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68화 (864/930)

저녁식사 후, 자신의 방으로 올라간 파벨은 겁에 질린 눈빛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언제 월터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올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서부지부장과 한잔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지만, 취기가 오르면서 여자 생각이 나면 곧바로 달려 들어오리라.

하지만…, 그녀의 우려와 달리 그날 그녀의 방을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일어나 식사를 마친 후 또다시 길을 떠났다. 그리고 점심때쯤 되었을 때는 서부지부장이 예측한 대로 국경 근처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월터님.”

“그래, 수고해 주게.”

“저로서는 월터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영광입니다. 그럼, 이만…….”

서부지부장이 월터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것을 보며, 파벨은 드디어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어젯밤 자신을 부르지 않은 것은, 서부지부장이라는 존재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단둘이 되는 오늘부터는 거리낌 없이 자신을 덮쳐 오지 않을까?

‘젠장, 능력이 모자라다 보니 별 거지같은 짓을 다 해야 하네…….’

파벨은 자신이 배부른 투정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운이 좋아서 지금까지는 통신실에서만 일하고 있긴 했지만, 지국에 소속된 첩자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는지 그녀가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몸 정도 바치는 것쯤은 희생 축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그걸 잘 알면서도 입맛이 씁쓸한 이유는 그들은 국가를 위해서 한 희생이었고, 자신은 높으신 분의 돼먹지 못한 자제의 한순간 쾌락을 위해서 그 짓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이었다.

파벨의 기대(?)와는 달리 월터는 그녀의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았다. 서부지부장과 헤어진 후, 파벨은 한동안 바짝 긴장한 채 월터의 눈치만 살폈다. 언제 월터가 자신에게 ‘신호’를 보내 성적 욕구를 채우려고 할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는 눈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월터는 자신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었다. 상대를 자세히 관찰하고 있다 보니, 한 가지 확실하게 와 닿는 게 있었다.

월터가 자신을 굉장히 껄끄러워하고 있다는 것…….

첫 대면에서 받았던 그 느낌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를 싫어하는 게 분명해. 왜?’

밀폐된 통신실에서 수면부족으로 눈 밑에 다크서클이 생길 정도로 혹사당하고 있다 보니, 운동은커녕 햇볕을 쬐며 산책 한 번 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몸매 관리를 제대로 못한 건 자신도 인정하지만, 그녀에게는 마법사만이 할 수 있는 비장의 수법이 있었다. 일반인과는 골격부터가 다른 것이다. 화장만 쪼~금 더 찐하게 하면 완벽에 가깝게 변신이 가능했다. 그런 자신을 싫어할 수 있는 사내가 감히 존재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때, 그녀의 뇌리에 번쩍하고 떠오르는 게 있었다. 여자 마법사의 현란한 미모에 전혀 속아 넘어가지 않는 족속이 있다는 것을.

그것은 바로 남자 마법사였다. 그들은 그 사기적인 수법의 비밀을 아는 것은 물론이고, 직접 사용할 줄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아카데미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수도 없이 많은 여마법사들을 만나봤을 테니 미모에 대한 내성 또한 최고 등급에 다다른다.

파벨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터져 올라오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지 않을 수 없었다.

‘에휴~ 마법사인가? 하기야…, 그럼 모든 게 설명이 되지. 허리에 차고 있는 저 검도 일부러 상대의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차고 있는 걸 거야. 맞아. 그러니까 검만 차고 있지, 가죽갑옷조차 입고 있지 않잖아. 그럼 이게 뭐야……?’

생각하기 싫어도 파벨의 머리는 빠른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월터가 마법사라면, 그것도 상부에서 파견되어 나온 마법사라면 자신보다 훨씬 더 실력이 좋을 것은 뻔한 사실. 그런 그가 왜 자신을 데리고 알카사스의 국경을 넘으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도 통신실에서 잡무나 맡고 있던 삼류 마법사를…….

이렇게 되면 그 용도는 뻔해진다. 어딘가의 희생양으로 써먹을 작정이리라. 안 좋은 방향으로만 자꾸 생각이 흘러가자 파벨은 애써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의 방향을 바꾸려 했다.

‘설마~, 기분 탓이겠지. 저 사람이 마법사라는 건 순전히 내 짐작일 뿐이니…….’

하지만 그녀의 망상은 더욱더 안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이건 썩 좋지 않은 현상이라는 걸 파벨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확인해 보면 모든 게 명확히 정리되겠지만, 문제는 월터가 마법사라면 마법을 써서 탐색하려는 순간, 역으로 포착당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될까?

이도저도 못하고 월터의 눈치만 살피며 그의 뒤를 따라가고만 있을 때였다.

“국경을 넘은 후부터는 위험한 인물은 없는지 주위를 지속적으로 탐색해서 확인하도록 해라. 특히, 서부지부장 주변의 인물들에 대한 탐색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월터의 허락이 떨어진 만큼, 파벨은 주저하지 않고 곧장 탐지마법을 펼쳤다. 뷰 마나 포스와 뷰 매직 포스. 그걸 통해 주변을 훑어보는 한편, 그녀는 월터의 모습도 살짝 훔쳐봤다. 그런데 아무런 변화도 느낄 수가 없었다. 대탐지마법으로 몸을 감싸고 있음에 틀림없었다.

