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날 아침, 아론 워커는 라이를 마차에 태우고 감찰부장의 저택을 빠져나갔다.
워커가 자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말해주지 않았지만 라이는 굳이 묻지 않았다. 꼭 필요할 때를 제외하면 입이 무척이나 무거운 사내라는 걸 워커와 함께 여기까지 오면서 이미 파악했기 때문이다.
라이는 지금 자신이 와 있는 곳이 알카사스 왕국의 수도인 다란스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마법진을 통해 이동해 올 때 워커의 말을 엿들은 덕이다.
라이와 워커를 실은 마차는 수많은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번화가 쪽으로 들어갔다. 수도 중심가로 자신을 데려가나 싶었는데, 목적지는 그쪽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30분쯤 지났을 무렵 마차는 천천히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디로 가는 거야? 말을 해줘야 알지, 말을! 젠장!’
하지만 워커는 뭔가 생각에 잠긴 듯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가만히 앉아있었고, 그 꼴이 얄미워서 라이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스쳐 지나가는 마차 주변을 연신 눈을 굴리며 살펴보고 있었다. 혹시라도 안좋은 사태가 벌어지면 언제든 튈 수 있도록.
그러다 라이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차의 진행 방향 저 앞쪽에 중무장한 병사 수십 명이 도로를 막아놓고 검문을 하고 있는 게 보였던 것이다.
“검문소가 있습니다.”
하지만 워커는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앉아있기만 했다. 고개가 꼿꼿하게 서 있는 걸 보면 잠자는 것 같지는 않았다.
뒷골목 깡패라 생각되는 워커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있자, 라이는 될 대로 되라는 듯 마차 의자에 편안하게 앉았다.
그러면서 델카를 떠나기 전 박스터가 급하게 만들어준 위조 신분증을 만지작거렸다. 혹시 신분증이 위조된 게 걸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여차하면 튀면 되니까 말이다.
우려와 달리 검문을 하던 병사들은 마차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그냥 통과시켜 버렸다.
얼마나 많은 뇌물을 처먹였기에 병사들이 마차를 그냥 보내준 건지 어이없어하는 라이의 모습에 워커가 피식 웃었다. 자신의 정체를 모르는 라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대충 짐작하고 있었으니까.
“오늘, 네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주어질 거다.”
“기회라니요?”
라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자 워커는 진중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넌 오늘 테스트를 받게 된다. 통과한다면 네 인생이 완전히 바뀔 수도 있다. 그따위 허접한 위조 신분증에 의존할 필요는 더 이상 없어지겠지.”
그 말에 라이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처음에는 신분증이 필요했었지만, 지금은 별 필요 없어요. 거기에 있었던 건 수련할 장소가 필요해서 붙어있었던 거였으니까요.”
워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그렇게 산다면 네 미래의 모습은 뻔한 거야. 밀수업자 등이나 처먹다가 언젠가 토벌군에 걸려 비참하게 죽어가겠지. 그러니 쓸데없는 고집 부리지 말고 이번 테스트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해.”
“테스트 종목은 뭡니까?”
“당연히 검술이지. 그거 외에 뭐 다른 거 잘하는 게 있나?”
“아뇨.”
“죽을힘을 다해 최선을 다해라. 상대의 사정 따위 봐줄 필요 없다. 오늘 테스트에 참가할 사람들은 너보다도 몇 배나 강한 사람들일 테니까.”
자신의 실력을 너무 무시한다는 생각에 열이 뻗친 라이는 마차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대체 어떤 곳이기에 중무장한 수십 명의 병사들이 진입하는 마차들을 검문하는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여기는 뭐 하는 곳입니까?”
“그건 아직 몰라도 된다. 네 실력이 그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두 번 다시 이곳에 올 일은 없다.”
라이 폰 위너스
잠시 후, 마차가 어딘가에서 정지하자 워커가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내려라.”
워커와 라이는 마중 나온 병사의 안내를 받으며 병영 안쪽으로 걸어 들어갔다.
