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85화 (881/930)

라이는 당혹스런 마음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근래 그는 무적이었다. 수많은 사람을 학살하며 살인의 광기에 젖어보기도 했고, 산맥 안에 들어앉아서는 그때의 깨달음을 토대로 몬스터들을 상대로 검술을 갈고 닦았다.

그 과정에서 과거 자신에게 절망을 안겨줬었던 숲의 유령, 트롤까지 단칼에 산산조각 내버리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라이는 자신이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에게 무적이라는 자신감을 안겨줬던 검술은 그 사내에게는 전혀 먹혀들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죽음을 각오해야만 하는 최악의 상황으로까지 내몰렸었다. 적을 죽이지 못하면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세상이었으니까.

하지만 또다시 자신은 살아났다. 무엇보다 꿈을 꾼 게 아니라는 건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말해주고 있었다. 가죽갑옷은 물론이고, 그 안쪽에 입고 있던 옷까지 섬뜩하게 잘려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주위를 흠뻑 적시고 있는 검붉은 피는 아직 채 마르지도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옷이 잘린 부위의 피부에도 피가 흠뻑 묻어있긴 했지만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하다는 점이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는 게 문득 떠올랐다.

광기에 찬 눈빛으로 떼 지어 달려들던 키메라들! 라이는 그놈들과 목숨을 건 처절한 접전을 벌였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는지 자신이 눈을 떴을 때, 키메라는 단 한 마리도 보이지 않고 혼자 숲속에 벌거벗은 채 누워있지 않았던가.

온몸에 잘게 찢긴 키메라의 살점과 검붉은 피, 그리고 뭔지 모를 오물들을 흠뻑 뒤집어쓴 것만 봐도 얼마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에도 이해할 수 없었던 건 그토록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기억이 어느 한순간을 기점으로 전혀 남아있는 게 없었고, 지금과 마찬가지로 몇 번이고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것 같은데 눈을 떴을 때는 작은 상처 하나 없이 멀쩡했다는 점이다. 그토록 무시무시했던 키메라들을 상대로 말이다.

그때는 다급히 도망치는 것에 정신이 팔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넘겼었는데, 또다시 같은 일이 반복되다 보니 의아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라이는 풀이 죽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나…, 설마…, 사람이 아닌 건 아니겠지?”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어머니가 있었다고 했고,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함께 살았었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아직까지도 생생했다. 자신이 알기로 아버지가 사람이 아닌 흡혈귀나 늑대인간 같은 인간형 몬스터는 분명히 아니었다. 혹시 친자식이 아니라 어딘가에서 주워다가 기른 양자였을까? 그럴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촌장(?)을 따라 이주해 온 주위 이웃들이 어머니를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고, 그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태어났음을 증언하고 있었으니까.

“아냐. 그건 아닐 거야.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려 봐도 내가 주워온 자식이거나 아버지가 이상한 몬스터가 아님은 분명해.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는데…….”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죽을 정도의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도 곧바로 재생하며 살아나던 키메라들! 어쩌면 그놈들을 죽이는 과정에서 튄 핏방울 중 하나가 입으로 들어와 자신도 키메라화 되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겨우 피 몇 방울을 먹었다고 해서 키메라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하지만, 당시 봤었던 키메라들과 같은 무시무시한 재생력이 자신의 몸에서도 일어나고 있는 건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라이는 날카롭게 베어져 나간 가죽갑옷을 바라보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나…, 키메라가 되어버린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외에는 납득할 만한 이유가 없었다.

일생일대의 기회

“여긴가?”

“예, 두목. 저 아래쪽에 계십니다.”

박스터의 질문에 부하가 가리킨 곳은 다리 밑의 어두운 공간이었다. 박스터가 눈에 힘을 주어 자세히 살펴보니 작은 항아리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고 그 옆에 잭이 죽은 듯이 누워있었다.

