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의 대략적인 설명을 들은 다이아나는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내가 만약 페레즈 백작이었다고 해도 이런 상황이라면 불문곡직하고 기습공격을 가했겠네요.”
“그런 사유로 인해서 송구하지만, 레이디께서 호위도 거느리지 않고 몰래 암행하시는 이유를 말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다이아나 일행이 여섯이긴 했지만, 실질적인 수행원은 여 마법사 하나뿐이었다. 다이아나와 같은 고위 귀족 영애의 호위로는 턱도 없이 적다. 게다가 다이아나의 말투로 봐서는 다른 사람들은 그녀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는 듯했다.
월터의 말에 다이아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아직까지도 나를 의심하는 모양이군요?”
월터는 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지만, 다시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용서하십시오. 레이디 같으신 분께서 이런 오지에, 그것도 호위도 제대로 거느리지 않고 와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는 점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것도 그냥 오지도 아니고, 최근 끊임없이 수상쩍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티투스 대사막에서 말이지요.”
다이아나는 피식 미소 지으며 물었다.
“내가 대답하지 않겠다면?”
그러자 월터는 난처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식적인 외교 사절을 파견해 귀국을 추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귀국과 연관이 있는 게 아니냐고 말이지요.”
외교 사절을 파견해 추궁한다는 말에 순간 다이아나의 미소가 짙어졌다. 미소의 의미는 뻔했다. 가소로운 것이다.
“호오, 감히 나를 추궁하시겠다? 과연 백작께 그만한 권한이 있는지 모르겠군요. 오히려 내가 묻겠어요. 백작께서 이곳에 있는 이유를 밝혀주세요. 안 그러면 아버지를 통해 귀국의 로체스터 공작께 공식적으로 항의를 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덧붙여 백작께서 아무런 경고도 하지 않고 날 기습했다는 것도 포함되어야 하겠죠.”
다이아나의 지적에 월터는 자신이 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쨌거나 실수한 쪽은 자신이었으니까.
헐레벌떡 달려온 파벨이 두 사람에게 도착한 건 그때쯤이었다.
파벨은 모래 먼지가 어느 정도 가라앉자 월터가 근육질 검사와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상황이 어떤 방향으로 급변할지 모르기에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서 월터를 지원하기 위해 공격마법 주문을 외우며 달려온 것이다.
그녀가 공격 목표로 잡은 건 우람한 덩치의 근육질 검사가 아닌, 뒤쪽에 서 있는 여 마법사였다.
파벨이 도착했을 때, 그녀의 예상과 달리 두 사람은 계속 대화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미 불덩이가 완성되어 버린 상태라는 점이다.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를 모르니 이걸 애초 생각대로 저쪽 여 마법사를 향해 날려버릴 수도, 그렇다고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쉬운 노릇이 아니기에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월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최근 사막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상 기류에 대해 조사해 보라는 근위대장님의 지시를 받고 움직이고 있던 차였습니다.”
월터의 말에 우람한 덩치의 근육질 검사는 고개를 끄떡이며 대꾸했다.
검사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파벨은 그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마법주문 외우랴, 공격 목표인 여 마법사의 행동을 살피랴 정신도 없었지만, 그만큼 여자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그녀의 덩치가 크고 거대했기 때문이다.
“과연, 코린트 쪽에서도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군요. 나도 사실 아버지의 명에 따라 그걸 조사하기 위해 온 거예요.”
“레이디 다이아나께서 직접 말씀이십니까?”
레이디 다이아나……? 저 오크만한 덩치의 여자가 귀족 영애라는 말에 경악한 파벨은 하마터면 마법제어에 실패해 폭사할 뻔했다.
그녀는 서둘러 불덩이를 하늘 위로 날려버렸다. 이대로 계속 마법을 유지하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파벨 혼자서 화염 마법으로 쇼를 한 셈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사람들의 이목은 대화를 주고받는 두 사람에게로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파벨은 어이가 없다는 듯 근육질 여검사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봤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가 그리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나름 귀여운 축에 들어가는 얼굴일 수도. 하지만 시선을 조금만 얼굴 아래로 내리면 사내 못지않은 굴강한 육체와 섞여 강인한 인상으로 바뀌어 버린다.
