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4화 (890/930)

주인님의 호출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지닌 고급검법의 경우 극소수의 제자에게만 비밀리에 전수된다.

익힐 수 있을 만한 자질이 되지 않는 자에게는 검술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오의(奧義) 즉, 마나의 운용법에 대한 접근조차 허락되지 않는다.

때문에 외형을 흉내 내는 건 가능하다고 해도 오의를 알지 못하는 한 제대로 된 위력은 절대로 낼 수가 없다.

무림 세계와 달리 이곳에는 운기토납법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대신, 무림보다 월등한 마나 농도를 지니고 있기에 고급검법을 수련하며 각 동작에서 요구되는 호흡과 마나의 움직임을 구사하다 보면 자연적으로 그에 준하는 효용을 얻을 수가 있게 된다.

즉, 고급검법을 얼마나 빠른 시기에 접하여 익힐 수가 있느냐에 따라 얼마나 깊은 수준까지 발전할 수 있느냐가 결정된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만큼 고수로 성장하는 데 있어서 고급검법의 존재는 절대적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놀라운 위력을 지닌 고급검법을 생각지도 않았는데 공짜로 먹게 되었다.

그러니 콘도르 기사단의 수뇌부가 얼마나 흥분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급검법은 허락된 극소수에게만 전수된다. 그만큼 기밀을 요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껏 라이는 비전(秘傳)의 검법이니 조심하라는 주의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가 배운 건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무술들이었고, 이런 무술들이야 원한다면 별 대가 없이 아무에게나 가르쳐 주곤 했다.

라이와 잠시 어울려 본 라이놀은 그런 부분에서 상대가 무지하다는 것을 재빨리 포착했고, 부하 조원들을 이용해 검술이라는 건 서로가 서로에게 아는 건 뭐든지 다 가르쳐 주는 것이라는 분위기를 유도했다.

그 때문에 라이는 꿈속에서 익힌 검술이 얼마나 대단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도 모르고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걸 조원들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조원들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검술을 아낌없이 알려주고 있었으니 그걸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수련이 끝나고 라이가 휴식을 취하러 들어가면, 제323정찰조의 두 번째 일과가 시작된다.

그들은 서로 의견을 나눠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게 정확한지 확인한 뒤 검술 교본을 기록해 나갔다.

“이로써 4번 초식의 정리가 완벽하게 끝났습니다.”

4번 초식과 그 파생형 세 가지가 기록되어 있는 만큼, 실제로는 초식 네 개에 상당하는 분량이었다.

“이제야 겨우 초식 네 개가 끝났군.”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소책자는 모두 36권이었다.

라이가 스승에게 배운 초식이 정확히 36개였기에, 그에 맞춰 36권을 준비해 놓고 그날그날 알아낸 것들을 다 기록해 두고 있었다.

머지않아 비어있는 나머지 책자에도 정리된 초식들로 가득 채워지리라.

이렇게 완성된 초식은 마이크 그루시아 후작에게 제출할 수 있도록 따로 새 책자에 깨끗하게 정리해서 기록해 두고 있었다.

네 개의 초식이 끝났음에도 라이놀은 차일피일 미루며 그루시아 후작에게 완성본의 제출을 미루고 있었다.

“그가 전수받은 검법은 총 서른여섯 개 초식으로 이뤄져 있다고 하는데, 특이하게도 파생형이 각 초식당 세 개밖에 되지 않는답니다. 총 144 초식으로 이뤄진 아주 단출한 검법이라는 거죠.”

라이놀의 보고에서 숨겨져 있는 문제점을 그루시아 후작은 곧바로 눈치챘다.

일반적인 검법이라면 파생형이라는 게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초식에서 검을 휘두르는 일부 동작을 약간 변화시키는 정도였기에, 이런 게 있다는 정도만 설명하고 넘어가도 충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작과 호흡, 마나의 움직임을 일치시켜야 하는 고급검술에서는 얘기가 많이 달라진다.

