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0화 (866/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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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가 검술의 세계에 점차 눈을 뜨고,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밤에 건물 위를 뛰어다니고 있을 무렵, 요새도시 델카에 도착한 팔바 일행은 영주 측이 뿌리를 뽑아 줄 것을 부탁한 산적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델카 주둔군의 고위층과 접촉해 본 결과 영주 쪽에서 말한 산적 무리 안에 샐러맨더 파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서 원한다면 그쪽과의 만남을 주선해 주겠다는 제안까지 했다. 물론 팔바 일행은 그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델카로 오는 도중에 만났던 상인들에게 요새 쪽 사정을 미리 들을 수 있었던 게 아주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면서…….

면담이 있은 후,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샐러맨더 쪽에서 팔바 일행에게 사람을 보내왔다. 미리 언질을 받은 게 아니었다면, 주먹패에 소속되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말쑥한 인상의 사내였다.

“듣자하니 산적 토벌을 위해서 오셨다고요?”

“그렇소.”

“한발 늦으셨군요. 그놈들은 이미 우리 쪽에서 처리했습니다.”

사내의 느닷없는 발언에 팔바는 어이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오?”

“물론입니다. 천운으로 놈들의 조직에서 권력투쟁이 벌어져서 말이죠. 부두목이라는 놈이 두목을 해치운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두목 밑에 있던 간부 한 놈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우리 쪽에 투항한 것이었죠. 녀석의 말대로 곧바로 쳤었다면 완전히 끝장을 낼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는 못했다. 그의 말을 제대로 믿지 않았던 탓도 있었고, 여왕벌의 둥지를 습격한 범인들에 대한 탐색에 대규모로 인력이 동원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그쪽으로 돌릴 인력이 부족한 탓도 있었다.

하지만 적들의 본거지와 판매망을 파괴한 것은 물론이고, 그들이 아직 처분하지 못하고 쌓아 두고 있었던 장물들을 전량 빼앗는 데 성공했다. 그것만 해도 산적 패들의 기반을 뒤흔들 정도의 타격을 입힌 것이었기에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상세한 내막을 팔바가 알 리 없었지만, 조직에 배신자가 나왔다면 치명타를 입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결국 헛걸음을 한 셈이었기에 팔바는 어이없어했다.

그때, 지금까지 옆에 앉아 가만히 듣고만 있던 마법사 젠느가 끼어들었다.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을 차갑게 굳히며 사내에게 쌀쌀한 어조로 물었다.

“그런 얘기를 우리에게 굳이 하는 이유는 뭐지?”

“아, 예. ‘빛의 날개’의 위명은 오래전부터 듣고 있었습니다. 산적 사냥보다 더 좋은 일이 있기에 꺼낸 말이었습니다.”

사실, 이곳에서 암암리에 산적질을 하고 있는 건 블루썬더 패거리뿐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산적들이 몽땅 다 토벌된 것처럼 말한 것은 이 제안을 꺼내기 위해서였다. 빛의 날개를 산적 토벌에나 동원하는 건 낭비였으니까.

“일단 어떤 일인지 들어봐야겠는데?”

“당연하죠. 혹, 여왕벌의 둥지에 대한 얘기는 들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이미 들은 적이 있었기에 팔바와 젠느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자 사내는 빠른 어조로 말을 이었다.

“오오, 이미 들으셨군요. 그 때문에 저희 보스께서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그렇다고 저희들의 힘만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도 아닌 것 같고 말이지요. 어떻습니까, 그 일을 맡아주실 생각은? 흉수를 잡아주신…, 아니 잡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배후라도 밝혀 주신다면 산적을 토벌하시는 것보다는 훨씬 더 많은 수입을 올리실 수 있을 거라는 걸 제가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팔바가 막 수락하려 할 때, 젠느가 손을 뻗어 그를 제지한 뒤 자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성급하게 결정할 수는 없고, 현장을 둘러본 후에 결정을 내려도 괜찮을까?”

“현장이라면…, 여왕벌의 둥지 말씀이십니까?”

사내는 난처한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말을 이었다.

“이미 현장 정리를 해 버린 후라서 도움이 될 만한 게 남아 있을지……?”

“뭔가 증거물이 남아있을지도 모르는데 설마, 깨끗하게 치워 버렸나?”

“완전히 치워 버린 건 아니고……. 동료들의 시신을 썩게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시신만큼은 수습했습니다. 그 외에 다른 건 건드리지 않고 그냥 놔두긴 했지만 말입니다.”

그 이후에 많은 일들이 벌어진 탓에 거기까지 신경을 쓰지 못해서 그냥 놔두고 있었던 것이지, 현장을 보존하겠다는 생각으로 놔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유야 어쨌거나 시체만 치웠다면 둘러볼 가치는 충분히 있었다.