파벨은 작금의 현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지금껏 그녀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귀족 영애의 모습은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무도회에서 춤추는 가녀리고 예쁜, 사내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그런 여자였지, 오크조차 맨주먹으로 때려잡을 수 있을 듯한 근육질의 여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이아나는 사내 못지않은 털털한 어조로 대답했다.
“나는 그리 나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리고 사막지대에 그리 대단한 적수가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말이죠. 방금 전에 검을 나눠봤으니 백작께서도 잘 아실 텐데요?”
백작……? 뭐, 윗사람으로부터 하늘 같은 신분을 가진 분이라는 얘기는 들었으니 월터가 귀족이라는 것이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저 사내 같은 귀족 영애의 신분이 뭣이기에 자신에게조차 숨기고 있던 신분을 밝힌 것인지 파벨로서는 흥미가 동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과 달리 파벨은 귀를 바짝 기울여 둘 간의 대화를 엿듣기 시작했다.
월터는 그녀의 오해를 사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말했다.
“레이디 다이아나의 실력을 제가 어찌 의심하겠습니까. 하지만 지금껏 사막 저 안쪽으로 정탐을 나섰던 저희 쪽 요원이 단 한 명도 살아서 나오지 못했으니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중에는 오너도 있었거든요.”
다이아나? 오크처럼 커다란 덩치에 근육질 여자의 이름으로는 너무나도 여성스럽고 예쁜 이름이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 이름이 그다지 낯설지 않았다. 커다란 덩치와 여성스러운 이름, 이런 절묘한 대비를 보이는 인물이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게 언제였더라?
곧이어 파벨은 기억 한구석에서 예전에 첩보원 과정을 이수할 때 각국의 중요 인물에 대한 인적사항을 교육 받았던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히익!”
파벨은 급히 손을 들어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이아나 폰 치레아 공작 영애. 그 사람임에 틀림없다. 대코린트 제국의 백작이 고개를 숙여야 할 만큼 높은 지위를 지닌 영애는.
순간 오랜 시간 정보를 다뤄온 요원으로서 파벨의 눈은 더욱더 호기심으로 불타올랐다.
타이탄을 보유한 기사조차 살아서 돌아오지 못했다는 건 다이아나로서도 의외였던 모양이다.
“아, 그래서 제2근위대가 투입된 거로군요?”
다이아나의 신분도 충격이었지만, 월터의 신분은 파벨에게 더욱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물론 백작이 고위 귀족은 맞지만, 제국에 속해 있는 백작의 수는 생각 외로 많았다. 하지만 제2근위기사는 다르다. 제국 최고의 정예라는 황제 직속의 근위기사.
기습을 하기 위해 달려가던 모습과 경천동지할 정도의 충돌 장면을 보고 실력이 범상치 않은 기사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그 이름도 드높은 근위기사일 줄이야…….
“저야 원래 이런 험한 일을 수행해 왔던 사람입니다만, 레이디 같은 고귀한 분께서 호위기사 하나 거느리지 않고 저곳으로 들어가신다는 건 너무나도 위험하다고 사료됩니다만…….”
그러면서 월터는 다이아나 뒤쪽에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 마법사에게로 시선을 돌려 물었다.
“그쪽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여 마법사는 월터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다이아나에게 바짝 다가서서 낮지만 빠른 어조로 속삭였다.
“페레즈 백작의 지적이 옳습니다. 최소한 본국에서 호위기사라도 몇 명 불러들이신 후에 움직이시는 것이…….”
하지만 다이아나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녀의 표정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러고 있을 시간이 어디 있어?”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는 만큼 호위기사들이 도착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혹시라도 이곳의 위험성을 안 부모님이 호위기사를 보내지 않고 곧장 되돌아오라는 명령을 내릴 수도 있었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다이아나는 여 마법사에게 퉁명스레 대꾸해 입을 틀어막은 후, 월터에게로 시선을 돌려 제안했다.
