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병단 운용에 있어서 가장 기본이 되는 단위는 대대(200여 명)였다.
독립적으로 활동하기에도 적절한 숫자였고, 자잘하게 찢어 중대(50여 명) 단위로 개별행동을 하기에도 좋다.
대대 이상급을 고용할 정도로 큰 손은 그리 많지 않았기에, 연대급 단위로 용병단을 구성할 필요성은 없었다.
대신, 전쟁이나 영지전 같이 대규모 병력을 원하거나 두세 개 이상의 대대를 원하는 고객이 있을 때 연대장이 파견되어 그들을 지휘했다.
그 때문에 지금 이곳 본부에는 연대장급은 조지 홉킨스만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연대장급 간부에게 직속 부하를 배정하지 않는 건, 그 정도 위치까지 올라온 실력 있는 사내에게 5개 대대, 천 명씩이나 되는 부하들을 맡기는 게 찝찝한 일이기 때문이다.
오랜 동고동락으로 극도로 친밀해진 부하들을 이끌고 독립이라도 하겠다며 설치면 정말 난감하니 말이다.
그 때문에 붉은전갈 용병단처럼 노예를 주축으로 운용하는 용병단이 아닌 한, 대부분의 용병단은 대대 단위로 단원들을 관리하고 있었다.
일반적인 임무인 경우, 연대장은 본부 내에 남아있는 모든 대대장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작전의 개요와 위험성, 그리고 약속된 수당 따위를 설명한 후 자신과 함께 행동하고자 하는 대대장을 선택하는 게 관례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약간 달랐다.
홉킨스 연대장은 자신과 함께 작전했으면 하는 똘똘한 대대장 다섯만을 골라 호출했다.
22대대장 스미스, 34대대장 카일, 35대대장 미하엘, 38대대장 제이슨, 56대대장 비토.
모두가 용병단이 자랑하는 역전의 용장들이었다.
홉킨스가 이 다섯 명만을 비밀리에 부른 건, 이번 작전은 구성원을 공개모집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밀을 요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변경백 쪽에서 천 명 정도의 용병 고용을 타진해 왔다.”
천 명, 즉 5개 대대를 필요로 한다는데 대대장 다섯 명만을 모아놓고 설명을 하고 있다는 건, 이 모두를 다 데려가고 싶다는 뜻이라는 걸 노회한 대대장들이 모를 리 없다. 그리고 이번 작전이 상당한 기밀을 요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이들 중 가장 연장자인 스미스가 대표로 홉킨스에게 질문했다.
“용병을 천 명이나 고용해서 뭘 하겠다고 하던가요?”
“요즘 들어 무역로를 장악하고 있는 사막 부족들의 횡포가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소문은 다들 들었을 거다.”
몇몇 대대장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을 보며 홉킨스 연대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욕심이 너무 과했어. 치안 확보를 해주고 통행세를 받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이 중개무역을 아예 독점하려 하고 있는 모양이야. 변경백으로서도 묵과할 수 없는 사태라고 봐야 하겠지. 변경백은 무역로 전체에 대한 정비를 원하고 있다. 이번 작전에 동원되는 병력은 총 6만. 우리는 선봉에서 치고 들어가면서 적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도록 만드는 게 주 임무다.”
“6만이면…, 상당한 병력이긴 합니다만 겨우 그거 가지고 될까요? 사막 부족은 사내라면 모두가 전사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잖습니까. 그들만 해도 벅찬데 만약 동맹인 도시국가 연합에서 구원군이라도 보낸다면 아주 힘든 전투를 벌여야 할 겁니다.”
제이슨의 질문에 스미스가 슬쩍 끼어들며 대신 대답했다.
“뭐가 걱정이야? 이쪽에는 팔콘 기사단이 있는데. 솔직히 변경백이 마음만 먹으면 굳이 우리들의 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막 부족 전체를 씨몰살 시키는 건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만…….”
홉킨스 연대장은 가볍게 탁자를 치며 두 사람의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렸다.
“자네들에게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 게 있는데, 이번 전쟁에 기사단은 참가하지 않는다.”
대대장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로 쑤군거리기 시작했을 때, 홉킨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기사단이 참전하면 도시국가들과 친밀하게 지내고 있는 실버 드래곤들이 끼어들어 올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기 때문이야. 그 때문에 변경백 쪽에서는 순수하게 병력 대 병력만의 전쟁을 수행하려고 하는 거지.”
