.”
“어르신이라 부르지 말라니까. 그냥 잭이라고 불러, 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