“서로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여기로 왔으니, 함께 동행하는 것은 어떨까요? 페레즈 백작이시라면 내 뒤를 맡길만하다고 생각되기에 드리는 제안이에요.”
월터로서는 다이아나의 제안이 솔깃한 게 사실이었다. 실력도 상당히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잠시 얘기를 나눠보니 심성도 꽤 괜찮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예의상 깍듯이 존대를 해주고 있긴 했지만, 상대가 감히 자신에게 조건을 거론한다는 것에 재미있어하며 다이아나가 물었다.
“뭔가요?”
“신분이 노출되지 않도록 앞으로는 월터라고 불러주십시오. 그리고 제 일행은 파벨이라 합니다. 좀 어리숙해 보이긴 합니다만, 정보부에서 오랜 시간 일해 왔던 만큼 서쪽 대륙 사정에 아주 밝습니다. 게다가 사막 부족의 언어나 서쪽 대륙 언어도 조금 알고 말이죠.”
“좋아요. 그렇다면 나는 「셀리나」라고 불러주세요. 여기서는 모두들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요. 다이아나라고 하면 내 신분을 알아차릴 사람이 꽤나 많기에…….”
다이아나는 파벨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파벨도 어느 정도 내 신분을 눈치챈 것 같지 않나요?”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이 월터는 그녀의 말이 맞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오크만한 근육질 몸매를 지닌 여성에게 코린트 제국의 백작인 자신이 고개를 숙일 만한 사람이 그리 흔한 건 아니니까.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쪽은 제 동료 라디아 콜린스예요.”
제2근위대가 특수작전을 주로 하는 만큼, 주요 국가들의 상층부 인물들에 대한 인적사항은 언제나 숙지하고 있었다. 언제 전장에서 만나게 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라디아 콜린스. 정확하게는 라디아 폰 콜린스 백작. 치레아 기사단의 정규 멤버로, 궁정마법사급의 실력을 지니고 있다고 월터는 알고 있었다.
다이아나 뒤쪽에 서 있던 여 마법사가 쌀쌀맞은 표정으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라디아라고 불러주세요.”
다이아나는 저 멀리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동행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들은 내 신분을 몰라요. 상인들은 통역을 위해 함께 가고 있던 중이었고, 두 명의 호위는 그들이 알카사스의 길드에서 고용한 용병들이에요. 그러니 말조심해 주길 바래요.”
“걱정 마십시오. 셀리나 님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월터가 살짝 고개 숙이며 깍듯이 말했지만, 다이아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월터가 조건을 먼저 달았으니, 나도 조건을 걸겠어. 신분 노출을 방지할 목적이라면 나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도 이상하지 않아? 앞으로는 셀리나 님이 아닌, 셀리나라고 불러. 그게 안 된다면 따로 움직여.”
잠시 망설였지만, 월터는 한숨을 푹 내쉰 후 다이아나의 조건을 받아들였다.
“알았어, 셀리나.”
“파벨은?”
“그…, 저…….”
월터조차도 잠시 주저했을 정도로 다이아나의 신분은 범상치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평민 신분인 파벨이 반말을 한다는 건 정말 무리한 요구였다. 그것도 파벨처럼 새가슴의 여자로서는 더더욱.
보다 못한 월터가 슬쩍 끼어들었다.
“파벨이 좀 낯을 가려서 말이야.”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거리고 있는 파벨의 어깨를 토닥이며 월터가 설득했다.
“괜찮아. 셀리나에게 말을 놓는다고 네가 불이익을 받을 일은 없으니까. 오히려 이런 경우는 반말을 하지 않는 게 문제지. 자, 한 번 이름을 불러 봐. 못한다면 너를 돌려보낼 수밖에 없다는 걸 명심하고.”
파벨은 난처하기 짝이 없었지만, 월터의 은근한 압박에 간신히 입을 열었다.
“아, 알았어, 셀리나.”
다이아나는 잇몸이 훤히 드러나도록 크게 웃으며 말했다.
“파벨, 한동안 잘 지내보도록 하자.”
“…….”
제대로 대답을 할 수 없었던 파벨은 애써 웃는 모습으로 응답하려 했지만, 그녀의 얼굴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