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에 진행된 비무로 인해 좌중의 시선은 모두 한쪽으로 쏠려 있었다.
연병장 한가운데서 치열하게 접전을 벌이고 있던 두 사내도 어느 순간 싸움을 멈추고 동료들과 함께 서서 조장과 웬 소년이 대화하는 걸 열심히 엿듣고 있는 중이었다.
“스승님의 성함이 뭔가?”
아직 어린 나이에 이 정도 수준의 마나 수련을 시킬 수 있다는 건, 그 스승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난가를 대변해 준다. 때문에 소년의 스승이 누군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라이 또한 라이놀이 자신의 스승 이름을 묻는 이유를 모를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당연히 자신이 댄 이름을 철저하게 조사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지어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랬기에 라이는 시치미를 뚝 떼고 거짓말을 했다.
“스승님께서는 자신의 성함을 알려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말에 라이놀은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성함을 알려주지 않았다고?”
“예.”
“아니, 어떻게 제자에게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을 수가 있지?”
강한 의문을 품는 라이놀에게 라이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몇 번이고 스승님의 성함을 물어본 적이 있었지만, 자신의 이름을 알게 되면 그때부터 원하지 않는 은원(恩怨)에 얽매이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전 그분의 성함만이 아닌, 과거에 뭘 하셨던 분인지조차도 전혀 모릅니다. 때때로 제가 잠자리에 든 후에 울적한 표정으로 술을 드시고 계셨던 걸 보면 뭔가 깊은 사연이 있는 듯싶었습니다.”
즉석에서 떠오르는 대로 대충 둘러댄 것이었지만, 라이놀은 쉽게 납득했다.
아무리 검의 고수라 할지언정 사람인 이상 타인과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실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신분 또한 높아져 자연스럽게 상류층 귀족들과 어울리게 된다. 그런 상류층의 세계는 일반적인 범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한 암투와 정치질로 매일매일을 보내는 게 일상이었다.
라이놀은 라이의 스승이 그런 암투에서 밀려나 산맥 속으로 도피를 한 검의 고수로 짐작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라이놀의 입가에는 처음과 달리 호의 어린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럼 자네가 익힌 검법의 이름이 뭔가?”
“믿기 힘드시겠지만 그 이름조차 한 번도 거론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초식도 그냥 1식, 2식이라고 구분해서 전수해 주셨으니까요.”
하기야, 자신의 이름까지 비밀로 했을 정도라면 검법 이름도 당연히 비밀로 했으리라. 각 국가에서 주력으로 가르치는 검술 명칭은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으니까.
“혹시…, 스승으로부터 타이탄은 인계받았나?”
아무리 산골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하지만 타이탄이라는 게 뭔지는 알았다. 여러 영웅담 속에 등장하는 강철로 된 마법도구의 이름이었으니까.
하지만 직접 본 적은 없었기에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랐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그걸 얻게 되는지도…….
모르는 건 딱 잡아떼면 된다. 괜히 아는 척해봐야 들킬 확률만 높아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이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아뇨. 그런 건 본 적도 없습니다.”
“흠, 이상하군. 자네 스승 정도의 실력자가 돌아가시면 자동으로 계약이 해지되어 타이탄이 그 모습을 드러냈을 텐데…….”
라이놀은 라이의 스승이 어딘가의 근위기사가 아닐까 추측하고 있었다. 소속되었던 나라가 멸망했다면…….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까지 추론했던 아귀가 모두 들어맞는다.
하지만 죽을 때 타이탄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건 의외였다. 그렇다면 자신의 추론이 틀렸다는 것이었으니까. 아니, 아닐 수도 있다.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긴 했지만, 타이탄이 죽기 직전에 탈출했었을 가능성도 있긴 했으니까.
