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육질 여검사의 정체
월터 일행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밤새 이동했다. 밤하늘은 너무나도 맑고 깨끗해서 수없이 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반짝이고 있었지만, 밤하늘을 바라보며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앞서가고 있는 지부장에게 불의의 사태가 일어나지는 않는지 경계하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는데, 자신들의 뒤를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뒤따라오고 있는 정체불명의 패거리에게도 주의를 게을리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맨 앞에서 따라오고 있는 사람은 근육질의 여검사였는데 가끔 이쪽을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앞뒤를 모두 신경 쓰면서 가는 건 너무 힘들어. 더군다나 상대가 저런 인물이어서야…….’
곧바로 공격해오지 않고 일정 거리를 유지하며 뒤쫓아 온다는 건, 최적의 상황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일대일의 상황에서 지형지물의 유불리를 따지는 건 그다지 의미가 없다. 기습당하는 게 아니라면 상호 동일한 조건에서 싸워야 할 테니까.
그렇다면 가장 현실성 있는 추론은 동료들을 기다리는 것일 것이다. 어쩌면 한 명일 수도 있고, 예전에 그가 기습당했듯 수십 명을 상회할 수도 있다.
저 멀리 앞쪽 어딘가에서 수십 명에 달하는 마법사 및 기사들이 만전을 다한 상태로 함정을 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천하의 월터로서도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상대도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게 분명해.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방법은 단 하나뿐이야. 함정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먼저 기습을 해서 적들의 수를 줄여나가는 것! 그렇다면 뒤를 따라오는 놈을 해치움과 동시에 앞으로 달려가 방심하고 있을 매복조를 기습해야겠군.’
월터가 내심 기습하기로 마음을 정했을 때, 옆에서 걷던 파벨이 말을 걸어왔다.
“머지않아 해가 뜰 겁니다. 해가 뜬 후로는 급속도로 기온이 높아진다고 하니, 이제부터 적당히 쉴 곳을 찾는 게 좋지 않을까요?”
“좋은 생각이야.”
‘녀석들도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겠지? 흐흐…….’
사막에 들어선 첫날, 이쪽에서 기습 공격을 가해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생활 패턴의 급격한 변화로 가장 피곤할 때다. 지금까지는 낮에 활동하고 밤에 잠을 잤었는데, 날밤을 꼬박 새웠지 않은가. 밤새 이동까지 해야 했으니 피곤이 가중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
물론 월터도 저 엄청난 근육질을 지닌 여자 같지도 않은 여자가 피곤을 느낄 거라는 기대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월터 자신 역시 피곤하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와 동행하고 있는 마법사들은 다를 것이다. 옆에 있는 파벨처럼, 강인하지 못한 그들의 육체는 지금쯤 극심한 피로를 느끼고 있을 게 뻔했다.
저 근육질의 여자와 달리, 동행하는 마법사들은 이쪽의 동태를 끊임없이 살펴보기 위해 마법을 지속적으로 써야 했을 것이고, 그것이 더욱더 정신적인 피로를 부채질했을 게 틀림없다. 어쩌면 지금쯤 꾸벅꾸벅 졸면서 낙타를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모든 예상은 월터의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램일 뿐이었지만.
“파벨.”
“예?”
자신을 바라보는 파벨에게 월터는 낙타의 고삐를 건네주며 지시했다.
“너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예? 그게 무슨 말씀…….”
월터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곧이어 파벨은 그가 한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월터는 낙타 안장 위로 훌쩍 뛰어오르더니 그대로 날아오르듯 도약했다.
낙타 안장에서 뛰어오른 것만으로 20여 미터나 건너뛸 수 있다니! 그것도 마법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 말이다. 파벨로서는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는 장면이었다.
월터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전속력으로 질주해 순식간에 멀어졌다.
그제서야 파벨은 자신과 함께 여행하고 있었던 사내의 진정한 정체를 비로소 파악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그는 마법사가 아닌, 그래듀에이트였던 것이다.
파벨은 급히 주문을 외웠다.
“클레어보이언스(Clairvoyance;천리안)!”
순간, 그녀의 시야가 확 밝아지며 월터가 달려가는 그 앞쪽 정경이 눈앞으로 다가오듯 확대되어 보였다.
저쪽은 아직 월터의 움직임을 눈치채지 못한…….
