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티어스 일행이 페가수스 용병단 본부로 돌아오는 데는 겨우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공간이동 마법진의 도움을 받은 덕분이다.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호위 조장은 아르티어스를 비롯한 조원들의 통장을 모아서 행정부로 달려갔다. 월급 수령을 하러 간 것이다.
현금을 바로 주는 게 아닌 만큼, 편의를 위해 이렇듯 대리 수령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료를 못 믿겠다면 자신이 직접 행정부로 달려가든지.
그런데 용병단 본부에는 뜻밖에도 아르티어스를 만나고 싶다는 손님이 한 명 와 있었다.
정확하게는 아르티어스가 아니라, 그가 분장한 랄프 디겔을 만나기 위해 온 손님이었지만.
“마법사님의 스승님께서 와 계시답니다.”
“뭐? 내 스승?”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스승이라는 존재를 둬본 적이 없었던 아르티어스였기에 그게 무슨 소린지 이해하는 데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랄프 디겔의 스승이 찾아왔다면 절체절명의 위기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르티어스에게는 그 어떤 감흥도 오지 않았다. 예전에 유희하면서 이런 일이야 수도 없이 겪었기에 이골이 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정 안 되겠으면 스승이라는 놈을 없애버리면 되지, 하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음에야 무슨 위기감을 느끼겠는가.
아르티어스는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어디에 계신다고 하던가?”
“제가 마법사님을 모시겠습니다.”
소식을 전한 호위 조장이 앞장서서 안내하려 했지만 아르티어스는 고개를 내저으며 만류했다.
“아니야. 자네도 오랜만에 본부로 돌아왔으니 휴식이 필요할 텐데 그런 수고까지 끼칠 수는 없지. 스승님께서는 어디에 계신다고 하던가? 위치만 말해 주게.”
“「붉은 사과」라는 여관입니다. 본부 정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으니, 위병에게 물어보시면 바로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그럼 나는 오랜만에 스승님을 뵙고 와야겠군. 혹시 누군가 나를 찾는 사람이 있으면 그렇게 전해주게.”
“예, 마법사님. 좋은 시간 보내십쇼.”
찾는 사람이 왔다는 전갈을 받고는 2층 계단에서 빠른 걸음으로 내려오다가 자신을 보자마자 실망감 어린 표정을 짓는 늙은 노마법사.
겉모습만 봐서는 70세쯤 되어 보였는데, 마법사들의 장수하는 특성으로 미뤄보아 진짜 나이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페가수스 용병단에서 나온 사람인가?”
행여 제자의 소식을 가져온 사람인가 싶어 노마법사의 목소리에는 깊은 기대감이 묻어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랄프 디겔이라는 이름만 도용하고 있을 뿐, 간 크게도 그의 모습은 전혀 모방하지 않았다.
생김새가 신분증과 다르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상대에게 여자에게 인기 좀 얻으려고 마법으로 얼굴 좀 바꾸고, 머리카락 색깔은 눈에 확 띄는 색으로 염색했다고 우겼을 뿐이다.
마법사가 얼굴 모양 바꾸는 건 흔한 일이었고, 머리카락 색 또한 염색 외에는 답이 없는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이었기에 상대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었다.
그런 아르티어스의 모습을 보고 자신의 옛 제자를 떠올린다는 건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다.
“예. 랄프 디겔의 스승이시죠?”
“그렇다네.”
“제자분의 소식을 전하러 왔습니다.”
순간 노마법사의 얼굴에 환한 생기가 떠올랐다.
“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잠시 어디 조용한 데서 얘기 좀 나눌 수 있겠습니까?”
“내 정신 좀 보게. 자, 내 방으로 가세.”
방으로 올라가기 전, 노마법사는 식당도 겸하고 있는 여관주인에게 손님에게 대접할 차를 자신의 방으로 가져다 달라며 주문하는 걸 잊지 않았다.
노마법사가 묵고 있는 방에는 손님을 접대할 게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가 빌린 2층의 방은 아주 작았다. 여비는 넉넉하게 남아있었지만, 이 지역이 용병들과 얽혀 움직이는 상권이었던 만큼 이런 작은 방밖에 구할 수가 없었기에 어쩔 수 없이 여기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2층의 자기 방으로 올라온 노마법사는 손님에게 하나밖에 없는 의자를 권하고, 자신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노마법사의 얼굴에는 한시라도 빨리 제자의 소식을 듣고 싶다는 간절함이 묻어있었다.
“그래, 전할 말이라는 게 뭔가?”
하지만 아르티어스의 대답은 노마법사가 간절히 바라던 소식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았던 아래층에서는 꽤나 공손한 태도를 취했던 아르티어스였지만 자리에 앉는 순간 그 분위기는 돌변해 있었다.
아르티어스는 미간을 찌푸리며 약간은 신경질적으로 질책하듯 말했다.
“제자가 죽은 지 벌써 8개월이나 지난 걸로 아는데, 아직까지도 그걸 모르고 있었나?”
기대감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던 노마법사의 얼굴이 일순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며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었다.
“아,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마. 내가 죽인 건 아니니까. 랄프 디겔의 신분증을 나에게 건네준 녀석들은 그가 8개월쯤 전, 미스티라에서 죽었다고 하더군.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는 듣지 못했어. 관심도 없었고. 어쨌거나 그 신분증이 이런저런 경로를 거쳐 나한테로 들어온 거지.”
여기까지 말한 아르티어스는 손가락을 딱 하고 가볍게 튕겼다.
