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의 검술이 사라지기 전에
“나를 찾았다고?”
무표정한 잭의 물음에 코비 지부장은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두려움을 밖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노력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이미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예, 어르신. 이곳에서의 임무도 다 끝나셨는데, 굳이 그런 허름한 여관에 묵고 계실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미 좋은 데로 숙소를 잡아뒀습니다. 지금 당장 그쪽으로 옮기도록 하시죠.”
코비 지부장의 제안에 라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필요 없다. 이제 요새로 돌아가야지.”
“그러지 마시고 다만 며칠이라도 푹 쉰 뒤 돌아가시죠. 제가 기가 막힌 계집들이 있는 곳을 잘 알고 있는데……. 마음에 꼭 드실 겁니다.”
라이는 손을 내저으며 짜증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됐다. 나는 그런 거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까.”
물론 라이 역시 코비 지부장의 달콤한 권유에 마음이 동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아직까지 그런 곳엔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저들은 지금 자신을 대단한 실력의 노회한 암살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술집에 가서 미모의 여자들을 옆에 앉힌다면 과연 어떻게 되겠는가? 아직 여자의 손조차 잡아보지 못한 자신으로서는 어리버리할 건 뻔했고, 설마 하는 의구심을 저들이 갖게 될 게 분명했다.
그걸 알면서도 코비 지부장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는 아주 곤란했다. 하지만 이런 라이의 속마음을 알 리 없는 코비 지부장은 자신의 제의를 단칼에 거부하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이런 달콤한 제의를 곧바로 거부해 온 건 잭이 처음이었으니까.
“아, 그, 그러십니까? 그, 그럼 어떤 걸 좋아하시는지? 혹시 돈이 필요하신 건……?”
“너무 신경 쓸 거 없다. 내가 오랫동안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이런 젊은 모습으로 위장해 상대를 방심하게 한 것도 있겠지만, 그런 쓸데없는 데 관심을 갖지 않은 면도 아주 크니까.”
라이는 짐짓 자신이 아주 나이가 많은 것처럼 말했다. 속으로 좀 켕기는 건 사실이었지만, 자신을 이리로 데리고 온 조장들을 비롯해서 모두가 자신의 나이가 많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상대가 자신의 착각이 맞다고 생각하도록 놔두는 게 유리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꺼낸 말이었다.
“아, 예. 어르신의 깊으신 뜻도 몰라 뵙고…….”
“그런 건 됐고, 나하고 같이 왔던 녀석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설마, 지금 당장 델카로 돌아가시려는 건……?”
“이곳에 죽치고 앉아 있을 이유가 없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코비 지부장은 재빨리 주변에 대기하고 있던 소년에게 물었다.
“델카에서 온 손님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하지만 소년이 채 대답하기도 전에 라이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됐다. 임무도 끝났으니 어딘가에서 신나게 퍼마시고 있겠지. 나는 릴리와 먼저 돌아갈 테니, 그 녀석들은 천천히 돌아와도 된다고 전해라.”
“그, 그럴 수는…….”
“괜찮다. 여기 올 때야 지부의 위치를 모르니 안내를 받아야 했지만, 델카로 돌아가는 것까지 그 녀석들의 안내를 받을 필요는 없으니까.”
라이는 돌아서면서 릴리를 보고 말했다.
“릴리, 이제 출발하자.”
“그, 그렇게 갑자기 가신다고 하시면 제가 너무…….”
코비 지부장은 급한 김에 품속에 손을 넣어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 있던 예비 돈주머니를 꺼냈다.
“이거 얼마 되지는 않습니다만, 돌아가시는 길에 여비에 보태 주십쇼.”
사실, 반나절만 걸어가면 되는 거리였기에 여비라고 해 봐야 그다지 필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코비 지부장이 건네준 돈주머니는 꽤나 묵직한 것이었다. 그의 직업 특성상 불시에 긴급 상황이 터졌을 때를 대비해서 간직하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이다.
“흠, 자네 성의를 봐서 받아주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어르신. 좀 더 시간이 있었다면 제가 근사한 곳으로 모셨을 텐데…, 이렇게 급하게 돌아가실 줄은…….”