병사의 뒤를 쫓아가며 라이는 주변을 둘러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병영의 모습은 용병단 건물과는 겉모습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붉은전갈 용병단이 차지하고 있던 요새는 주요 건물들만 번듯하게 지어져 있었고, 그 외의 건물들은 진흙 벽돌로 급조한 엉성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곳에 늘어서 있는 건물들은 병영이라는 게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고풍스럽고 멋진 건물들이 많았다.
“이쪽입니다.”
병사는 병영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연병장으로 그들을 안내했다.
연병장 크기에 비했을 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인원은 겨우 여덟 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두 사람이 격렬하게 검투를 벌이고 있었고, 나머지 여섯 명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복장으로 봤을 때 장내의 여덟 명은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세 명은 화려한 제복을 입고 있었고, 네 명은 움직이는 게 가능할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두꺼운 갑주를 착용하고 있다. 그들 모두의 무장은 검이었다. 검투를 벌이고 있는 둘은 중갑주를 입은 자들이었다.
그리고 뒤쪽에 있는 나무 그늘 밑에서 나른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미모의 여성은 일곱 명과는 다른 심플한 디자인의 제복을 착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관이나 마법사처럼 보였다.
병사는 제복을 입고 있는 사내들 중 한 명에게로 워커 일행을 데리고 갔다.
라이의 시선은 화려한 제복 차림의 사내들이 아닌, 중갑주를 착용하고 있는 사내에게로 돌아갔다.
사내들이 입고 있는 제복이 지금껏 봤던 그 어떤 제복들보다 화려하고 멋있는 게 사실이었지만, 중갑주와 비교될 수는 없었다. 금은으로 상감해 놓은 화려한 문양도 멋있었고, 부드럽게 흘러내리듯 매끄러운 갑옷의 굴곡은 예술품 그 자체였던 것이다. 라이는 이렇게 호화로운 갑주를 지금껏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모시고 왔습니다, 페리 경.”
“아론 워커라고 합니다.”
정중하게 인사를 건네는 워커와 달리 페리는 가볍게 답례를 하며 자기소개를 했다.
“반갑소. 나는 제323정찰조장 라이놀 페리라고 하오.”
정찰조라는 말에 라이는 내심 안도했다. 화려한 제복과 무척 값비싸 보이는 중갑주를 보고 대단한 인물들일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닌 듯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은 반갑다는 말과 달리 자신들을 바라보는 라이놀의 안색이 썩 달갑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다.
라이는 모르고 있었지만, 라이놀이 그런 언짢은 표정으로 라이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어젯밤 갑자기 상관으로부터 내일 한 사내의 실력 테스트를 하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상관에게 듣기로는 산맥 안에서 스승과 단둘이서만 지내며 검술을 전수받았다고 하는데, 그러던 차에 스승이 갑자기 죽어버린 탓에 하산하게 되었다고.
상부에서 특별히 실력 테스트를 해 보라는 명령이 내려올 정도면 제법 실력이 있는 사내인 모양이라고 라이놀은 짐작했었다.
하지만 지금, 테스트를 받아야 할 사내를 보는 순간 그의 마음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너무 어렸던 것이다. 앳된 얼굴을 보니 아직 솜털조차 제대로 벗겨지지 않은 소년이 아닌가. 저래서는 스승으로부터 깊이 있는 검술은 아예 전수받지도 못했을 게 뻔했다.
“테스트를 받을 사람이 이 소년이오?”
“예. 잘 부탁드립니다.”
자신만큼이나 어이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라이를 바라보고 있는 부하들을 쓱 훑어본 뒤 라이놀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꼬맹이를 자신이 직접 테스트한다는 건 귀찮은 일이었다. 하지만 부하들에게 맡길 수도 없었다.
녀석들의 표정을 보니 이런 하찮은 일에 동원됐다는 것에 꽤나 자존심이 상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표정들이 테스트를 시키면 분명 사고를 칠 분위기였다.