“제가 임종을 지켰습니다만,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스승의 출신지가 어딘지 알 만한 힌트라도 있나? 사투리라든지, 아니면 즐기던 음식이나 술이라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겠다며 단호히 고개를 젓는 라이의 모습에 스승에 대해서 더 이상 알아낼 게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라이가 크라레스 쪽 억양을 지금까지 쓰고 있다는 것.
아무리 부모가 크라레스 출신인 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어렸을 때 부모와 헤어진 만큼 그때 배운 억양을 계속 기억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크라레스의 억양을 계속 쓸 수 있었던 것은 스승의 영향일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 하리라.
“크라레스라……?”
라이놀이 본 라이의 검술은 아주 독특했다. 특히 붉은색 검기를 뿜어내는 검술이 있다는 얘기는 아직까지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라이가 사용하는 검술의 기본이 크라레스와 이어져 있다는 건 몇 번 검을 부딪쳐 보기도 전에 라이놀은 눈치챌 수 있었다. 발놀림이나 검을 다루는 사소한 기법들에서 크라레스 고유의 기법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질문은 다 끝나셨습니까? 조장님.”
“왜 그러나?”
라이놀이 잠시 라이의 스승의 정체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테스트를 지켜보고 있던 부하 중 하나가 슬그머니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저도 한 수 교환해 보고 싶어서죠. 타국의 검술을 익힌 고수와 대련할 수 있는 기회는 그다지 흔치 않으니까요.”
“흠, 자네한테는 별 도움이 안 될 걸세. 실전경험이 거의 없는 것 같으니 말이야.”
“물론 그렇긴 합니다만, 검술만큼은 저보다 더 강한 것 같아서…….”
콘도르 기사단장 마이크 그루시아 후작이 라이에 대해 알고 있는 거라고는 어제 감찰부장에게서 들은 극소수의 정보들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감찰부장의 제안을 선뜻 받아들였던 것은 감찰부장이 왜 그 소년을 자신에게 보내려고 하느냐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라이놀은 소년에 대한 테스트가 끝나자마자 그루시아 후작의 집무실로 달려왔다.
그루시아 후작은 창가에 서서 라이놀의 부하들과 비무를 하고 있는 소년을 주의 깊게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단장님, 테스트를 끝내고 보고 드리러 왔습니다. 여기서 지켜보셨으니 잘 아시겠지만, 이해하기 힘든 부분들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루시아 후작은 비무에 집중하고 있는 시선은 돌리지도 않고 입을 열었다.
“말해보게. 경의 생각을 듣고 싶군.”
라이놀은 자신이 파악해낸 걸 차분하게 정리하여 보고했다. 라이의 스승과 그가 전수했다는 검술에 대해서 말이다.
라이의 스승은 아무래도 억양으로 미루어 보아 크라레스 쪽 사람인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라이가 익힌 검술이 크라레스 쪽 향기가 짙게 풍기긴 했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목격되지 않은 검술이라는 점이다. 그것도 초식을 전개할 때마다 붉은색 검기가 은은히 뻗어 나오는 아주 특이한 검술 말이다.
이렇게 눈에 확 띄는 검술이라면 오래전에 그 존재에 대한 소문이 세상에 널리 퍼졌어야만 했다.
“아마 감찰부장님께서도 그게 미심쩍어서 저희 쪽으로 소년을 보낸 게 아닌가 사료됩니다. 검술에 대한 연구에 있어서는 감찰부 쪽보다는 저희 쪽이 훨씬 뛰어나니까요.”
“여기서 지켜보니 소년이 사용하고 있는 초식의 종류가 몇 가지 되지 않더군. 그거밖에 배우지 않았다고 하던가?”
“얘기를 해보니 검술 전반에 대해서 배우기는 다 배웠답니다. 하지만 자신 있게 쓸 수 있을 만큼 숙달한 게 몇 가지 되지 않아서 그 초식들만 쓰고 있다고 하더군요.”
라이놀의 대답에 그루시아 후작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뜻밖에 엄청난 횡재를 하게 된 것이다.
“호오~, 전부 다 배웠다고?”