“지금 바로 가볼 수 있겠나?”

“예, 상관없습니다. 따라오시죠.”

“이쪽입니다.”

사내가 문을 열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가 앞장서서 지하로 내려가려 하자 팔바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우리끼리 살펴보면 안 되겠나?”

“안 될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 팔바 일행들에게는 시체만을 치웠다고 했지만, 이미 돈 될 만한 귀중품들까지 모두 다 치워 버린 상태다. 이들이 내려가서 본다고 해 봐야 들고 갈만한 건 하나도 없다는 소리였다. 사건이 일어나고서 시간이 꽤 흐른 후였기에 피비린내는 사라졌지만, 대신에 피가 부패하며 풍기는 악취가 코를 찌르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지하까지 안내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니, 사내로서는 반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편하시다면 저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천천히 둘러보고 올라오시죠.”

“편의를 봐줘서 고맙구먼.”

“뭘요. 그럼, 좋은 결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계단 아래쪽으로는 불빛조차 없어 짙은 어둠만이 가득했다. 젠느는 마법으로 빛의 구슬을 만들어 눈앞을 밝게 만들었다.

“내려가자.”

계단 아래로 몇 발자국도 채 내려가지 않아 그들은 뭔가 썩는 듯한 악취에 인상을 찡그려야 했다.

“도대체 몇 명이나 죽은 거야?”

“그러고 보니 그걸 물어보지 않았네.”

“뭐, 내려가 보면 알겠지. 이 코를 찌르는 악취로 보건대, 핏자국까지 깨끗하게 닦아내지는 않은 거 같으니까 말이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어디선가 본 듯한 특이한 형태의 시커먼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이건 그 마차에서 봤던…….”

“맞아! 그거야. 바로 그 흔적이야! 그렇구나. 이러니까 그런 핏자국이 만들어진 거였어.”

벽면에는 검붉은 핏자국과 함께 그물처럼 얽혀있는 깊은 흔적들이 새겨져 있었다. 가까이 가서 그 흔적들을 살펴보려고 할 때 뒤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마차에서 이런 흔적을 봤다고 그랬습니까?”

“헉!”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지하에서,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둘은 기절초풍할 만큼 깜짝 놀랐다. 그들은 재빨리 뒤로 돌아서며 벽면 쪽으로 붙은 뒤 방어태세를 취했다. 마법사인 젠느는 뒤쪽에 서고, 팔바는 그런 젠느를 지켜주듯 그녀의 앞쪽을 막아선 모습이다.

놀랍게도 그들에게 말을 건 사람은 자신들을 이리로 데리고 왔던 사내가 아니었다. 그리고 사건 현장을 지키고 있는 경비도 아닌 게 분명했다. 허름한 옷차림의 용병처럼 보이는 30대 중반대의 사내였다.

“마법 주문을 해제하시죠. 더 이상 주문을 외운다면 땅바닥에 패대기칠 수밖에 없으니 말입니다.”

팔바가 칼을 빼 들고 있는 것과 달리 사내는 아직 칼을 뽑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무장을 갖춘 팔바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것쯤은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허세일까? 아니면 자신의 실력에 대한 절대적인 자신감일까?

팔바는 흔히 구하기 힘든 값비싼 장비로 완벽하게 무장을 하고 있는 상태. 그에 비해 사내는 갑옷조차 없는 허름한 복장에다가 허리에 차고 있는 검도 싸구려처럼 보였다. 하지만 젠느는 사내를 경시할 수가 없었다.

저 여유는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쪽의 장비만 봐도 어느 정도 수준일 거라는 건 대충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저런 여유를 부리는 걸 보면 뭔가 단단히 믿는 구석이 있음에 틀림없다고 봐야 했다.

젠느의 시선이 어느 순간 단정하게 잘 정리되어 있는 사내의 머리카락으로 이동했다. 그 순간 젠느는 마법 주문을 멈추고, 한껏 끌어모았던 마나를 천천히 흩어 버렸다. 일단 적의는 없어 보였기에 모험을 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팔바 앞으로 나설 배짱은 없었기에 팔바의 뒤에 몸을 감춘 상태로 사내에게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하지만 사내는 그에 대한 대답은 하지 않고, 오히려 벽에 새겨진 커다란 흔적을 가리키며 물었다.

“분명, 저런 흔적을 봤다고 했죠? 거기가 어딥니까? 누가 이런 흔적을 남긴 거죠?”

