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95화 (89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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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란도는 요즘 꿈만 같은 안락한 삶을 만끽하고 있었다.

처음, 「아르티어스」라는 고약한 드래곤에게 붙잡혔을 때만 해도 자신의 인생은 끝난 줄 알았다.

전승되는 옛 이야기들 중 드래곤과 인간의 관계가 좋게 끝난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신에 비견될 정도로 전능한 존재인 드래곤이 인간을 제대로 된 인격체로서 대우를 해줄 리가 없는 것이다.

영웅담을 보면, 드래곤은 쓸 만한 사람이 있으면 붙잡아 노예로 부려먹다가,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신마법으로 세뇌까지 시켜버린다.

그 때문에 골백번 죽여도 시원찮을 드래곤을 위해, 그를 토벌하러 온 영웅과 싸우다가 개죽음을 당하는 게 일반적인 노예들의 삶이라고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전설도 일부 전해지긴 했지만, 올란도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단적인 예로, 영웅의 반열에 올라 있는 다크 폰 치레아 대공의 경우, 처음에는 드래곤과 사이가 좋았을지는 몰라도 그 끝은 결국 행방불명으로 귀결되었다.

분명 뭔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추악한 뒷얘기가 있을 거라고 그는 확신하고 있었다.

올란도 역시 처음에는 개죽음을 당하는 노예들과 비슷한 삶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지금 그가 지내고 있는 곳은 어두침침한 동굴 속 드래곤의 둥지가 아닌, 같은 인간들이 살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으니 말토리오 산맥 자락에 있는 「페이지」라는 작은 마을이라고 했다.

올란도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여자 엘프는 주인님께서 찾기 전까지는 이 마을에서 지내라고 했다.

마을을 벗어나지 않는 게 가장 좋겠지만, 혹시 마을 밖으로 나가야 할 일이 있을 때는 행선지와 연락 방법만 정확히 남겨둔다면 나가도 좋다는 뜻밖의 자유까지 안겨줬다.

올란도가 이런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건 브로마네스의 잔꾀 덕분이었다.

그는 올란도를 실버 패거리와의 싸움에서 버림패로 쓸 생각이었던 것이다.

만약 녀석이 죽어버린다면 상관이 없지만, 혹시라도 실버 패거리에게 붙잡혀 나불나불 불었다가는 그 뒤처리가 곤란해진다.

그렇기에 복잡하게 생각하는 걸 싫어하는 브로마네스는 자신이 마치 아르티어스인 척하면서 그의 레어로 보내버렸다.

아르티어스가 지금 유희를 하느라 레어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생각해낸 계책이었다.

그런데 난데없는 그래듀에이트의 출현에 아르티어스의 영역을 중심으로 점차 엘프 왕국 건설을 추진하고 있던 그랜딜 공작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르티어스가 자신들을 감시하기 위해서 올란도를 보낸 줄 착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올란도와 만나 얘기를 나눠보니 뭔가 임무를 받고 온 건 아니었고, 부를 때까지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으라는 지시만 받고 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그랜딜 공작은 대기하는 동안 자유롭게 지내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핑계를 대며 올란도를 사람들이 사는 마을로 보내버린 것이다.

그로서는 올란도를 아르티어스의 레어와 최대한 멀리 떨어뜨려 놓을 필요가 있었으니까.

“크~, 맥주 맛 정말 기가 막히네!”

“한 잔 더 드릴까요, 올란도 씨?”

올란도는 남은 맥주를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켠 후, 빈 잔을 점원 소녀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응! 한 잔 가득 부탁해.”

점원은 햇볕에 약간 그을리기는 했지만 아주 건강한 피부의 끝내주는 몸매를 지닌 소녀였다.

열여섯쯤 되었을까? 말이 소녀지 저 정도 나이 때라면 이미 몇 군데에선가 혼담이 오가고 있으리라.

소녀의 풍만한 엉덩이를 쫓아 음흉스러운 시선을 보내던 올란도가 그녀의 모습이 지하실 아래로 사라지자 고개를 제자리로 돌리며 안주로 먹고 있던 통닭 쪽으로 손을 뻗으려고 할 때였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었건만, 방금 전까지 텅 비어있던 그의 앞자리에는 미모의 엘프 여성이 앉아있었다.

올란도는 벌써부터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마치 깜짝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레 뜨며 소리쳤다.

“아, 깜짝이야. 언제 오셨습니까?”

하지만 엘프 여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예쁜 눈동자 깊숙한 곳에는 올란도에 대한 짙은 혐오감이 깔려 있었다.

그걸 보며 올란도는 아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꼬시는 건데 그랬나?’