잭을 발견하자 치밀어 오르는 기쁨도 잠시, 박스터는 눈살을 찌푸리며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새끼! 이런 데 처박혀 있었으니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지.”

박스터가 잭을 애타게 찾았던 이유는 워커가 원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에 가게에서 밀실로 자신을 데려간 워커는 잭만 넘겨준다면 칼릭스처럼 뒤를 봐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워커가 속해 있을 정도의 거대 조직이 뒤만 봐준다면 이곳 요새도시 델카의 암흑가를 주름잡는 것도 그다지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바친 보석과 마법 아이템을 조직을 재건할 수 있도록 돌려주겠다고까지 했다.

하지만 만약 잭을 넘겨주지 않는다면 아예 조직 전체를 말살시켜 버리겠노라고 으르렁거렸다. 그러니 박스터로서는 눈에 불을 켜고 잭을 찾아다녀야 했던 것이다.

다리 밑으로 내려가 보니 잭은 술에 취해 깊이 잠들어 있었다.

주변에 나뒹굴고 있는 항아리만 해도 거의 다섯 개. 결코 작은 항아리가 아니기에 그 많은 술을 다 마셨다는 게 불가사의하게 느껴질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코를 막고 싶을 정도로 지독한 술 냄새를 풍기며 쭈그리고 자고 있는 모습을 보니 패배의 충격이 그만큼 컸던 모양이다.

자세히 보니 아직 앳된 모습에 안쓰럽기도 했지만 박스터는 애써 그런 나약한 생각을 몰아냈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것이다. 조직을 위해서 그 어떤 감언이설을 동원해서라도 잭을 워커에게 넘겨야만 했다.

“이봐, 이봐, 좀 일어나 봐!”

아무리 잭을 흔들어 봤지만 얼마나 깊게 잠들었는지 깰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짜증 난 박스터는 주변에 굴러다니고 있던 빈 항아리 하나를 들어 다리 밑을 흐르는 물속에 푹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그 물을 잭의 얼굴에 들이부었다. 마을의 온갖 음식 찌꺼기와 분뇨가 흘러나가는 물인 만큼 더럽기 짝이 없었지만, 박스터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자기가 마실 것도 아니었으니…….

“읏, 차거!! 이게 뭐야?”

엉겁결에 잠에서 깬 라이는 얼굴에 흘러내리는 차가운 물을 대충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았다. 얼마나 오래 이곳에서 술에 취해 잠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리 밑에서 풍기는 퀴퀴한 악취에 코가 마비된 것인지 구정물 냄새는 전혀 느끼지 못했다.

“이제 잠이 좀 깨냐?”

“이게 무슨 짓이야!”

라이는 물 묻은 손바닥을 대충 옷에 문질러 닦으며 짜증어린 얼굴로 소리쳤다. 이런 짓을 한 게 두목만 아니었다면 박살을 내놨을 것이다.

하지만 박스터는 오히려 라이보다 훨씬 더 신경질적인 어조로 으르렁거렸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부상을 당해 도망치는 걸 보고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그런데 이런 곳에 숨어서 팔자 좋게 술이 떡이 되라 마시고 잠이나 퍼 자고 있다니…….”

성질을 내면서도 박스터의 시선이 자신의 상처 부위를 살피고 있다는 걸 눈치챈 라이는 더 이상 신경질을 낼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자신이 걱정되어 이렇게 달려온 것이었으니까.

“그건…, 미안해…….”

“치료는 했냐?”

“응. 대충.”

하지만 말과 달리 워커의 칼에 베어진 옷과 가죽갑옷에는 아직 검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건 라이가 자신이 혹시 키메라가 된 건 아닌가 하는 절망감에 피를 닦을 생각도 못하고 술을 마신 뒤 인사불성이 되어 잠이 들었기 때문이다.

“상처가 꽤 심각해 보이는데……?”