놈들은 애송이가 그 정도도 못 막을 줄은 몰랐다며 변명하면 그뿐이겠지만, 자칫 녀석이 중상을 입거나 죽기라도 했다가는 그 뒤처리가 난감해진다. 상관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은 자신이었으니 말이다. 위급 상황을 대비해 연병장에 신관을 대기시켜 두긴 했지만, 아무리 신관이라 해도 죽은 놈을 다시 살려낼 재주는 없었으니까.
“자네 감찰부장님과는 어떤 사인가?”
“예? 감찰부장님이라뇨?”
맹한 얼굴로 대꾸하는 소년을 보며 라이놀의 미간은 더욱 일그러졌다.
한눈에 척 보는 것만으로 상대의 수준을 웬만큼은 알아볼 수 있는 라이놀이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소년에게서는 특출난 구석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전신의 근육은 잘 단련되어 있는 듯 보였지만, 느껴지는 마나의 기운은 평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이건 라이가 익힌 태허무령심법의 효용 탓이었는데, 그 때문에 실력을 테스트하기에는 너무 허접하게 보이다 보니 라이놀로서는 짜증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감찰부장이 후작님께 직접 청탁을 넣은 걸 보면, 잘 봐달라는 뜻이려나? 뭐, 좋아. 어쨌거나 한 수 주고받아 보면 확실히 알 수 있겠지.’
괜히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아플 필요가 없다. 기사는 검으로 말하는 법, 라이놀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며 말했다.
“내게 전력을 다해 덤벼봐라.”
순간, 라이놀에게서 놀랍도록 강한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숨이 막힐 듯한 강한 살기! 평범한 사람이라면 죽을 것만 같은 공포감에 바닥에 주저앉아 오줌을 지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라이놀은 더 이상 테스트 따위는 하지도 않고 꼬맹이를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안색이 살짝 창백해지긴 했지만, 멀쩡하게 서 있는 라이를 보자 그제서야 라이놀의 얼굴에 슬그머니 미소가 떠올랐다. 이 정도라면 테스트를 해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라이놀의 기세에 바짝 얼어있는 라이의 등을 다독여주며 워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가진 실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해 봐. 아까 마차 안에서 말했지? 이런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라는 거 명심하고.”
그제서야 라이는 정신을 차리고 쭈뼛쭈뼛 앞으로 걸어나갔다.
지금껏 이렇게까지 자신에게 공포감을 안겨준 상대는 없었다. 키메라 오크떼가 안겨줬던 공포심마저도 저 제복의 사내가 발산하는 살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로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라이의 마음은 공포심에서 벗어나 점차 안정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건 이 상황이 목숨을 건 결투가 아닌, 테스트라고 했기 때문이다.
테스트를 통과하게 되면 보상으로 뭘 받게 되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저 엄청난 고수와 대결을 해볼 수 있다는 것.
이런 기회는 쉽게 얻어지는 게 아니다. 더군다나 테스트라고 했으니 목숨을 잃을 걱정 따위는 하지 않고 전력으로 부딪쳐 볼 수 있지 않은가.
라이는 심호흡을 몇 차례 하며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워커와의 대결 후, 자신에게 뭐가 모자라는지 많이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워커 따위와는 차원이 다른 고수와 대결하게 되었다. 자신에게 모자라는 부분이 뭔지 알려면 자신이 지닌 모든 것을 쏟아내는 수밖에 없다.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라.
“그럼 공격하겠습니다.”
라이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잡고 심호흡을 하는 걸 보며 라이놀은 내심 비웃었었다.
하지만 라이가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라이놀의 얼굴은 경악으로 가득 채워졌다.
“허억! 거, 검기(劍氣)라고?!”
설마하니 애송이의 검에서 저렇게나 막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조차 하지 않았었기에 그의 놀라움은 더욱 컸다.
하지만 라이놀은 자신이 콘도르 기사단의 정식기사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라이의 공격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맞받아쳤다.
콰콰콰쾅!!
검과 검이 맞부딪쳤을 뿐인데도 화려한 불꽃과 함께 엄청난 폭음이 연병장을 휩쓸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