스미스가 슬쩍 다른 대대장들을 쳐다보자 모두들 표정이 어두워져 있었다. 기사단이 참전하지 않으면 녹록지 않은 전투가 될 게 뻔했으니까.
스미스는 욕설을 내뱉으며 투덜거리듯 입을 열었다.
“젠장, 상당히 힘든 싸움이 되겠군요.”
“나는 그리 힘든 싸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 전쟁에 변경백 쪽에서 고용한 용병만 3만이다. 그리고 변경백 쪽에서도 3만을 투입한다고 하더군. 아무리 드래곤 때문에 몸을 사린다고 하더라도 이런 중요한 전쟁에 변경백이 겨우 3만밖에 투입하지 않는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
그 말에 대대장들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링카 영주는 독자적인 병권을 지닌 변경백이었기 때문이다.
그 휘하의 병력은 거의 12만에 달한다. 일반적인 영주가 지니고 있는 병력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규모였다. 그런 그가 대규모 원정을 계획하면서 자신의 병력을 겨우 3만밖에 투입하지 않는다는 게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연대장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대대장들도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듯 표정이 바뀌었고, 주위를 둘러본 스미스가 대표로 앞으로 나서며 질문을 던졌다.
닳고 닳은 부하들의 눈치 빠름에 홉킨스는 피식 웃은 뒤 지도 앞으로 걸어가 설명을 시작했다.
“내 짐작으로는…….”
홉킨스 연대장은 지도에서 링카 성에서부터 사막지대를 향해 손가락을 쭉 그으며 말했다.
“용병부대 3만을 먼저 투입하고, 영주군 3만은 후속해서 뒤따를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라. 영주군은 용병부대의 뒤를 따르는 게 아니라, 이쪽으로 이동할 거야. 승리를 확실하게 굳히기 위해서 3만이 아니라 5~6만쯤 동원할 테지.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르고.”
홉킨스 연대장의 손가락은 링카 성에서 시작해 남쪽 사막지대로 쓱 이동했다.
그의 손가락이 최종적으로 가리킨 지점은 남쪽의 도시국가와 사막 부족의 중간지점쯤이었다.
“사막 부족을 돕기 위해 달려오는 동맹도시들의 병력을 기습하기 위해 그곳에서 매복할 거라는 말씀이십니까?”
매복 작전의 핵심은 기밀유지에 있다. 그 때문에 링카 영주는 이번 작전에 용병을 참여시키지 않고 자신의 병력만 동원하려는 것이리라.
“도시국가들의 병력을 가장 손쉽고도 확실하게 소탕하는 데는 이 방법이 최고라고 나는 생각했다. 드래곤 탓에 도시국가로 쳐들어가는 건 불가능하지. 그렇다면 밖으로 꾀어내서 없애버리는 수밖에 없는데, 사막전이라면 도시국가 쪽이 한 수 위거든. 더군다나 그놈들은 불리하면 도시 안으로 도망쳐 버리면 끝이기도 하고.”
홉킨스의 설명에 미하엘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열었다.
“흠, 놈들이 아무 생각 없이 허둥지둥 사막 위를 내달리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사막 부족을 친다는 거로군요.”
“그래. 영주군이 덫을 놓고 있는 지점을 향해서 말이야…….”
눈치 빠른 미하엘이 감을 잡았다는 듯 눈을 빛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사막 부족 쪽에서 정신없이 구원요청을 하도록 만들려면 인정사정없이 몰아붙여야 할 텐데요?”
“물론이다, 제군들, 기뻐해라. 그런 이유로 몇몇 협조적인 부족을 제외하고는 전면적인 약탈이 허락되었다.”
“우와!!”
약탈이 허용된다는 말에 자리에 모인 대대장들 모두 환호성을 내질렀다. 제대로 털기만 한다면 한평생 놀고먹을 수 있는 재화를 확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홉킨스 연대장은 피식 웃으며 양손을 들어 일단 대대장들을 진정시킨 뒤 말을 이었다.
“모두들 떼돈을 벌고 싶지?”
모두들 열기에 들떠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당연하죠.”
“그렇다면 보안 유지를 철저히 하도록! 부하들에게는 총 6만이 동원되어 사막으로 쳐들어갈 거라는 것 정도만 알려줘. 그리고 사방에 그 소문을 퍼트리도록 해라. 알겠나?”
“명심하겠습니다.”