아니, 그게 아니었다. 모두 눈치채지 못한 듯했지만, 맨 앞에 있던 덩치 큰 사내가 안장에서 묵직해 보이는 커다란 검을 끌러 드는 게 보였다.
덩치와는 다르게 귀여운 외모의 사내 입가에는 가소롭다는 듯한 비웃음이 떠올라 있었다.
“눈치챘나?”
다음 순간, 월터와 덩치 큰 여자와의 격전이 시작됐다.
콰콰콰쾅!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주위를 휩쓸며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덩치 큰 여자의 동료들이 싸움에 가세할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충격파를 피해 급히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나는 게 보이는가 싶더니 곧이어 주위를 자욱하게 뒤덮는 짙은 모래 먼지! 먼지로 인해 시야가 앞을 가려 전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파벨은 자신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흘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다행히도 주변에 다른 적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지만, 저쪽 상황을 알 수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이 끼어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것.
그렇다고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있는 것도 문제다.
월터의 승리를 기원하며 멍하니 기다려야 하나, 아니면 잽싸게 도망쳐야 하나? 파벨로서는 고민되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제 또 다른 적이 나타날지 알 수 없는 만큼, 미지의 적을 단숨에 제압하는 게 최선이었다. 그래서 월터는 처음부터 자신이 가진 전력을 다해 기습할 작정이었다.
상대가 설혹 알카사스 최강의 검객이라 해도 자신이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고, 반 토막이 날 것을 월터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여인은 전격적으로 기습을 감행한 월터의 공격을 수월하게 막아냈다. 아니, 월터가 달리기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안장에서 검을 뽑아 든 것으로 봤을 때, 여인은 월터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고 봐야 옳았다.
‘젠장. 내 딴에는 기습이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상대의 함정에 빠진 건가?’
그도 그럴 게 지금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존재감이 처음에 저 여인을 포착했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옅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처음 봤을 때의 존재감은 자신이 뒤를 따르고 있다는 걸 월터에게 알리기 위해 일부러 강하게 흘렸다고 보는 게 맞으리라.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 기습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그게 상대가 파놓은 함정을 향해 달려든 것일 줄이야.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월터는 검을 휘두르면서도 재빨리 주위를 살펴봤다. 하지만 덩치 큰 근육질 여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그저 멀뚱히 싸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도대체 이 여자의 뭘 믿고 저런 태평한 얼굴들인 건지, 아니면 또 어떤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래. 이럴 때는 하나하나 적을 확실하게 없애는 게 최선의 방법이지.’
하지만 곧 월터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육질 여인 뒤쪽의 마법사가 싸움에 가담하기 전에 일단 이 여인부터 먼저 처리하려던 월터는 한두 차례 검을 맞부딪쳐 보는 것만으로도 여인이 사용한 검법이 뭔지를 알아챈 것이다. 워낙 유명한 검법이었으니 월터 같은 경험 많은 고수가 그걸 몰라볼 수가 없었다.
월터는 후속타를 가하는 대신 재빨리 뒤로 후퇴했다.
이때, 여인이 뒤쫓으며 공격을 퍼부었으면 난감한 상황이 되었겠지만, 다행히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근육질 여인 역시 월터와 검을 섞은 후, 그의 신분을 눈치챈 듯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근육질 여인은 월터의 뒤를 쫓아 반격을 하지 않고 제자리에 멍하니 서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코린트의 기사가 왜 나를……?”
사내 찜쪄먹을 만큼 단단하고 우람한 덩치! 저 두툼한 팔뚝만 해도 웬만한 사내들보다 훨씬 굵었다. 힘에 자신 있는 사내가 아니라면 아예 들고 다닐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 중검(重劍)의 대명사 바스타드 소드를 한 손으로 가볍게 휘두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크라레스의 정통검법.
이 모든 게 합쳐지면 떠오르는 크라레스의 유명한 무가(武家)가 있다. 바로 치레아 공국을 다스리고 있는 치레아 대공가였다.
치레아 대공가의 여자는 둘. 모녀 다 우람한 덩치를 지니고 있다고 들었다.
치레아 대공과 그 부인은 둘 다 소드 마스터인 만큼, 월터로서는 상대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상대는 월터와 거의 호각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 딱 들어맞는 인물은 단 한 명으로 좁혀진다.