“괜찮아. 임무를 마쳤으니 빨리 두목에게 돌아가서 보고도 해야 하고……. 그런데, 이리로 올 때 타고 왔던 마차는 지금 어디에 있지?”
마차의 행방에 대해서 물어올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인지 일순 코비 지부장의 안색이 핼쑥하게 변했다.
“어르신께 피, 필요한 마차였습니까?”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어디 있는지만 말하면 돼.”
코비 지부장은 난처한 듯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실대로 보고했다.
“그냥 팔아 버리면 된다고 해서…….”
“누가?”
“해리슨…, 어르신을 여기로 모시고 온 조장 중 한 명인 해리슨 녀석이 그랬습니다요. 저는 혹시 나중에 필요하실지도 모른다고 말렸습니다만, 그 녀석이 하도 우기는 바람에…….”
사실은 지부에 마차를 놔둘 곳도 없었기도 했지만, 잭이 릴리를 이렇게 오랫동안 데리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저 임무가 끝날 때까지 그녀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붙잡고 있는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기에 임무를 끝내고 잭이 돌아가면, 그녀를 죽여 입을 막아버리든지 아니면 사창가에 팔아넘길 생각이었던 것이다.
“이미 처분해 버렸다면 어쩔 수 없지. 그럼 나는 이만 가보겠다. 너도 협조해 주느라 수고가 많았다. 내 두목에게 너에 대해 잘 말해주도록 하지.”
뜻밖의 라이의 말에 코비 지부장은 황송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가, 감사합니다. 어르신.”
릴리와 함께 요새도시 델카를 향해 걸어가고 있긴 했지만, 라이는 델카로 돌아갈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란툼으로 오기 전의 자신과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실력이 급성장해 버렸다는 것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신분증 따위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거 없어도 발길 가는 데로 어디든 갈 수 있었으니까. 예전에 그토록 무섭게만 보였었던 병사들이 자신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한다는 걸 이미 체험하지 않았던가.
라이는 문득 고개를 뒤로 돌려 뒤따르고 있는 릴리를 힐끗 바라봤다. 물론, 릴리를 데리고 떠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데나 내던지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두목한테 부탁하면 되겠지.’
자신이 다란툼을 향해 떠나지만 않았다면 릴리의 아버지가 죽지도 않았을 거다. 물론 그 책임을 자신이 질 이유는 없었지만, 순진하고 착한 릴리에게 그 정도 은혜는 베풀어 주고 싶었다. 다란툼으로 왔기에 자신이 이렇게까지 급성장할 수 있었으니까.
또 한 가지 델카로 돌아가려는 이유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수련을 할 장소가 필요했다. 다란툼에서처럼 남의 집 지붕 위를 뛰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한적한 장소가 필요했다. 그리고 수련하는 동안 필요한 각종 물품들을 보급받을 수 있으면 더욱 좋지 않겠는가.
라이는 자신도 올란도처럼 강해질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싹트고 있었다. 그때, 난공불락의 성벽 위로 단신으로 도약해 들어가 적을 학살해 버리는 올란도의 신위를 보며 얼마나 경악했었던가. 영웅담에 나오는 용사를 보는 것만 같았었다. 도저히 올려다볼 수도 없는 천외천의 영웅.
하지만 막상 해보니 성벽을 도약해서 올라가는 것쯤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중무장한 샐러맨더 파 조직원 수십 명을 가볍게 짓이겨 놓기까지 했다.
자신에게는 훌륭한 스승도 없고, 검술을 수련할 때 조언해 줄 사람도 하나 없다. 하지만 이번에 다란툼에서 샐러맨더 파와 싸우며 꿈속의 검술을 수련하는 데 있어서 자신이 틀린 길을 가는 것 같지는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꿈속의 검술이 뇌리에서 사라지기 전에 완전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기억이라는 건 언제 잊어버리게 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오크 굴에서 그토록 개고생을 했던 때로부터 몇 년 흐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그때의 기억이 희미해져 가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