젠느는 잠시 망설이긴 했지만 순순히 대답해 줬다. 다란툼에서 이곳 델카로 오던 중 만난 상인들의 마차 뒤쪽 휘장에 이런 흔적과 비슷한 핏자국을 본 적이 있다고. 그리고 그 마차에는 대 몬스터용 장비로 중무장하고 있는 중년사내 셋과 소년 하나, 그리고 소녀 하나가 타고 있었다고 말이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팔바가 불쑥 끼어들며 덧붙여 말했다.

“그들은 범인이 아닐 거요. 당시 마차에서 젠느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보기 힘들었겠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에는 두려움이 짙게 깔려 있었거든. 중무장을 하긴 했지만 중년사내 셋은 제법 노련해 보이는 몬스터 사냥꾼 정도로만 보였지, 저런 파괴적인 흔적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실력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소.”

그러자 사내는 피식 웃으며 곧바로 반문했다.

“소년도 하나 있었다고 했죠? 그 애의 눈빛에도 두려움이 깔려 있던가요?”

잠시 기억을 떠올리던 팔바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소년에 대한 기억은 별로 없소. 두려움에 찬 눈빛도 아닌, 그저 뭔가 생각하고 있는 듯 멍하니 서 있었을 뿐이었으니까.”

“수상쩍은 자를 발견하면 일단 탐색마법을 써서 관찰하는 게 순서 아닙니까?”

사내의 지적에 젠느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리 대단한 집단처럼 보이지 않았어요. 우리들이 접근하자 두려움에 질려 뭔가 수군거리며 우리들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으니까요.”

그러자 사내는 답답하다는 듯 벽면의 흔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걸 보세요. 저건 마법이 아니라, 아주 강력한 검식이 훑고 지나간 흔적입니다. 이렇게 좁은 실내에서 저런 강력한 검식을 전개했다는 것만 봐도 검을 휘두른 사람이 제정신이 아니란 건 단번에 알 수 있는 일이죠. 그 사람은 당황했던 겁니다. 좁은 실내에서 저런 강력한 검식을 썼으니 그 여파로 주변의 등불 따위는 단번에 다 꺼져버렸을 겁니다. 그런 상황에서 사방에서 적들이 몰려오고…….”

마치 눈앞에서 본 것처럼 자세히 설명하는 사내의 말을 팔바는 믿을 수가 없었다.

“설마…, 그렇다면 그 소년이 범인이라는 겁니까?”

그제야 말이 통한다는 듯 사내는 씨익 미소 짓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아주 흥미로운 아이죠. 저런 엄청난 검술을 구사할 수 있음에도 이런 흔적을 남긴 것을 보면 실전경험이 거의 없을 거라는 짐작을 할 수 있죠. 제 예상대로라면 아마도 이게 그 아이에게 있어서 첫 실전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아이 옆에는 검술에 대한 조언을 해줄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는 상황이고 말이죠.”

검흔을 다시금 뚫어져라 바라보던 사내는 입술을 혀로 슬쩍 핥으며 말을 이었다.

“정말 탐나는 인재로군요. 아이를 데려가면 단장이 아주 좋아하겠는데요. 큭큭큭…….”

음흉스런 표정으로 혼자 중얼거리며 키득거리고 있는 사내를 바라보던 젠느는 뭔가 떠올랐다는 듯 그에게 물었다.

“혹시…, 기사단 소속이세요?”

“호오, 상당히 감이 좋은 아가씨로군요.”

사내는 히죽 웃더니 계속 말을 이었다.

“제 소속에 대해서는 밝혀드릴 수 없음을 부디 이해해 주시길. 그리고 그 아이에게로 안내해 줄 것을 의뢰하겠습니다. 그에 대한 사례는 섭섭지 않게 하도록 하지요.”

젠느가 살짝 자신의 팔을 끌어당겼기에 팔바는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젠느가 수락하라는 듯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것을. 그녀의 생각은 알겠지만 팔바는 의구심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이를 찾을 자신은 있는 거야? 다란툼이 얼마나 넓고 복잡한데……?”

팔바의 물음에 젠느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아무리 넓고 복잡해도 시간을 들여 탐색마법으로 찾으면 돼. 마법사가 아닌 다음에야 탐색마법을 피해갈 수는 없을 테니까. 게다가 여기 이 기사분의 의뢰를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젠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팔바는 월터를 바라보며 정중하게 자신들을 소개했다.

“그 의뢰를 받아들이죠. 저희는 빛의 날개라는 5인 모험가 파티로 저는 리더인 팔바고, 이쪽은 젠느라고 합니다.”

“월터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월터는 팔바나 젠느가 자신을 알카사스의 기사로 착각하고 있다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하지만 굳이 그들의 오해를 바로잡아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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