월터가 마법사임을 확인하는 순간, 파벨은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성 상납을 하지 않아도 되는 건 좋았지만, 이젠 미끼로 내던져져 생명의 위험을 겪어야 할 차례였으니까.

‘젠장!! 역시 내 생각이 맞았잖아.’

실력 있는 마법사라 할지라도 대탐지마법을 하루 종일 실행시켜 몸을 감추고 있는 건 가능해도, 탐지마법을 하루 종일 실행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탐지하려는 범위가 넓어지면 넓어질수록 더욱 많은 마나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아마 월터가 자신에게까지 탐지마법을 사용하라고 한 건 그 때문일 거라고 파벨은 짐작했다.

호오, 인재를 발견했군

월터는 예전에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서부지부장 혼자 여관에 묵도록 조치했다. 그런 다음 그 여관 주변 일대를 감시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는 여관에 자리를 잡았다. 이번에는 전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마법사도 한 명 데리고 왔다. 급히 수배한 탓에 실력이 좀 미심쩍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런 변방에서 기사단에 배치될 정도의 실력을 갖춘 엘리트 마법사를 바란다는 것은 무리였으니까.

‘뭐, 실력은 어쨌거나 눈은 즐겁군.’

월터는 가급적 모든 걸 좋게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얼굴만 예쁜 여자와 함께 있다는 게 전혀 도움이 안 되니, 마음과는 달리 계속 짜증이 치밀고 있었다. 더군다나 비좁은 여관에 함께 기거해야만 한다는 게 그를 더욱 짜증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적이 언제 습격해 올지 알 수가 없는 만큼, 파벨을 따로 묵게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무리해서라도 남자 마법사를 보내달라고 떼를 써 볼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지원해 줄 수 있는 마법사가 눈앞에 있는 이 여자뿐이라는 데야 어쩌겠는가.

‘흐유~~, 좋게 생각하자, 좋게 생각해……. 눈은 즐겁잖아, 눈은. 이런 젠장!!’

월터는 기분전환을 위해 파벨에게 질문을 던졌다.

“어때? 아직도 뭔가 느껴지는 게 없어?”

월터가 아무리 뛰어난 검술의 고수라고 해도, 주변 전역을 탐색하는 데는 마법사의 발끝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마법사에게는 광범위 탐색마법이라는 게 있었으니까. 더군다나 마법사의 경우, 마나는 물론이고 마법의 기운까지 읽을 수 있었다.

파벨 또한 월터처럼 자신의 기척을 감추는 마법을 운용하고 있는 중이다. 거기에 지속적으로 마나를 쏟아 부어야 했기에, 파벨이 쓸 수 있는 마법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간단한 탐색과 통신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월터로서는 그것만 해도 충분했다. 그녀에게 그것 이상 원하는 건 없었으니까.

“월터님께서 신경 쓸 만한 존재는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무역로 상에 위치한 마을인 만큼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상인도 많았지만, 그들을 호위하기 위한 용병들도 많았다. 저 인파들 속에 배신자가 보낸 마법사나 기사들이 언제 스며들어올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럴 때는 조바심을 내서는 안 된다. 느긋한 마음으로 최고의 컨디션을 유지하며 기다리는 쪽이 승리한다. 그걸 잘 알면서도 월터는 자신의 마음을 억제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자신이 이 마을에서 이렇게 오랫동안 기다리게 될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이곳에 자리 잡은 지 벌써 일주일이 넘었지만, 그 어떤 이상 징후도 포착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놈들이 아직 냄새를 맡지 못한 건 아니겠지?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이렇게 허술하게 미끼를 데리고 나왔는데, 모른다면 첩자로서의 자격이 없는 놈들이겠지. 혹시 조심성이 많은 놈인가? 아니면 함정이라는 걸 눈치챈 건가? 얼마 전에 그렇게 많은 인원을 동원했는데도 실패했으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성공시키기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상대가 얼마나 많은 전력을 동원할지, 그에 대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자신 한 몸 도망치는 건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국장이 추천한 만큼, 파벨이라는 여 마법사 또한 맡은 일은 충분히 완수를 해 줄 거라고 월터는 믿고 있었다. 파벨이 실전이라고는 단 한 번도 겪지 않은 완전 생초보라는 걸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일단 밥이나 먹으러 내려가자. 우리가 기다린다고 해서 안 올 놈들이 오는 건 아니니까.”

“예, 월터님.”

할 일도 없는데 부하라고 하지만 미인과 한방에 앉아있어 봐야 마음만 싱숭생숭해지기에 월터는 식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그렇다고 식당에 앉아있는 게 시간 낭비만은 아니었다. 식당에 들어오는 손님들로부터 이런저런 소문들을 주워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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