“잠깐만! 더 이상 싸울 생각이 없습니다.”
월터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을 검집에 집어넣고 손을 들어 싸울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다급히 상대를 향해 입을 열었다.
“혹시…, 다이아……?”
“잠깐!”
근육질 여인은 월터의 말을 막으며 고개를 뒤를 향해 돌렸다. 그러자 그녀의 뒤쪽에서 지원을 위해 주문을 외우고 있는 여 마법사가 보였다.
근육질 여인은 여 마법사에게 손짓을 하며 명령했다.
“괜찮아. 주문 해제해.”
여 마법사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되물었다.
“괜찮겠습니까?”
“괜찮다고 했잖아!”
근육질 여인의 일갈에 여 마법사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숙였다.
“레이디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여 마법사는 주문을 취소하며 지금껏 모은 마나 덩어리를 공중을 향해 발산해 버렸다.
공중을 향해 날아가는 엄청난 빛 덩어리가 그녀가 얼마나 강력한 공격마법을 준비 중이었는지를 보여주었다.
근육질 여인은 낙타 안장에 매여 있는 검집에 자신의 바스타드 소드를 집어넣으며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월터에게 다가와 조용하게 말했다.
“여기는 보는 눈이 많군요.”
월터는 금방 그녀가 원하는 바를 파악했다.
자신을 쏘아보는 여 마법사와 달리, 저쪽에서 긴장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상인 둘과 그의 호위 둘은 일행이 아닌 모양이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두 사람은 함께 다른 사람들의 이목이 닿지 않는 곳으로 걸어갔다.
슬쩍 주위를 둘러본 월터는 목소리를 낮춰 근육질 여인에게 물었다.
“혹시, 다이아나 폰 치레아 공작 영애십니까?”
근육질 여인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월터는 깊숙이 고개를 조아렸다.
“레이디 다이아나, 적으로 착각하고 다짜고짜 공격부터 한 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다이아나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생긴 것만큼이나 털털한 어조로 말했다.
“뭐, 살다 보면 실수를 할 수도 있죠. 그런데 코린트의 기사가 이 황량한 사막에는 어쩐 일로 오신 거죠?”
월터가 그녀의 검술이 크라레스의 것임을 알아봤듯, 다이아나 역시 월터의 검술이 코린트의 것임을 알아본 모양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정체를 대충은 짐작하고 있을 게 분명하기에 월터는 솔직하게 자신의 소속과 신분을 밝혔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코린트 제국 제2근위대에 소속되어 있는 월터 드 페레즈 백작이라고 합니다.”
“페레즈 백작이셨군요. 이런 먼 타국까지 와서 코린트의 기사분을 만날 거라고는 짐작도 하지 못했네요.”
“저 또한 이런 곳에서 레이디 다이아나를 만나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변명 같지만 얼마 전에 알카사스에서 큰 곤경을 당한 후였기에, 이번에는 당할 수 없다는 생각에 선제공격을 가한 것이었는데…….”
월터가 굳이 알카사스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타국의 귀족에게 대략이나마 설명해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말도 없이 선제공격을 가한 것에 대한 해명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그만한 신분을 지닌 고위 귀족이었으니까.
크라레스라면 코린트와 거의 쌍벽을 이루는 강국이다. 물론 전체 국력으로 따진다면 코린트가 월등했지만, 크라레스는 드래곤의 비호를 받고 있다. 드래곤과의 인연은 초대 치레아 대공의 업적이었고, 그로 인해 크라레스의 양대 공작가라 할 수 있는 스바시에 공작가와 치레아 공작가 중에서 치레아를 한 수 위로 꼽고 있었다.
더군다나 치레아 공작가는 공작은 물론이고 공작 부인까지 둘 다 소드 마스터였고, 웬만한 군소국가의 전력보다도 강한 독립기사단까지 보유하고 있는 전무후무한 가문이었다. 그런 가문의 영애라면 왕족이나 다름없다.
그렇기에 그녀 정도의 신분이라면 아무리 월터가 코린트의 근위기사지만 하대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게다가 적인 줄 알고 기습 공격까지 했으니, 다이아나가 뭐라 한들 할 말이 없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월터였기에 격의 없는 다이아나의 언행에 상당한 호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