“걱정하지 마. 겉보기와 달리 상처는 심하지 않으니까. 그런데…, 그 사람은 어떻게 됐지?”

“워커 말인가?”

“그 사람 이름이 워커였나?”

박스터는 고개를 끄덕인 후 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자신을 아론 워커라고 하더군. 이런 촌구석이 아닌, 대도시에 자리 잡은 거대 조직의 간부인 듯해. 내가 자네를 찾은 건 그거 때문이야. 워커가 자네를 데려오래.”

“왜?”

“자기 부하로 삼고 싶다더군.”

라이는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는 듯 단호하게 거절했다.

“개소리! 내가 왜 그딴 놈 밑으로 들어가?”

“이건 절호의 기회야! 워커는 자네에게 검에 대한 재능이 있다며 제대로 한 번 키워보고 싶다고 했어. 자신은 나이가 너무 들어서 이미 늦었지만, 자네는 아직 젊으니까 말이야.”

절호의 기회라고 말하고는 있었지만, 박스터의 말투와 표정에는 뭔지 모를 간절함이 느껴졌다. 뭔가 내게 말하지 않은 검은 속내가 있음이 틀림없었다.

무슨 속셈일까……?

사실, 워커와 같은 고수가 자신을 키워준다는 건 놀라울 정도로 달콤한 유혹이었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믿겠는가? 집 떠난 이래 지금껏 세상의 쓰디쓴 맛을 질리도록 봐왔던 라이였다. 그것도 목숨이 왔다 갔다 할 정도의 쓴맛을 말이다. 당연히 자신을 키워주겠다는 워커의 제안이 곱게 들리지 않는 것이다.

라이는 문득 떠오르는 게 있자 박스터에게 물었다.

“날 팔아먹은 건가?”

박스터는 급히 손을 내저으며 변명했다.

“신께 맹세컨데, 내가 그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먹었다면 천벌을 받을 거야.”

과도할 정도로 반응하는 박스터. 확실히 뭔가 있음에 틀림없다.

라이는 싸늘한 표정으로 으르렁거렸다.

“사실대로 말해. 안 그러면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는 수가 있으니까. 알지? 내가 마음만 먹으면 요새를 떠나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말이야.”

라이의 위협에 박스터는 결국 무릎을 꿇고 모든 걸 실토했다.

“제발 나를, 아니 우리를 좀 살려주게. 자네가 그자를 따라가지 않는다면 우리는 죽은 목숨이야.”

아론 워커가 라이를 키워보겠다고 한 건 사실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걸 거부했을 때의 협박 또한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치졸하게도 라이를 자신에게 건네주지 않는다면 조직원들 전부를 다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이대로 도망쳐 버릴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라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동안 박스터와는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를 유지해 왔었다. 그런 그를 자신 때문에 죽게 내버려 둔다는 것은 상당히 찝찝한 노릇이다.

물론, 이런 생각이 든 건 자신이 키메라가 된 게 아닐까? 하는 착각 탓이었다. 자신이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더욱 인간답게 행동하고 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설혹 안좋은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키메라의 재생력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는가.

“워커는 지금 어디에 있지?”

“승낙해 주는 건가?”

라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톡 쏘아붙였다.

“어쩔 수 없잖아? 나 때문에 누군가의 목이 잘린다면 아무래도 꿈자리가 뒤숭숭해질 것 같으니까.”

감격한 박스터는 라이를 덥석 껴안았다.

“고, 고맙네. 자네는 정말 멋진 친구야.”

하지만 곧이어 박스터는 인상을 찡그리며 화들짝 떨어졌다. 라이의 몸에서 나는 냄새가 너무 지독했던 것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하수돗물을 퍼붓지 않는 거였는데…….

박스터는 코를 막고 손을 휘휘 내저으며 소리쳤다.

“크으~, 냄새!! 워커를 만나러 가기 전에 일단 좀 씻자, 씻어. 네 몸에서 나는 악취가 너무 지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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