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은 그거뿐이…, 야?”
알리는 꽤 탄탄한 경력을 갖추고 있는 중간보스급이다. 더군다나 예전부터 박스터와 친하게 지냈었기에, 그가 두목이 된 이후 그의 위치는 다른 중간보스들보다는 약간 더 윗줄에 놓여 있다고 봐야 했다. 그에 비해 잭은 이제 채 스무 살도 되지 않은 새파란 애송이다. 두목의 지시에 따라 그를 데리고 나오며 무심결에 말을 걸었는데, 끝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찜찜한 것이다.
잭의 겉모습은 저렇게 어려 보여도 단신으로 샐러맨더 파를 박살 내 버린 괴물이다. 더군다나 두목과는 야자하며 말을 놓고 있는 걸 옆에서 봤지 않은가. 그런 사람한테 반말을 해도 괜찮을까? 혹시 나중에 시비를 걸기라도 하면 어쩌지?
하지만 다행히도 알리의 우려와 달리 잭은 담담하게 맞받았다.
“응. 원래 이리로 들어올 때부터 빈털터리였어.”
“산채에서는 얼마나 지낼…, 건데?”
“아직 계획은 없어. 일단 한 달 정도 있어 보면서 생각해 봐야지.”
“한 달이나 있을 거면 준비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겠…, 네.”
알리는 곰처럼 생긴 것과 달리 꽤 꼼꼼하게 준비물을 챙겨 줬다. 한 달이나 있어야 하는 만큼 음식물이 부패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바짝 말린 건조식량으로 준비하지 않으면 그 양이 엄청나게 많아진다.
다행히도 산채 안에는 기본적인 살림도구들이 있었고, 만일을 대비한 비상식량도 넉넉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그 때문에 알리는 산채에 비축되어 있지 않은 걸 위주로 해서 구입했다. 라이로서는 그곳에 어떤 물품이 있는지를 알 수가 없었기에, 모든 건 알리가 앞장서서 처리했다.
알리의 안내를 받으며 거의 다섯 시간 동안 산길을 걸은 후에야 산채가 있다는 커다란 바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쪽에 산채가 있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겠어?”
하루 종일 함께 하며 얘기를 나눴기에 알리의 말투는 어느덧 자연스럽게 바뀌어 있었다. 어쩌면 아예 생각하기를 포기한 것일지도…….
알리가 가리키는 방향을 아무리 봐도 인공적인 구조물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알리가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 만했다. 이렇게 코앞에 접근했는데도 불구하고 외부인이 봤을 때, 산채라는 것을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어 놨으니까.
“모르겠어. 어디야?”
알리는 바위 옆 귀퉁이에 있던 덤불더미를 옆으로 치웠다. 그러자 거기에 가려져 있던 작은 동굴 입구가 드러났다. 덤불더미를 아주 꼼꼼하게 이어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만들어 놨기에 이게 동굴 입구를 가리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목이 ‘넓적바위 동굴’이라고 하더니, 산 위쪽에 있는 바위틈에 나있는 작은 동굴을 개조하여 산채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아주 교묘하게 잘 만들었네.”
“기가 막히지? 자, 안으로 들어와 봐. 더 놀라게 될 테니까.”
입구가 작았기에 동굴 안으로 기어서 들어가야 한다는 게 단점이긴 했지만, 위장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 이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리라. 앞서 들어간 알리를 따라 동굴 안으로 기어들어가니, 칠흑과도 같은 암흑이 기다리고 있었다.
“잠깐만 기다려. 불 켤 테니까.”
탁탁 부싯돌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고 잠시 후 주위가 환히 밝아졌다. 동굴 안쪽은 기대한 것보다 훨씬 더 넓었다. 이 정도 넓이라면 다닥다닥 붙어 눕는다면 10여 명쯤은 충분히 잠을 잘 수 있을 정도였다.
알리는 방금 들어왔던 동굴 입구 쪽에 드리워져 있는 가죽휘장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일단 들어오면 저 휘장을 잘 펼쳐서 안쪽의 빛이 동굴 밖으로 새나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해. 낮에는 별 상관없겠지만, 밤이 되면 바로 들통 날 수 있거든. 아래쪽에 보이는 산길은 생각보다 꽤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이야.”
“주의하지.”
동굴 안을 쓰윽 둘러보던 라이의 눈에 한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아궁이가 보였다. 시커먼 숯덩이가 깔려있는 걸 보면 여기서 불을 피워도 되는 모양이다.