그와 동시에 노마법사가 은밀히 구동하고 있던 마법이 해제되어 버렸다.
기습을 위해 위력은 약해도 최대한 빨리 구동시킬 수 있는 마법을 구사하려 했지만, 노마법사의 주변에는 이로 인해 적잖은 마나가 응집되어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응집되어 있던 마나들을 손가락을 튕김으로써 간단히 소멸시켜 버린 것이다.
이건 노마법사가 지금껏 알고 있던 마법지식으로는 있는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그야말로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한 존재였다.
새파랗게 질려버린 노마법사의 어깨를 다독거리며 아르티어스가 느긋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 널 죽일 생각은 없으니까 말이야. 네 제자가 이미 죽었고, 누군가가 제자를 사칭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쫙 퍼진다고 해도 나는 별 상관없거든. 굳이 살인멸구까지 할 필요성은 못 느낀다는 말이지.”
죽이지 않겠다는 말에 노마법사는 약간이나마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그는 허탈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실은 디겔이 죽었다는 소식은 이미 오래전에 들었었소. 하지만…,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그가 살아있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여기까지 달려온 내 잘못이지요. 녀석이 만약 살아있다면 가장 먼저 나한테 소식부터 전했을 걸 잘 알면서도……. 흑흑.”
결국 참지 못하고 노마법사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는 소맷자락으로 급히 눈물을 닦은 뒤 아르티어스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이런 모습을 보여 미안하구려. 녀석이 살아있던 내 마지막 제자였기에…….”
참 지지리 제자 복도 없는 마법사였다. 애써 키운 제자들이 전부 다 스승보다 먼저 저세상에 가버린 걸 보면.
아르티어스는 노마법사의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해 주었다.
물론 노마법사를 없애버리는 게 가장 깔끔하긴 하지만, 그가 자신을 찾아왔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따라서 노마법사를 해치운다면 그 후속 조치로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이다. 그런 귀찮음을 없앨 수 있다면 이 정도 수고쯤이야…….
“그냥 팔자려니 생각하게. 아니, 아직 늦지 않았으니 제자를 몇 명 더 키워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겠지.”
“그러기에는 내 나이가 너무 많구려.”
“제자가 살아있다는 소식에 여기까지 단숨에 달려온 거 보면 그리 늙은 것도 아니지.”
노마법사는 문득 아르티어스를 꼼꼼히 살펴봤다. 훤칠한 키에 무척 잘생긴 미남이었다.
물론 상대의 본모습이 어떤지는 알 수가 없다. 마법사들은 자신의 얼굴 형태를 마법으로 바꿀 수가 있기 때문이다.
환영마법으로 눈가림을 하는 게 아니라, 근골을 뒤트는 것이기에 6개월 정도만 지나면 뼈가 완전히 굳어버려 굳이 마법을 쓰지 않아도 그 모습이 유지된다.
그 때문에 마법사치고 미녀나 미남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남자 마법사들은 굳이 미남형을 고집하지 않는다. 여자를 꼬실 때는 좋을지 몰라도, 확 튀는 외모는 자신이 마법사라는 걸 모두에게 광고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공격을 하기 위해 오랜 시간 마법을 시전해야 하는 마법사에게 있어서 그건 아주 치명적인 약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을 가능성은 없다는 것을.
“내 삶이 그리 많이 남은 것도 아닌 것 같으니 또다시 제자를 키운다는 건 힘들 것 같고, 대신 내 한 가지 청을 들어줄 수는 없겠소?”
순간 어이가 없어진 아르티어스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소리쳤다.
“왜 내가 당신의 청을 들어줘야 하는데? 지금까지 좋게좋게 대해줬더니 주제를 모르고 내 머리 꼭대기에 올라오려고 해서는 곤란하지.”
“내 제자의 이름을 도용한 댓가라고 하면 어떻소?”
도용한 댓가라는 말에 아르티어스는 피식 웃으며 마치 인심이라도 쓴다는 듯 호탕하게 말했다. 들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안 들어주면 그만이었으니까.
“좋아. 청이라는 게 뭔지, 일단 들어나 보지.”
“나는 내 제자와 함께 세상을 돌아다니며 모험을 하고 싶었다오. 그 때문에 최선을 다해 내가 알고 있던 모든 걸 전수했었지.”
노마법사가 서두를 떼자마자 아르티어스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지금까지와 달리 노마법사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정중한 말투로.
“스승님의 소원이시라는데 제자가 어찌 외면할 수가 있겠습니까. 얼마든지 들어드리죠.”
아르티어스의 돌연한 변화에 노마법사는 어이가 없는지 한동안 말문을 열지 못했다.
“정말 괜찮겠소? 나하고 있는 동안에는 나를 스승으로 모셔야 할 텐데?”
아르티어스는 싱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스승님. 제가 꿈에 그리던 완벽한 모험을 겪게 해 드리죠. 자, 일단 제 숙소로 가시죠. 근사한 모험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으니까요.”
노마법사는 알 리가 없었다. 지금 아르티어스가 마음속으로 얼마나 신나 하고 있는지를.
아르티어스가 용병대에 들어와 지금껏 하고 있었던 게 고블린 사냥이었다. 그것도 알카사스 전역을 부리나케 쫓아다니며 강행군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만약 노마법사가 그를 따라다닌다면 십중팔구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과로사할 게 뻔했다. 아니면 그 전에 모험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던지.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참이었기에 아르티어스에게는 또 다른 유희거리가 생긴 셈이다.
덤으로 노마법사의 오랜 꿈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