마나의 움직임이 약간만이라도 달라지면 큰 문제가 발생하는 만큼, 초식에 조금이라도 변화를 준다면 그에 따른 호흡과 마나의 흐름에 변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고급검법이라 하면 각 초식에 따른 파생형이 최소 다섯 가지 이상은 되기 마련이다.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따져서 그에 대한 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획일적으로 변초를 세 가지씩밖에 만들어 놓지 않았다고 하니 그루시아 후작의 미간에 주름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미완성의 검법이라는 얘기로군.”

“그럴 가능성이 무척 높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다행히도 아직까지는 큰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만…….”

“서른여섯 개 초식이라면…, 지금까지 정리한 건 몇 개나 되지?”

“완전히 정리한 건 세 개 초식뿐입니다.”

실제로 정리된 건 네 개였지만 어쩐 일인지 라이놀은 거짓으로 보고를 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데, 이제야 겨우 세 개밖에 알아내지 못했다니!”

그루시아 후작의 질책에 라이놀은 고개를 조아리며 변명했다.

“라이가 스승에게 제대로 전수받지 못한 탓에 그렇게 됐습니다. 물론 모든 초식들을 다 전수받긴 했다고 합니다만, 제대로 구사할 수 있는 게 몇 가지 되지를 않습니다. 제대로 숙달하기 전에 스승이 죽어버린 탓이겠죠. 그렇다 보니 녀석이 기억하고 있는 검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고, 그걸 제대로 구사할 수 있도록 지도까지 해줘야 하다 보니 시간이 제법 걸리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그 덕분에 녀석이 스승에게서 전수받은 모든 걸 빼낼 수 있게 되었지 않습니까.”

그루시아 후작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수긍했다.

“그건…, 그렇지.”

“아직 제대로 완성되지 못하긴 했습니다만, 살펴보시고 싶으시다면 정리해서 올릴까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그는 안정성이 입증되지 않은 고급검법을 살펴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그런 고급검법을 익힐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검법의 안정성은 라이놀과 그의 조원들이 밤낮을 매진하며 익히면서 입증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나중에 그들에게서 뭔가 명확한 결과가 나오면, 그때부터 익히기 시작해도 늦지 않으리라.

하지만 그건 그루시아 후작의 오판이었다. 라이놀이 그에게 보고하지 않은 게 있었기 때문이다.

라이놀과 그의 조원들이 안정성 입증을 위해 라이의 검법을 열심히 익히고 있는 건 맞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들은 라이가 알려준 검법이 자신들이 알고 있던 검법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강력한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라이에게 얻어들은 것을 참조하여 수련했을 뿐인데도 그들은 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상부에 보고부터 해야 했지만, 라이놀은 조원들을 모아두고 단단히 입단속을 시켜 그 사실이 외부로 새 나가지 않게 철저히 막고 있었다.

이 검법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상부에서 알게 된다면 자칫 자신들이 배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이크 그루시아 후작에게조차도 생략되고 조작된 보고서가 올라가게 된 것이다.

라이에게서 배운 검법을 자신들만이 독점하기 위해서.

사실, 이런 엄청난 고급검법은 각 국가에서 최고 중의 최고인 엘리트들에게나 배울 기회가 주어진다.

문제는 그 엘리트라는 기준의 첫 번째가 바로 혈통이라는 것이었다.

근위기사급의 자제들 같은 최고의 혈통들에게는 자질이 조금 떨어진다 해도 최상위의 검법을 익힐 기회가 주어지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죽을 고생을 해서 자신에게 그만한 자질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건 너무나도 어려운 일이었다.

설혹 겨우 인정받았다손 치더라도 이미 배울 시기를 넘겨버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라이놀과 그 조원들은 라이에게서 검법을 훔쳐 익히면서 자신들에게 뜻하지 않았던 횡재가 찾아왔다는 것을 금방 깨달았다.

그리고 그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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