“예. 분명히 그렇게 말했습니다.”
“좋아. 잘 됐군. 기왕에 경이 시작한 일이니, 마지막까지 경이 책임지도록 하게.”
강력한 검법에 대한 열망은 그 어떤 국가든지 가지고 있었다. 특히나 사대강국 중에서 기사단 전력이 가장 약세인 알카사스의 열망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크라레스에서 비밀리에 전수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강력한 검법을 습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저 소년에게서 그 검법을 제대로 뽑아낼 수만 있다면 그 공로는 엄청날 것임이 틀림없었다.
그걸 뻔히 아는 상황에서 이 임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긴다면 라이놀이 분노할 것은 당연한 사실이다. 임무에서 배제된 그가 엉뚱한 곳에다가 이 일에 대해 흘리기라도 한다면 문제가 커질 우려도 있다. 이 검술의 소유권은 크라레스에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장님.”
“저 소년의 보안 등급을 최상으로 책정하고, 밖으로 정보가 새나가지 않도록 만전을 기해주게.”
“명심하겠습니다.”
“부탁하네.”
라이놀을 내보낸 후, 단장은 마법사를 불러 감찰부장과의 통신을 연결할 것을 명령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구에 수염을 단정하게 다듬은 고아한 인상의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감찰부장이었다.
“연결됐습니다, 단장님.”
그루시아 후작은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셨습니까, 부장님.”
「지금쯤 연락이 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네. 그래, 내가 보낸 자는 어떻던가?」
그루시아 후작은 곧바로 핵심부터 꺼내 들었다. 상대는 정보전의 전문가였다. 쓸데없이 이리저리 얘기를 나누다 보면 자신의 의중을 감찰부장이 눈치챌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테스트를 받게 하신 건, 이쪽에 건네줄 의향이 있으시다는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테스트의 결과는 건너뛰고 곧바로 얘기를 진행시켰기에 감찰부장의 미간이 살짝 일그러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질문을 받았으니 대답을 안 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감찰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물론 의향이 있으니까 그리로 보냈지. 하지만 이쪽의 사정도 생각해 줬으면 하는 게 내 작은 바램이라네.」
감찰부장이 협상할 뜻이 있음을 넌지시 밝히자마자 그루시아 후작은 시원스레 거래를 진행시켰다.
“원하시는 걸 말씀해 보시죠.”
잠시 생각하는 듯하던 감찰부장은 그루시아 후작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제안을 말했다.
「그래듀에이트를 셋 정도 이쪽에 보내줄 수 있겠나?」
최근 감찰부가 앤트러스를 포함한 상당수의 고수를 한꺼번에 잃어버렸다는 걸 그루시아 후작이 알고 있을 리 없다. 하지만 감찰부가 일의 특성상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라이의 잠재된 가치를 잘 알고 있는 그루시아 후작이었기에 처음부터 흥정을 할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흔쾌히 감찰부장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일단 부하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감찰부 쪽으로 가고 싶다는 대원이 있는지…….”
그루시아 후작이 너무 쉽게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느꼈는지 감찰부장의 표정이 순간 떨떠름하게 바뀌어 있었다.
감찰부장은 그루시아 후작이 자신의 제안을 이렇게 곧바로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먼저 셋을 부른 다음 차츰 협상을 하다, 최악의 경우 하나나 운이 좋다면 둘까지 그래듀에이트를 받아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운을 띄웠던 것 같았다.
사실, 라이와 직접 대면한 적이 없었던 감찰부장은 라이의 가치를 제대로 몰랐다고 보는 게 맞았다. 내가 뭔가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놓친 게 있었나? 그제서야 아차 싶었지만, 이미 라이는 그루시아 후작의 손아귀 안에 들어가 버린 후였다.
그랬기에 감찰부장으로서는 그래듀에이트 3명을 얻어낸 것만으로 만족하며 씁쓸한 입맛을 다시는 것 외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