그녀가 자신을 인간말종으로 보게 된 건, 그가 그렇게 유도했기 때문이었다.

드래곤이 이 여 엘프를 통해 자신을 감시하려 하는 것이라고 짐작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엘프들은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드래곤의 동정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엘프들과 가깝게 지내는 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물론, 이 모든 건 올란도의 착각이었다.

엘프들이 마법을 통해 워낙 원거리에서 감시하고 있었기에 그로서는 전혀 눈치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주인님께서 당신을 찾으셨어요.”

여 엘프의 말에 올란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말했다. 자신의 모든 행동이 드래곤에게 고자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올란도는 성심성의껏 드래곤을 모시는 척하고 있는 것이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곧바로 준비하고 오겠습니다.”

여 엘프는 손짓으로 자리에 앉을 걸 지시하며 새침한 어조로 말했다. 그녀의 말투에는 깊은 짜증이 묻어있었다. 마치 상관의 지시만 아니었다면 이런 쓰레기와 단 한마디도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듯.

“제 말을 끝까지 듣고 움직였으면 해요. 정말 경박하기 짝이 없네…….”

엉거주춤 다시 자리에 주저앉는 올란도를 보며 여 엘프가 계속 말을 이었다.

“주인님께서는 3일 내로 알카사스 제국의 링카 성에 도착해 있으라고 명령하셨어요. 혹 모르실지 몰라서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링카 성은 알카사스 제국의 서쪽 끝단에 위치해 있는 관문도시예요.”

브로마네스가 아르티어스로 분장한 채 나타나 그랜딜 공작에게 지시한 것이었지만, 그가 브로마네스라는 걸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르티어스를 만나러 몇 번이나 레어를 들락거리며 이쪽 사정을 훤히 꿰뚫고 있던 브로마네스였기에 그 어떤 실수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브로마네스가 레어에 머문 시간이 워낙 짧았기에 실수를 할 여지도 없었고.

여 엘프는 품속에서 작은 가죽주머니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이건 여비예요. 주인님께서 어떤 임무를 하달하실지 알 수 없으니 넉넉하게 넣어놨어요.”

알카사스 제국은 각 도시를 연결해주는 공간이동 마법진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어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이동하는 건 돈만 있다면 아주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알카사스 국경까지 3일 내로 간다는 건 아무리 올란도라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 엘프도 올란도가 그런 의문을 제기할 걸 알고 있었는지 곧바로 말을 이었다.

“내일 저녁때쯤 와서 마법진으로 알카사스 국경까지 보내드릴 거예요. 그동안 준비 단단히 하고 있도록 하세요. 주인님께서는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니까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내일 저녁때 뵙죠.”

여 엘프는 더 이상 올란도와 말을 섞기조차 싫은지 재빨리 모습을 감춰버렸다.

그녀가 사라진 후에야 올란도는 탁자 위에 놓인 가죽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넉넉히 넣었다더니 주머니가 꽤나 묵직했다.

‘확실히 드래곤이 돈이 많긴 많은 모양이네. 녀석의 노예가 된 후로 돈 걱정은 해본 적이 없으니까 말이야.’

이때, 점원 소녀가 시원한 맥주가 가득 담긴 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녀의 표정을 보니 방금 전에 이곳에 엘프가 들락거렸다는 걸 전혀 눈치조차 채지 못한 모양이다.

“더 필요한 거 있으면 부르세요.”

“응, 고마워.”

올란도는 또다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지하실에서 이제 막 꺼낸 맥주는 아주 시원했지만, 올란도는 청량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복잡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슨 일을 시키려는 걸까?’

영웅담에서 드래곤이 인간에게 시키는 일은 거의 대다수가 아주 난해하고 힘든 것뿐이었다.

어쩌면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나마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이라면 드래곤이 오라는 곳이 링카 성이라는 점이다.

링카 성이라면 얼마 전까지 올란도가 속해 있던 붉은전갈 용병단의 본진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성이었다.

“좋게 생각하자. 난 운이 좋은 거야, 운이……. 첫 임무를 익숙한 지형에서 시작할 수 있잖아. 게다가 사방이 탁 트인 드넓은 사막이니 도망치기도 좋을 거고.”

안 그래도 예전에 이미 죽었어야 했을 목숨이었다.

그날부터 반쯤은 삶을 포기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드래곤의 노예가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참, 나도 팔자 한번 고약하군. 스승님의 품을 떠나 근위기사단에 입단했을 때는 세상을 모두 다 가진 것만 같았었는데……. 크~, 맥주가 쓰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맥주를 다 마신 올란도는 빈 잔을 들어 보이며 점원 소녀에게 외쳤다.

“한 잔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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