“저기에다가 불 피워도 되는 거야?”
라이가 물어보기를 기다렸다는 듯, 알리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물론이지. 여기다가 불을 피울 수 있도록 만드는 데 얼마나 고생을 했다고. 아궁이 안쪽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그 위쪽을 봐봐.”
과연 아궁이 위쪽에는 사람 하나가 간신히 기어 올라갈 수 있을 정도 넓이의 굴이 위쪽을 향해 끝도 없이 뚫려 있었다.
이 동굴이 자연동굴인 것을 손을 봐서 적당히 넓혀놓은 거라면, 위쪽으로 뚫려있는 작은 굴은 순수하게 사람의 노동력으로 뚫어 놓은 것이었다. 얼핏 봐도 수십 미터는 넘게 파낸 것 같았다. 이 좁은 굴을 뚫는다고 얼마나 고생을 했을 것인지 상상도 되지 않았다. 도적질 몇 번 하겠다고 이런 엄청난 중노동을 감내하다니.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 존경스런 놈들이었다.
“산길에서는 볼 수 없는 곳으로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만들어 놨으니까 얼마든지 불을 피워도 괜찮아.”
“이거 만든다고 고생 꽤나 했겠네?”
“물론이지. 교대로 한 명씩 들어가서 하루 종일 팠는데도 한 달 이상 걸렸어. 우리가 만든 산채들 중에서 이거 만든다고 가장 고생했지. 하지만 보람은 있었어. 저 아래쪽으로 보이는 산길이 밀수꾼들이 지나다니는 주 통로거든.”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서 만들만도 했었군.”
알리의 말로는 이곳 외에도 여러 개의 산채들이 있는 모양인데, 요새에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세워져 있는 게 바로 이곳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산길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위치에 만들어져 있는 만큼, 위장에 엄청나게 신경을 써서 만들었다고 했다. 아주 중요한 산채인 만큼, 밀수꾼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주의해 줄 것을, 알리는 재삼 당부했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실험체를 인간으로 바꾼 건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로므렌은 생각했다. 몬스터로 실험할 때는 실험체가 제때 공급이 되지 않는 통에 실험이 중단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걸 10개나 되는 실험조들이 나눠 써야 했으니, 그 어려움이야 설명할 필요도 없으리라.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노예시장에만 가도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다. 그것도 원하는 성별과 연령별로……. 일차적으로 로므렌이 공급해 주길 원한 건 10대~20대 정도의 인간 200명. 남녀의 숫자는 동수인 게 좋겠지만, 수급이 힘들다면 약간의 차이 정도는 상관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가 원한대로 남녀 정확히 100명씩이 공급되어 왔다. 그것도 정해진 시간에! 이게 중요했다. 정해진 시간! 이 연구소에서 키메라 연구를 시작한 이래, 그가 원한 시간에 원하는 수량의 실험 재료를 공급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른 실험조들은 아직까지도 몬스터로 실험을 계속하고 있는 상황이다. 트롤의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기에 다섯 개 조는 트롤을 계속 연구하고 있었고, 2개 조는 오크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남은 2개 조는 주변에서 구하기 용이한 장갑도마뱀 같은 몬스터의 연구로 전환했다. 이 모든 게 트롤의 부족으로 인한 결과였다.
다른 실험조들이 실험체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연구를 진행하지 못하고 있을 때, 로므렌의 조는 실험체를 아끼지 않고 마음껏 소모하며 떠오른 모든 아이디어들을 실험해 볼 수가 있었다.
“실험체를 얼마든지 공급받을 수 있기에 큰 문제는 아니지만, 그래도 생존율이 너무 낮은 건 큰 문제로군. 200명씩이나 투입했는데도 약물을 견뎌낸 게 겨우 넷밖에 안 되다니…, 쯧쯧.”
“이제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적정 투입량을 찾아낸다면 점차 좋아지겠죠. 몬스터와 달리 의사소통이 된다는 게 커다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건 몬스터에게서는 겪어 보지 못한 최고의 강점이었다. 투약 후의 기분이라든지, 아니면 통증이 진행되는 상태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줄 수 있었으니까. 이제 겨우 200명밖에 희생하지 않았는데, 어느 정도 적정 투약량을 파악해 낸 것만 봐도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게 커다란 도움이 된 게 사실이다. 10명씩 투약하며 양을 조절했었는데, 19번째 조에서 1명, 마지막인 20번째 조에서 3명을 생존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내일 실험체가 도착할 수 있도록 협조는 구해놨겠지?”