“자, 또 다른 질문 있나?”
워낙에 미끼가 커서 그런지 더 이상의 의문 제기는 없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무역로를 털어먹을 수만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는 게 용병들이다.
혹시나 하는 위험부담 따위는 이제 대대장들의 뇌리에 남아있지도 않았다. 대신 그들의 머릿속에는 일확천금을 얻어 호화로운 말년을 지내는 자신의 노후의 모습만 어른거리고 있었다.
랄프 디겔의 스승
고블린은 아주 약한 몬스터다. 덩치도 작고 힘도 약하다. 그렇기 때문에 열 마리도 안 되는 소수의 무리쯤은 초보 모험가들에게조차도 간단하게 토벌될 정도다.
하지만 이들이 한곳에 자리를 잡고 지하에 거대한 둥지를 구축한 후에는 용병 중대(대략 50명 규모)가 포위망을 구축하고 몇 달에 걸쳐 토벌전을 전개해야만 겨우 박멸이 가능할 정도로 매우 귀찮은 존재가 된다.
페가수스 용병단처럼 강력한 용병단에서조차도 병력의 상당수가 고블린 토벌에 묶여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오크처럼 전면전이라도 벌일 수 있다면 좋겠지만, 땅굴을 파고들어간 뒤 어떻게 해서든 결전을 회피하는 교활한 고블린을 상대로는 시간만 엄청나게 낭비하게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용병단이 될 수 있으면 고블린 토벌 의뢰를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용병길드에서는 임무를 회피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1년에 몇 건을(용병단 규모마다 수행 횟수는 다르다) 고블린 둥지 토벌로 채워 넣지 않으면 다른 의뢰를 받지 못한다는 페널티를 주고 있었다.
그 때문에 모두 울며 겨자 먹기로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페가수스 용병단에 찬란한 서광이 비췄으니…….
요즘 아르티어스 어르신은 다섯 명의 호위병만 거느린 채 단출하게 움직였다.
선행해서 미리 고블린 둥지 근처로 이동한 용병들이 마법진 설치를 위한 사전작업을 끝내놓고 기다리면, 아르티어스 어르신이 도착한다. 그리고 탐지마법으로 대충 고블린 둥지의 중앙을 확인한 후 그 위치에 마법진을 설치한다. 마법진 설치에 걸리는 시간이라고 해봐야 30분도 채 되지 않았다.
마법진 설치가 끝나고 나면, 언제나 그랬듯 본부에 임무 완료했다는 걸 보고하고, 또 새로운 임무를 하달받기 위해 마법통신을 보낸다.
“이쪽은 끝났습니다.”
「수고했군.」
“새로운 임무는 어딥니까?”
아르티어스의 물음에 본부 쪽 마법사는 일정표를 살펴보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당분간은 일거리가 없으니 본부로 돌아와 대기하길 바란다.」
“알겠습니다.”
아르티어스는 수정구를 품속에 집어넣은 뒤, 호위 조장에게로 시선을 돌려 말했다.
“본부로 돌아오라는군.”
“이미 준비는 완벽히 끝났습니다, 마법사님. 바로 출발하시면 됩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호위 조장의 얼굴에는 위대한 마법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가득했다.
지금껏 용병 생활을 해오며 아르티어스만큼 뛰어난 마법사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대기하라는 걸 보면 한 며칠 휴식을 주려는 모양입니다, 마법사님.”
“근래 강행군을 하셨으니까요.”
“오랜만에 푹 쉴 수 있겠군요.”
호위들이 그런 말을 할 만도 했다.
아르티어스가 이들과 팀을 짠 후 궤멸시킨 고블린 둥지만 해도 벌써 열여섯 개였다. 거의 이틀에 하나 꼴로 박살 내고 다녔다는 말이다.
도시 간의 이동이야 공간이동 마법진을 쓴다고 하지만, 그곳에서 고블린 둥지가 있는 곳까지는 말을 타고 이동해야만 했다.
공간이동 마법을 쓸 수 없는 척 연기하고 있는 아르티어스였기에 그건 어쩔 수 없는 중노동이었다.
그나마 고블린 둥지들이 마을 인근에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기에 빨리 끝낼 수 있었지만, 마을 근처의 고블린 둥지가 다 토벌되고 나면 산속 골짜기에 자리 잡은 둥지들을 없애러 돌아다녀야 하기에 이동에 할애되는 시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늘어날 것임에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