“예, 조장님. 몇 번이나 확인했습니다. 이번에는 숫자를 좀 줄여서 50명만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곧바로 소모할 것도 아닌데, 200명이나 받아 봐야 관리하기만 귀찮죠.”
“내 생각도 그래.”
“아마 조만간 좀 더 정확한 투약량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사료됩니다.”
“그러길 바래야겠지. 참, 실험체는 될 수 있으면 살집이 좋은 놈들로만 골라서 보내달라고 요청했겠지?”
“물론입니다, 조장님. 만약 살찐 수컷이 없다면 암컷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최대한 살집이 두둑한 것들로 말입니다.”
생존에 성공한 것은 암컷 3, 수컷 1개체였다. 그중 수컷은 20회차 실험에 투입되었던 자들 중에서 가장 비대했던 녀석이다. 그것을 보고 로므렌은 한 가지 가설을 세웠다. 변신할 때 엄청난 영양분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남자에 비해 여자가 몸속에 훨씬 더 많은 지방질을 비축하고 있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어쨌건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이번에 실험을 해 보면 확실한 걸 알 수 있겠지.”
로므렌은 철창에 갇혀있는 실험체 넷을 바라봤다. 키메라로 제작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불완전한 개체들이다. 지금은 순종적으로 행동하고 있지만, 어떤 문제점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겨우 며칠밖에 안 되었는데도 모두의 몸이 눈에 띄게 홀쭉해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 비례해서 급속한 속도로 근육질이 발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여자 쪽에 비해, 남자 쪽이 더욱 왕성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근력은 매일 측정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조장님. 하루하루 급속도로 근력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특히, 수컷 쪽의 근력 증대가 아주 놀랍습니다.”
몬스터들은 원래 뛰어난 근육질의 신체를 지니고 있었기에 그 변화를 가늠하기 힘들었었다. 하지만 사람은 달랐다. 특히, 이곳으로 공급되어 오는 노예들은 10대 중반부터 30대 초반 정도 연령에만 해당된다면 최대한 저렴한 것들을 가려 뽑은 것들이다. 특출난 재능 따위는 지니고 있지도 않았고, 용모도 형편없다. 사내들의 경우 잘 발달된 근육질의 일꾼노예가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은 애당초 없는 것이다. 그 때문에 사내의 근육질이 발달하는 모습이 더욱 눈에 띄었던 것이리라.
부하는 열기 어린 어조로 보고했지만, 자료를 훑어보는 로므렌의 표정에는 별 감흥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몬스터의 경이적인 근력과 비교한다면 인간의 근력 따위 증대되었다고 해 봐야 별 게 아니었으니까.
“식사량 조절도 하고 있겠지?”
“예. 지시하신 대로 각자 분량을 조절하고 있습니다.”
“근육질이 얼마나 발달할 수 있는지도 알아야 하니까, 수컷에겐 원하는 만큼 충분히 먹이를 주도록 하게.”
“예.”
“지능에 대한 테스트 결과는 어떤가?”
“인간이었을 때와 별 차이가 없는 듯했습니다만…, 워낙에 무식하기 짝이 없는 노예들인 만큼 한계가 있습니다. 뭘 아는 게 있어야지 교육을 시키던지 말든지 할 게 아니겠습니까. 글자를 아는 놈도 하나도 없는 형편이라…….”
로므렌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뭐, 키메라에게 요구하는 지능이라고 해 봐야 별것도 아니니 그렇게 신경 쓸 필요는 없겠지. 저것들을 가지고 마법사로 교육시키려는 건 아니니까 말이야. 경비대에 말해 둘 테니, 저것들에게 무기술을 가르쳐 보도록 하게. 제대로 된 무기술을 익히게 할 수만 있다면 오크 따위보다는 수십 배 더 도움이 되는 키메라가 될지도 몰라. 안 그런가?”
“일단 가르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부탁하네.”
로므렌은 철창에 들어있는 실험체들을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키메라화에 성공시킨 건 겨우 넷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까지 테스트해 본 결과로는 오크보다 훨씬 더 많은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특히, 재료비가 저렴하다는 것은 엄청난 강점이었다.
“큭큭큭, 소장도 언젠가는 인정하게 될 거야. 내 말이 옳았다는 걸.”
로므렌은 자신이 있었다. 우선 시작이 좋았다. 겨우 200명 정도의 노예를 희생한 것만으로도 투약량의 적정수준을 찾아내는 데 거의 성공했다. 조만간에 소장이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을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